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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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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대의와 정의 그리고 국익 – 01
프랑스 대내 정보 총국 DGSI 소속인 올리비에는 잔뜩 찌푸린 인상으로 자신의 노트북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파트너인 후배 클로디가 고성능 감시 카메라로 찍고 있는 화면이 곧바로 자신의 노트북 화면으로 전송되고 있는데 그걸로 보이는 광경들이 너무 심각했다.
“잠깐. 조금 전 그 인물 좀 더 확대해봐.”
“양키즈 모자요?”
“아니. 그 옆에 파란티 남자.”
“이 남자 맞아요?”
클로디가 조작한 화면에 잡힌 익숙한 얼굴에 올리비에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제길.”
오늘 워낙 많이 본 반응이라 클로디가 무심하게 반사적으로 물었다.
“이번에 또 왜요?”
“모하메드다. 이 인간까지 나온다고?”
“어? 아랍인이에요? 혹시 테러리스트?”
오늘 들은 이름 대부분이 유럽과 미국계 이름이었던 것에 비해 계통이 다른 이름에 클로리가 약간 놀라 되물었다.
올리비에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랍계지만 엄연히 우리나라 국적이야. 혈통으로는 모로코 계인 파리 태생. 전직 BRI.”
“조직 범죄 퇴치반이요?”
“비교적 깨끗한 사람이었는데 아랍계라는 것이 약점이 되어서 사소한 일로 불명예 퇴직당했어. 누가 봐도 무리였는데 그때 워낙 아랍계에 대한 분위기가 안 좋아서 타겟이 되었지. 그래도 사정을 아는 경찰 상부가 나름 신경을 써주려고 했는데, 워낙 국가에 대한 실망이 커서 다 뿌리치고 프랑스를 떠났다고 들었어. 사우디에서 활동 중이라고 들었는데.”
“어? 그럼 정말 테러리스로 전향한 거 아닐까요?”
“바보냐! 옆에 같이 있는 남자는 양키즈 모자 아니어도 누가 봐도 전형적인 양키잖아! 양키와 아랍계가 같이 하는 테러리스트 조직이 어디 있어. PMC겠지. 아 잠깐! 잠깐! 지금 지나갔던 여자, 녹색 브라우스에 선글라스 낀 할머니.”
철없는 소리 하는 후배에게 짜증을 잔뜩 내며 말하던 올리비에가 움직이는 화면 한쪽에 잡힌 상상도 못 한 존재에 소리를 질렀다.
놀란 클로디가 얼른 올리비에가 지목한 존재에게로 카메라를 돌렸다.
“어, 이 여자요?”
“미친. 이 마녀가 현장에 있다고? 아니 그보다 어떻게 여기 있어. 이런 거물이 어떻게 아무 소문 없이 또 파리에 들어와. 씨발! 윗대가리들은 저번에 깨지고도 또 뭐 하고 있는 거야!”
올리비에가 진짜로 경악해서 놀란 모습을 보이지, 보고 있던 클로디도 놀라서 되물었다.
“누군데 그렇게 놀라요?”
“앤 헤이즈잖아! 바르샤바의 하얀 마녀! 소련 붕괴 당시 동유럽에서 KGB랑 GRU를 갈아 마셨다는 동구권 첩보 조직들의 악몽. 911테러 때 테러리스트 색출 작전의 책임자로 테러리스트로 확정도 안 된 용의자들 닥치는 대로 고문해서 정보를 캐낸 바람에 미국 정계를 발칵 뒤집어 지게 만들었던 과격파. 무엇보다 3년 전까지 CIA 서열 3위인 수석 작전 국장이었던 거물인데 그걸 못 알아봐?”
흥분한 올리비에와 달리 클로디는 시큰둥했다.
“모를 수도 있죠. 3년 전이면 전 입사하기도 전인데.”
“야 이씨. 요즘은 신입 한 테 뭘 가르치는 건데 저런 거물도 몰라.”
“현역 거물들과 주요 감시 위험인물들 위주로 가르치죠. 3년 전 거물까지 언제 배우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뭐 하는 사람인데요?”
“몰라. 내가 아는 건 3년 전에 은퇴까지야. 초대형 스캔들을 폭로하려다가 저지당하고 국가반역죄를 뒤집어썼다는 소문이 돌았지. 지난 30년간 CIA의 블랙 옵스 대부분에 관여한 거물이라서 대체 뭘 폭로하려고 했는지 많이들 궁금해했지. 물론 CIA가 거기에 눈길만 줘도 동맹국이고 뭐고 그렇게 궁금하다는 블랙 옵스의 진수를 직접 당하게 해주겠다고 으르렁거려서 다들 관심 접어야 했지만. 저런 거물이 그렇게 은퇴당했다가 다시 세상에 얼굴 드러내는 것은 굉장히 드문 경우야. 이건 정말 이상하군.”
올리비에가 화면 속 앤 헤이즈를 뚫어져라 주시하며 중얼거리는 동안, 그의 말에 대한 대답이 클로디가 아닌 올리비에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 이야기 좀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
검은색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남자, 존재감을 숨기고 조용히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진이 올리비에의 뒷머리에 총구를 겨누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여러모로 어색해진 차민영과의 대화에서 벗어나고자, 그리고 뭔가 결정을 내리는 일을 미루고자 유진은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그녀의 방에서 도망쳤다. 그건 도망이었다. 그녀에게 자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그 방에서 머물고 있으라고 일단 겁을 주기는 했지만, 명백하게 약세를 보인 것은 유진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일단 방을 벗어난 유진은 잠시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가, 미루었던 일을 처리할 생각을 했다.
7B Avenue Eudoxie Nonge, 97490 Saint-Denis, 프랑스.
왜 자신을 도운 것인지 알 수 없는, 하지만 정말 결정적으로 자신을 도와준 닥터 유센코가 남긴 그 주소.
수상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그 주소를 지금까지 유진은 반쯤은 고의로 외면하고 있었다. 언급된 주소 근처의 우범가에 머물면서도 정작 그 주소지에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 해당 주소지는 광장에 인접한 상가였고, ‘바벨의 기억’을 얼굴에 쓰고 가기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많이 신경 쓰였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여전히 꺼림직하기는 했다. 하지만 ‘바벨의 기억’이 손에 들어왔고, 볼일이 있다고 나온 이상 어쩐지 모르게 이번에 그 일을 처리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목적지로 직행하는 것은 바보짓이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살피다가 이 둘을 발견한 것이었다.
거의 모든 초능력을 회복한 유진에게 있어서, 딸린 짐도 없는 상황에서 조용히 방에 숨어 들어가는 것도, 특수 훈련을 받았다고 하지만 일반인 두 사람의 감각을 속이고 그들 주변에 숨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자신을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원래는 그냥 조용히 관찰이나 할 생각이었는데, 너무도 흥미로운 이야기에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서 모습을 드러냈었다.
소란은 없었다.
클로디는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허리춤의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린 후 한쪽 구석으로 물러섰다. 천방지축 신입으로 보이던 언행과 달리 어설프게 영웅심 따위를 부리지 않겠다는 놀랍도록 침착한 모습이었다.
머리에 총구가 드리워진 올리비에의 행동도 침착했다.
“우리는 DGSI 요원이다.”
그는 우선 자신들의 신분부터 밝혔다. 비밀조직의 인원은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건 모 영화에 나오는 IMF 같은 언더커버 요원이나, 블랙 옵스 임무 부대 같은 인원에게 통용되는 이야기다.
정식 요원이 공식 업무 중, 그것도 자국 내에서 진행 중이라면 당연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을 방패로 쓸 줄 알아야 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프랑스 조직 소속의 정식 공무원은 함부로 건드릴 만한 존재가 아니다. 프랑스는 테러나 암살 보복으로는 미국이나 소련, 영국보다도 더 과격하다는 소리도 듣는 나라이다.
올리비에는 상대가 그것을 알고 조금이라도 조심스럽게 나오길 원했다.
하지만 반응이 별로였다.
“처음 듣는데?”
“Direction générale de la Sécurité intérieure.”
“대내 정보 총국? 대외 정보 총국 짝퉁인가? 프랑스 국내 정보는 국내 정보국 DCRI 관할 아니었나?”
“최근에 조직 개편이 있었지.”
국토안보부와 경찰청 산하 정보총국을 합쳐서 2008년에 만들어졌던 국내중앙정보국 DCRI는 2014년에 경찰소속에서 내무부 직할로 이동하며 국내안보총국(DGSI)로 확대 개편했다. 단순히 국내 치안을 위한 정보 수집 조직에서 엔지니어, 프로그래머, 언어학자 등까지 고용하는 제대로 된 첩보조직으로 확대된 것이었다.
미국으로 치면 국내 안보는 수사 기관의 역할이 더 큰 FBI가 전담하다가 911테러 이후 명실공히 첩보 조직인 국토안보부가 생겨나면서 그 성격과 방법 등이 강경화된 것과 비슷했다.
영국의 MI6가 007로 유명한 것과 달리 MI5는 거의 존재감이 없는 것처럼, 레인보우 워리어 호 침몰사건 등으로 유명한 대외 정보 총국 DGSE와 달리 국내에서도 거의 인지도가 없다는 것도 비슷했다.
유진이 대외 정보 총국 DGSE 짝퉁이냐고 비웃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어쨌든 그 짧은 대화로 올리비에는 상대가 최근 정보에 어둡다는 것과 그걸 별로 숨길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면 경험이 부족하던가.
좋지 못한 신호였다.
적이 아군 조직에 별로 두려움이 없고, 자신에 대해 별로 숨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의 징조였다.
정보 차단은 자신들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입문자가 아니라 흉내만 내는 아마추어도 하는 기본 행동이었고, 그럼에도 정보 유출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정보 유출을 막을 방법이 있다는 의미였다.
이 경우 대부분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가 가장 잘 쓰이는 격언이었다.
경험 부족이라면 더 심각했다.
자신 같은 베테랑이 설치한 보안 조치를 흔적 없이 모두 회피해서 눈치채지 못할 움직임으로 뒤를 잡을 정도에, 뒤에 서 있는데도 목소리가 아니라면 존재감을 느끼기 어려운 상대가 대화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은 너무 무서운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같은 베테랑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후방을 잡혔고, 그것도 여기가 철저하게 보안 처리된 밀실이라는 점을 생각하자 아무래도 의심 가는 것이 있었다.
올리비에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단어를 입에 담았다.
“당신 혹시 XH-009라는 코드 들어봤나?”
올리비에의 말에 유진은 헛웃음을 지었다.
실제 업무를 담당하던 연구소의 연구원들도 잘 모르던 초인 실험체 형식 코드를 이런 곳에서 듣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래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 UE에 이중 소속인 건가?”
Union européenne.
UE의 정식 풀네임은 프랑스어였다.
현재는 독일계와 영국계가 주류이기는 하지만, UE가 처음 만들어지던 18세기만 해도 세계의 중심은 명실공히 프랑스였고, 조직도 프랑스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유진이 쫓고 있는 레퀴프 트루아도 프랑스 조직이고, 닥터 장 폴 리샤르도 프랑스인이다. 그러니 프랑스 첩보조직에 UE 조직원이 있다고 해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유진이 이 첩보원들을 아주 잔인하고 철저하게 처리해도 될 완벽한 명분이기도 했다.
말투에 담긴 격렬한 증오를 도저히 모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기, 올리비에는 서둘러 대답했다.
“아니다. 그 조직은 그냥 이름만 들어봤어.”
“조직원들도 대부분 잘 모르는 정식 이름을 알고, 나도 평생 몇 번 들어본 적 없는 형식분류명도 알고 있으면서 조직 소속이 아니라고?”
“당신이 아까 물었던 하얀 마녀 때문이야!”
“앤이 왜?”
올리비에는 물론이고 조용히 듣고 있던 클로디의 안색도 새하얗게 질렸다.
앤 헤이즈의 이름을 말하는 유진의 말투에는 그녀와의 사적 친분이 느껴지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듣는 사람을 소름 끼치게 만드는 강렬한 살의가 분명했다.
사람의 감정이 풍기는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농밀하고 끈적거리며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는 그 강렬한 증오에 올리비에는 서둘러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생존을 위한 기회라는 것을 느끼고 있는 그의 설명은 장황하고 필사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