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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23화 (23/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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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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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대의와 정의 그리고 국익 – 02

3년 전 앤 헤이즈의 숙청은 그녀를 숙청했던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첩보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앤 헤이즈는 첩보계에서 전설적인 명성을 이룩한 여성이었지만, 그 명성의 대부분은 피와 눈물로 쌓인 악명이 대부분이었다.

젊은 시절 앤이 KGB 고위직을 제거하기 위해 무고한 상대 가족을 이용하고 미끼로 사용하여 같이 희생시킨 작전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 냉전 시기에도 내부에서 반발이 일어날 정도였다. 우리가 상대 가족을 이용하면, 상대도 우리 가족에게 복수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가족을 잃은 앤 에게는 먹히지 않은 소리였다.

911테러 당시 테러리스트라고 확정되지도 않은 단순한 용의자들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고문을 진행했다. 나중에 그들 중 일부가 정말로 결백했다고 밝혀진 일은 대테러전쟁에 대한 미국의 정당성을 날려 버릴 뻔할 정도로 심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밝혀낸 정보 중에 확인이 늦었으면 대형 참사가 벌어졌을 정보도 있었기에 이 일은 무마되었다.

그녀의 행적 대부분이 이런 식이었다.

그녀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법도 정의도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도 거침없이 집어 던질 정도로 과격한 국가 우선주의자였고, 그 과정에서 성과를 얻은 만큼 문제도 같이 일으켰다.

막장으로 보여도 비교적 자국 정치권과 국민의 눈치를 보는 미국이 아니라 표는 안내도 국가적 인종적 우월주의가 강한 유럽이나 상상외라는 러시아 기준으로 봐도 초강경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가 참지 못하고 폭로하려고 할 정도의 스캔들이 무엇인지 그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앤에 대한 조사가 전세계적으로 치열하게 시작될 조짐을 보여서, 당사자인 CIA가 러시아, 중국 같은 잠재적 적국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같이 아군에 속하는 나라들은 물론이고, 자국 내의 다른 정보 조직들에까지 이 일에 관여했다는 증거가 나오면 피로 보복하겠다고 경고할 정도였다.

CIA가 정말로 리미트 풀고 미쳐 날뛰면 무슨 일까지 할 수 있는지 아는 전세계 동종업계들이 전부 군침을 삼키면서도 외면해야 할 정도였다.

원래는 올리비에도 그냥 궁금증만 가지고 끝났을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비정상적인 신체 강화 혈청을 사용하는 국내의 특수 범죄조직을 조사하고 있던 올리비에는 아주 우연히 UE의 존재와 혈청의 원조인 특별한 실험체의 코드명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실험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비슷한 경로로 훨씬 더 상세한 정보를 입수한 앤 헤이즈가 혈청 제조시설을 습격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있을 만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와 동시에 앤 헤이즈 같은 거물조차 제거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배후 조직을 느낀 올리비에는 위험도 함께 느꼈다. 그녀 같은 거물에 비하면 베테랑이어도 관리직도 못 올라간 자신은 정말 하찮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다.

들키면 자신 정도는 흔적도 남기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올리비에는 모든 자료를 파기하고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이 되었다.

옛 첩보 활동 때 추적하던 몇몇 슈퍼 솔져 관련 용의자들의 모습을 확인하고서 불길함을 느꼈다.

앤 헤이즈를 보면서 강렬한 예감에 전율했다.

그리고 유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외면했던 그때의 일이 오히려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을.

올리비에의 장황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뜻밖이군. 열심히 떠드는 동안 뭔가 하려고 할 줄 알았는데, 둘 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군. 내가 살려줄 거로 생각하는 건가?”

클로디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지만, 올리비에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이지만 난 당신의 신체 능력에 대한 자료를 본 적 있어. 뭘 해 보려고 해봐야 더 빨리 죽겠지.”

“그냥 죽으려고?”

“아니 말로 해결해보려고.”

유진은 황당했지만, 방아쇠를 당기거나 하지 않았다.

“말해봐. 어떻게 날 설득할지 궁금하군.”

“살려주면 비밀을 지키겠다. 오늘 우리들의 만남은 우리 말고 그 누구도 모르게 될 거다. 우리도 다시는 떠올리지 않고 잊겠다고 약속하지. 그렇다면 굳이 당신이 우릴 죽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유진은 황당해서 웃지도 못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그의 후배 클로디는 황당한 나머지 입을 떡 벌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어진 올리비에의 이야기는 유진에게 충분히 고민할 여지를 주었다.

“내가 당신에 대해서 아는 건 당신이 큰 힘을 가진 범죄조직에 납치되어 생체실험을 당한 피해자라는 것이다. 보아하니 지금도 그들에게 쫓기고 있는 것 같군. 지금 당신을 쫓는 건 힘과 권력은 있을지 몰라도 감히 자신들의 정체를 시민들에게 알릴 수 없는 놈들이지. 하지만 나와 내 후배가 당신 손에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 정보부와 경찰이 당신을 끝까지 모를 거라고 확신하나? 국가에 충성하는 죄 없는 공무원을 죽인 혐의로 공식적인 국가 규모의 추격을 받는 것을 감당할 수 있겠나? 그것도 지금처럼 온 유럽이 EU의 이름으로 묶인 세상에서?”

유진은 침묵했다.

이 부분은 유진이 가장 많이 고민하는 부분이었다.

유진은 프랑스가 자유와 평등의 나라라는 이미지와 다르게,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한 보복을 미국이나 러시아보다 훨씬 과격하게 하는 나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최근 인터넷에서 본 프랑스에 대한 평가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유럽의 프랑스, 아시아의 중국이라는 평가였다.

고민하던 유진은 물었다.

“당신을 어떻게 믿지?”

“나를 믿지 말고, 내 후배를 믿지 말고, 지금 상황을 믿어 보게. 보아하니 내가 설치한 온갖 보안 시설에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여기 들어온 것 같은데 그대로 떠나면 우리에게 당신을 만난 증거 따위 하나도 남지 않겠지. 우리가 위에 보고해봐야 제대로 보안 조치도 못 하고 병신같이 사로잡혔다고 주장하는데, 관련 증거 하나 제시하지 못하는 병신이 될 뿐이지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어. 또 우리가 충성심과 책임감으로 위에다가 믿지도 못할 보고를 했다고 쳐도 당신이라면 그걸 아는 순간 소리소문없이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겠지. 그리고 그때는 아마 단순히 죽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야, 아닌가?”

올리비에의 달변에 유진은 침묵했다.

올리비에도 클로디도 긴장한 상태로 침묵하며 유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클로디는 상대가 선배를 겨누고 있던 총을 들고 자신을 가리키더니 옆으로 까닥거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의미는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몸을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두려움에 몸이 떨려왔다.

이 행동이 떠나기 위해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 사살을 위해 시선을 피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두려움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갔다.”

올리비에의 목소리가 들리자 클로디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짧은 시간 생사가 오가는 경험을 처음 한 클로디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우며 고개를 돌려 선배 올리비에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과 달리 꽤 담담한 태도에 단지 표정만 심각할 뿐이었다.

“굉장해요, 선배. 이런 일도 아무렇지도 않으신가 봐요. 익숙하신 거에요?”

그 모습에 클로디가 감탄을 토했지만, 대답은 그녀의 예상과 달랐다.

“지랄. 내 평생 오늘처럼 무서운 날은 처음이었다. 넌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라서 행복한 줄 알아라. 왕년에 수단에서 반군에게 포위당했을 때나, 에티오피아에서 비무장으로 인질범과 비밀 협상할 때도 오늘보다는 더 안전했어. 그때는 차라리 죽으면 그만이었으니까.”

클로디는 침묵했다. 죽을 뻔한 것만으로 공포에 젖어 있던 그녀에게 죽으면 그만인데 그러지 못해서 무서웠다는 선배의 말은 상상하기 어려운 혐오와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올리비에는 말을 이었다.

“아까 내가 한 말 그냥 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오늘 일 위에 보고하는 것은 고사하고 어디 가서 누군가에게 입도 벙긋할 생각도 하지 마. 한 10년 지난 다음에 그냥 이런 일 있었다고 회상하게 되더라도 누구였는지는 기억하지 말고.”

“하지만!”

클로디는 반발했다.

프랑스에 대한 자부심과 나름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불타는 그녀는 설혹 나중에 그녀가 위험할지라도 이런 일은 당연히 위에 보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는 여기를 벗어나서 조직의 보호를 받으면 상대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올리비에의 이야기는 그녀의 생각을 바꾸기 충분했다.

“잊지 마라. 이 일은 CIA 3인자 이자 전 세계를 통틀어도 열 손가락은 안 벗어나는 거물인, 우리 국장님보다 훨씬 윗줄인 앤 헤이즈 같은 인물을 국가반역죄를 뒤집어씌워 한 방에 날려 버린 음모에 얽힌 일이라는 것을. 너 같은 초짜는 어설프게 아는 척했다가는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는 흔적조차 말살당하고도 남을 거다. 예전에 앤 헤이즈에 관해 관심 가지지 말라고 직접 우리에게 명령한 인간이 지금 국장이라고.”

클로디는 입을 다물었다.

올리비에의 경고가 워낙 섬뜩했기 때문에 그녀는 생각을 바꿨다. 최소한 보고 하기 전에 분위기라도 좀 살펴보면서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클로디는 정작 그렇게 말한 올리비에가 이걸 누구와 상의하고, 어떻게 이 일에 파고들어 갈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몰랐다.

DGSI 소속의 선후배가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 그들을 떠난 유진의 뇌리에서 그들의 존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유진은 원래 가지고 있던 모든 생각과 계획은 집어던지고 앤 헤이즈를 향해 걷고 있었다.

‘바벨의 기억’을 변형시켜 얼굴 부분만 덮고 있는 전형적인 마스크의 형태가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주목하게 하고 있었고, 유진을 알아본 자들이 소란스러워지는 것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렇게 넓은 광장에서 전술적인 포위를 당하면 위험할 수 있다는 위기감도 지금은 알 바 아니었다.

죽음의 두려움과 다시 사로잡힐지 모를 공포도 지금 자기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죽은 친구들의 단말마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무척 모순적으로 거리는 어수선하면서도 조용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시민과 관광객들이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마스크의 남자가 이목을 끄는 것과 동시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커다란 덩치의 사나워 보이는 남자들이 무리를 지어 뭉치는 모습을 보면서도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기에는 광장의 공기 자체가 너무 무거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은 오직 앤 헤이즈만을 똑바로 바라보며 걸었다.

앤은 그런 유진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지 계속 광장 한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진은 그 이유를 그녀의 가냘픈 목을 움켜잡고 부러뜨리기 위해 힘을 주기 직전에 알게 되었다.

“너 누구지?”

유진의 손에 목이 잡힌 여인은 그가 아는 그리고 그가 만나본 앤 헤이즈가 아니었다.

여인은 생명이 위협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앤 헤이즈. 전직 미국 CIA 수석 작전 국장, 현직은 미 국무부 고문이자, 미국 하원 의회 특사지.”

유진은 혼란스러웠다.

“난 3년 전에 당신을 만나봤어. 당신과 달리 건강한 몸에 두 눈도 멀쩡했지만, 분명 지금 당신과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 하지만 당신은 그녀가 아니야.”

“나를 납치한 다음, 날 흉내 내서 너희를 만나러 간 그녀를 이야기하는가 보군. 그녀에게 원한이 있다면 조금 늦었다. 이미 죽었거든.”

“죽었다고?”

“나를 봐.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장님이었을 것 같니? 그리고 내가 적을 살려두는 사람 같아 보이니?”

유진은 잠시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잘못 알아본 것일 수는 없었다.

눈 앞의 이 여자는 앤 헤이즈이기는 해도 자신이 아는 앤 헤이즈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자신들을 배신한 그 앤 헤이즈가 아니었다.

그건 그녀가 자신이 죽일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유진은 그녀의 목을 움켜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앤은 잠시 그렇게 풀려난 자신의 목을 쓰다듬고는 손을 들어 주변으로 자신은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놀라서 황급히 움직이려 하던 그녀의 경호원들이 미리 받은 지시에 따라 가까이 오지 않고 다시 흩어졌다.

앤은 눈도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편하고 능숙하게 의자를 찾아 앉으며 말했다.

“괜찮으면,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너를 이곳으로 불러 들이기 위한 내 노력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요구해도 될 것 같은데?”

유진은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신이 닥터 유센코를 움직였군.”

하지만 대답은 너무 뜻밖이었다.

“아니 내가 움직인 것은 닥터 리페였지. 닥터 유센코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마리아가 움직였을거야.”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유진은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유진에게 앤이 부드럽게 다시 한번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이 생겼니?”

유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그녀 말대로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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