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24화 (24/196)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재미있게 보셨나요?

재미있으셨다면 [추천]과 [즐겨찾기 등록] 부탁드립니다.

#003 대의와 정의 그리고 국익 – 03

앤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유진에게는 확인해야 할 것 있었다.

“내가 만난 앤 헤이즈는 당신과 무슨 관계지? 그리고 당신은 그때의 일과 무슨 관계가 있나?”

유진인 말한 그때는, 유진이 앤 헤이즈를 아니 자신이 앤 헤이즈라고 주장하던 여자를 만난 3년 전의 탈출 당시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저 연구소를 벗어나는 것만 생각하던 유진이나 대부분의 실험체와 달리, 그들의 지도자였던 로자는 밖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해도, 밖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곧바로 다시 잡혀 오거나, 다 사살당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녀는 은밀히 그녀를 도와주던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최강의 조직과 접촉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벌어진 전 세계의 모든 주요한 사건 사고에 모두 관련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는 조직이자,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의 어둠을 상징하는 조직인, 세계 최대의 첩보 조직 CIA였다.

탈출 작전이 초기에 성공적이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CIA 고위 간부인 앤 헤이즈라고 스스로 자칭한 그 여자와 그 여자를 따라온 특수부대가 연구소의 경비 병력과 교전을 벌여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유진과 로자는 개별로 갇혀 있던 실험체 중 전투력을 갖춘 인원들을 모을 수 있었다.

연구소의 전투원들에게는 개별로 탈출한 실험체를 제압할 작전은 있어도 그들이 무리를 지었을 때 제압할 방법은 없었다. 실험체들은 전투 병력을 모두 쓸어버리고, 남은 실험체들도 모두 구출했다.

그대로 탈출했으면 아마 모든 것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앤 헤이즈가 대가를 요구했다. 연구자료, 실험 데이터, 샘플과 유물 등등. 연구소에 보관 중인 막대한 가치의 정보와 보물들을 원했다.

그것들을 혐오할 수밖에 없는 유진과 실험체들은 거부감을 드러냈지만, 로자가 서로 원하는 것이 있으니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그건 명백하게 실수였다.

탈출에 열중하던 동안에는 통제가 되던 실험체들은 당장 탈출을 시작하지 않을 상황이 되자 폭주하기 시작했다. 간절히 먹고 싶어 하던 음식들을 먹고, 저주받을 연구실을 불태우고, 원한이 있는 연구원들을 쳐 죽였다. 로자는 그런 그들을 제어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녀에게는 유진조차 가담한 그 혼란을 막을 힘이 없었다.

그사이 어떻게 파악했는지 UE의 대규모 전투부대가 연구소를 포위했다. 원래 계획했던 탈출로는 차단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탈출을 도와줘야 할 조력자인 앤 헤이즈와 그의 부하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 뒤로는 어떻게든 포위를 뚫어내기 위해 죽고, 죽이다가 밀리고 밀려서 결국 항복하고 학살당했다.

그 후 3년간 유진은 실패의 원인을 고민하고, 원망의 대상을 찾았다.

리더였던 로자는 원망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녀는 가장 무결하게 희생된 자였다. 다른 실험체들도 원망하기 애매했다. 그들이 한 잘못은 유진도 같이 저질렀고, 모두 각각의 방식으로 그 대가를 치렀으니까.

오직 한 명만이 남았다. 앤 헤이즈. 이득만을 얻고 그들을 버리고 사라진 여자. 유진은 생각보다 너무 일찍 도착한 UE의 부대도 그녀의 음모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이미 처리한 닥터 요하임, 지금 노리고 있는 장 폴 리샤르, 언젠가는 만날 마리아 리페와 더불어 앤 헤이즈는 유진이 가장 우선 적으로 노리고 있는 타겟이었다.

앤 헤이즈를 보자 지금까지 애써 조심하던 태도를 때려치우고 무지성으로 달려든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진짜 앤 헤이즈라고 주장하던 여자가 유진이 만난 앤 헤이즈는 가짜라고 주장하고 있었으니, 유진으로서는 이 눈앞의 여자라도 죽이기 전에 확인할 것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노골적인 살의가 드러나는 유진의 공격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앤은 부드럽고 여상스러운 태도로 대답했다.

“그녀는 내가 아니긴 하지만 또 내가 아니라고 하기도 곤란한 존재지. 혹시 가게무샤라고 들어본 적 있어?”

“위장 대역?”

“너도 보다시피 난 이제 늙디늙은 노인네야. 젊은 시절과 같은 피지컬과 현장 작전 능력은 없어. 하지만 내 이름과 존재가 가지는 가치는 여전하지. 그래서 만들어냈어. 내 이름과 내 모습으로 활동하는 전성기의 요원을. 굉장히 유용했지. 그녀가 사고를 친 다음 그걸 나한테 뒤집어씌우고 잠적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위장 대역을 만들면서 그런걸 대비하지 않았다고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물론 대비책은 다 만들었지. 하지만 내 상관과 내 정적과 내 부하가 합심해서 나한테 뒤집어씌우려고 하면 그런 대비책은 다 무용지물이 될 수 밖에 없지.”

앤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테이블 위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매우 처량한 태도였지만, 유진은 그런 감정에 말려들지 않았다.

자신의 나이 두 배 이상의 기간을 전쟁터보다 더 살벌하다는 첩보계에서 전설로 군림했다는 여자의 표정 따위에 뭔가 의미를 부여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유진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설마 자신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리는 없을 테니까.

중요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그래서 3년 전의 일에 당신은 아무 상관 없다는 건가?”

앤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너도 어느 정도 예상했겠지만, 너를 탈출 시킨 이번 작전은 내가 짰어. 마리아 리페는 생각보다 쉽게 포섭되었지. 그녀도 아마 따로 원하는 것이 있겠지. 충고하는데, 지금 너한테 중요한 것은 3년 전에 일어난 일의 진실이 아니야. 오늘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이지.”

유진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3년 전 일과 당신의 관계는?”

솔직히 유진은 현재의 자신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유진은 애초에 자신에게 미래라는 것은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세상이 자신에 대해 알게 되면, UE에게는 돌을 던지겠지만, 자신은 존재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죽기 전에 자신과 죽은 실험체 친구, 동료들의 일에 책임 있는 자들을 하나라도 더 죽이는 것뿐이었다.

살아서 잡힐 생각은 전혀 없었고, 인류 전체와 싸울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앤은 그런 유진의 증오를 약간이지만 인지하고 있었다. 앤이 유진을 빼내기 위해 접촉한 대상이었던 마리아 리페를 통해 언질 받았다.

마리아 리페에게 그 부분에 대해서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었고, 그게 앤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 자리에 나와 유진을 대면한 이유였다.

앤은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3년 전 그 작전 자체는 내가 승인했어. 그리고 너희가 일으킨 폭동도 어느 정도는 내가 유도한 것이 맞아. UE가 보유한 너희에 대한 자료와 그 밖의 귀중품들을 원했고, UE에게 자료와 인재를 남기지 않으려고 한 이유도 있었지. 하지만 가장 큰 것은 분노가 가득 차 있을 너희를 사회로 꺼내기 전에 일단 그 분노를 최소한 이라도 해소 시킬 목적이었지.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연구원들이 너희가 가장 증오할 최우선 대상들일 테니까.”

“그런데?”

“에니가 UE를 유인해 혼란을 일으켜서 나까지 속인 다음 자료와 귀중품들만 가지고 빠져나갈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지. 그녀에게 붙인 인원들이 거기에 동참하리라고는 더욱 생각하지 못했고.”

에니는 앤의 가게무샤였던 그녀의 이름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난 너희를 배신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너희에게 벌어진 비극에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는 없지. 그게 너처럼 현세의 지옥에 감금되어 있던 내가 그곳을 빠져나오자마자 너부터 탈출시킨 이유이기도 하고.”

유진은 잠시 고민했다.

이 여자의 말을 모두 신뢰할 수는 없다. 그리고 모두 신뢰한다고 해도 이 여자가 죽일 대상인지 아닌지는 애매하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리스크를 감수하고 지금 당장 죽여야 할 정도의 대상인지가 애매하다.

앤이 그런 유진의 마음을 눈치챘다.

“내가 고생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가 원망스럽지 않다면 이상하겠지. 나를 죽이고 싶니?”

“어쩌면?”

“그러지 마. 후회하게 될 거야.”

“목숨이 아까우면 내 앞에 굳이 나타날 필요는 없었을 것 같은데?”

“난 지금 비밀리에 몰래 널 만나러 온 것이 아니야. 보안과 비밀을 위해 허가받지 않은 작전을 하다가 끔찍한 사고를 내는 일은 3년 전으로 충분했어. 난 지금 공식적으로 너를 만나러 온 거야. 미 국무부 직원이자, 의회의 특사로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겠니?”

“당신을 죽이면 미국이 나를 쫓을 것이라는 의미겠지. 하지만 그게 지금 나에게 무슨 의미지? 어차피 전 세계가 날 노리고 있을 텐데?”

유진이 냉소적으로 굴었지만, 그런 유진의 태도에 앤은 미소 지었다. 그녀의 생각대로였고, 여기에 유진을 설득할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했다.

“넌 너에 대해서 알려지면 세상 전부가 너를 쫓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거지?”

“당연한 것 아닌가?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나를 이용해서 영생을 꿈꾸고, 일반인들은 나 같은 괴물에 공포를 느끼고 배척하려고 하겠지. 아닐 수가 없지. 절대로.”

앤은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일단 일반인들은 생각보다 너에게 공포를 느끼지 않을 거야. 3년 전 사건은 계기로 이미 초인 연구의 부산물들이 세계적으로 조금씩 공개되기 시작했어. 너도 만나봤을 거야, 슈퍼 솔져 부대.”

“레퀴프 트루아.”

“그건 UE의 사조직이지만, 한편으로는 프랑스 정부의 영향력도 들어간 부대야. 머지않은 미래에서는 정식으로 프랑스 정부 산하로 흡수될 거야. 레퀴프 트루아뿐만 아니야. 이미 전 세계적으로 충분한 자본과 기술을 갖춘 국가와 조직들은 전부 초인을 양성하고 있어. 그들의 수준이 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들이 사회가 공개될 정도의 때가 되면 사람들은 초인이라는 것만으로 거부감을 느끼기는 어려울 거야. 적어도 너를 특정해서는 어렵겠지.”

“대신 그 자본과 기술과 권력을 갖춘 소수는 더욱더 나를 원하겠지. 남들보다 더 높은 수준과 함께, 지금까지 공개된 자료로는 가지기 어려운 특별한 나의 가치를 얻기를 원해서. 그러고보니 당신도 이미 그걸 누린 것 같군.”

유진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낮아졌고, 마차 야수가 그르렁거리는 것처럼 위압감이 가득했다.

대화의 와중에 유진은 앤이 두 눈이 멀었음에도 사물을 보기에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함께 늙은 나이에 최근에는 고문까지 받았다는 여자가 너무 건강하고 활력 넘친다는 것을 파악했다. 이유를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서 유진 자신의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피 한두 방을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최소한 골수와 장기 정도는 바꾸기 전에는 날 수 없는 짙은 냄새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