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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31화 (31/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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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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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대의와 정의 그리고 국익 – 10

클레이모어 산탄 지뢰를 이용해 만든 함정은 거의 완벽했다.

사방을 모두 점하는 그 공격에서 몸을 피할 방향은 없었고, 피할 방법 그 자체는 몇 가지 있었지만, 제 시간에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사실 유진은 죽었다. 본인도 자신 죽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3년 전 이었다면, 아무리 유진이라도 이 정도 부상에는 진짜로 죽음을 피할 수 없었을 정도였다.

현재가 3년 전과 다른 점은 지난 3년간 유진의 능력을 억제하고 있던 아티팩트 ‘바벨의 기억’이 이제 유진의 일부가 되어 유진의 의지를 따른다는 점이었다.

‘바벨의 기억’으로 감싼 머리는 그 와중에도 머리를 완벽하게 보호했다. 이 공격이 머리가 받는 첫 공격이었다면 직접적인 상처는 없어도, 충격으로 인한 간접 타격이 컸겠지만, 오늘 계속 머리에 있었던 저격 때문에 ‘바벨의 기억’은 그런 부수적 충격파로 막아낼 수 있는 형태로 변형되어 있었다.

‘이름 없는 사슬’은 ‘바벨의 기억’만큼 절대적인 위력은 없었지만, 그래도 가슴 부분을 어느 정도 보호해 주고 심장도 지켜내 주었다.

머리와 심장이 물리적으로 보호되었고, 유진이 가진 갖가지 초능력의 근원인 그 두 곳이 두 개의 아티팩트와 동화되었다. 그리고 동화된 아티팩트는 원래부터 특별했던 그 두 부분에 더욱더 특별함을 추가시켰다.

유진의 육체가 죽었음에도 기억으로 구성된 의지는 살아남았고, 심장은 멈춰서서 더 이상 피를 순환시키는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리고 피의 순환만을 책임지는 원래의 기능과도 상관없이 온몸의 세포들에 재생을 위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었다.

‘바벨의 기억’이 속삭여 주는 비밀스러운 지식을 통해 유진은 이제 뇌와 심장이 동시에 파괴되지 않으면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단지 죽지 않았을 뿐이고, 잃어버린 몸을 재생시키고 정상적인 몸으로 돌아가는 것은 별도의 이야기이기는 했다. 이대로 계속 싸우는 것은 무리이고, 도망쳐서 육체를 복구할 에너지는 공급하고, 재생이 진행되는 동안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심장에 저장된 에너지만으로는 얼마 버틸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유진은 자신이 누가 봐도 명백한 시체가 되었지만, 죽지 않았다는 것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자신을 함정에 빠트렸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걸 모른다. 그럼 그 자체로 자신이 상대를 함정에 빠트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원래 유진은 본인이 가진 압도적인 능력 탓에 이런 식으로 적을 속이는 것에는 능숙하지 못했다. 정면으로 다 때려 부수거나, 아예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처리하는 방식이 유진의 사고방식이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 동안 소소하지만 확실한 함정에 여러 번 걸려서 피해를 보고, 이렇게 치명적 함정까지 당해 보자 작게나마 생각이 좀 트인 것이었다.

그리고 유진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정말 황당할 정도로 쉽게 성공했다.

“어이가 없군. 니가 이렇게 쉽게 내 손에 들어올 거라는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유진은 리샤르의 귀에 속삭이듯이 말했다.

폐가 아직 정상 작동하지 않는 중에 나온 그 목소리는 굉장히 낮고 싸늘하며 섬뜩했다.

조금 전까지 생각보다 쉽게 유진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며 환호하고 있던 리샤르는 갑자기 역전된 이 상황에 당황했으며, 생각도 많았고, 할 말도 많았다.

사실 리샤르는 지금 자신에게 닥친 죽음의 위기보다, 유진이 어떻게 이 상태로도 살아 있는 것인지가 가장 궁금했다. 유진은 그 불가사의한 재생력 때문에 수명 한계 돌파를 위한 인류가 가야 할 미래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이건 수명 한계가 아니라 불로불사의 신이 되는 길이라고 봐야했다.

리샤르는 명백한 개새끼였지만, 과학과 인간개조에 미친 개새끼였고, 자신의 목숨보다 지식에 대한 갈망이 더 우선인 개새끼였다. 그 정도 되니까 이런 정도로 미친 짓도 아무렇지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리샤르는 자신의 지식에 대한 욕망을 위해서 유진에게 질문을 던지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리샤르에게 대해 알고 있는 유진은 그의 개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목의 성대 부분을 조여서 그가 말을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고, 지켜보고 있던 ‘머스킷티어’들에게는 그 모습이 리샤르가 숨통이 조여져 죽을 위기에 처한 모습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공식적으로는 ‘머스킷티어’의 지휘관이며, 리샤르의 보좌관인 알파가 나섰다.

“일단 목을 조이는 그 힘은 좀 줄여주지 않겠나? 그러다가 닥터가 죽으면 인질을 잡은 의미가 없잖아.”

알파가 말하는 사이 다른 ‘머스킷티어’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유진과 리샤르를 중심으로 포위진을 구축했다.

“이봐, 지금 상황이 보이지? 인질 잡았다고 너무 유리하게 생각하지 마.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어.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너에게 사격을 가할 수 있다고. 오늘 싸우면서 너도 우리가 동료라도 얼마든지 미끼로 쓸 수 있다는 것을 봤을 텐데?”

“헛소리하는군. 난 갓난아기 시절부터 이 새끼들 사이에서 자랐다. 닥터라고 불리는 연놈들, 그중에서 이 리샤르를 포함한 몇몇 특별한 개새끼들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지. 이 새끼가 너희를 제어할 방법도 없이 너희를 개조했다고? 너희 혹시 이름에 ‘폰’ 이나 ‘드’ 라도 붙어 있냐? 부친이나 조부가 어디 공작이나 백작이라도 돼?”

알파의 어설픈 협박에 유진은 UE의 현실에 대해 꼬집으며 비웃었고, 알파는 잠시 침묵했다. 확실히 ‘머스킷티어’는 그 고귀하게 평가되는 이름과 별도로 그 유래부터 용병에 가까웠고, 지금도 확실히 소모품에 가까운 용병 처지였다.

유진의 말이 맞았다.

리샤르가 원래 공식적인 지휘관이 없는 ‘머스킷티어’를 자기 맘대로 다루는 것은 상부의 묵인만으로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다.

옛 로마의 규칙처럼 그들 중에 누군가가 리샤르를 죽이면 그들 전부가 연대책임을 지고 처형당하는 것은 당연하고, 주기적으로 리샤르만이 공급할 수 있는 특별한 약물이 없으면, 자멸할 수도 있었다. 또한 그들의 기저 의식 깊은 곳에는 리샤르나 UE의 특별한 인물들에게 해를 끼칠 수 없는 세뇌도 있었다. 그들은 절대로 리샤르를 해칠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자신들의 약점을 공개할 수는 없었다. 이런 일을 당한 것도 끔찍한 상황에서 협상력을 아예 내다 버릴수는 없었다.

알파는 최선을 다해 기만을 시도했다.

“솔직히 말할게. 여기 있는 우리 중에는 닥터에게 진심으로 충성하고 있는 멤버들도 있고, 닥터에게 목숨줄이 잡혀 있는 사람들도 있어. 하지만 우리 중에는 이 기회에 합법적으로 닥터를 쏴 죽이고 다른 길을 모색하고 싶어 하는 애들도 없다고는 할 수 없어.”

“말하고 싶은 것이 뭐지?”

“협상하자. 박사님을 놓아……”

“이 미치광이를 놓아주면 나를 보내주겠다고? 내가 평생 연구소에 갇혀서 가축처럼 자랐다고 바보로 보이나? 보아하니 너희가 모르는 것 같은데 연구소는 실험체에게 고등교육을 한다. 난 7개의 언어로 대화할 수 있고, 수학과 과학, 전산학에 대해서는 대학 교육도 받았어. 망할 새끼들이 역사와 인문학은 제대로 안 가르쳐줘도 상업과 금융에 대해서는 열심히 가르쳤지. 교섭과 거래에 대해서는 잘 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미 너희 같은 놈들이 약속 따위 어떻게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는지 충분히 경험도 했어. 그러니까 3살짜리도 안 속을 사탕발림 따위는 집어 쳐라.”

유진은 장황하게 떠들었다.

원래 유진은 적과 대화를 나누는 성향은 아니다. 리샤르를 잡자마자 성대부터 쥐어짜서 말을 막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성향이다.

지금 떠드는 것은 대화 자체에는 목적이 없었다. 예상보다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서 시간을 끌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말을 길게 늘어놓으며 장황하게 떠든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바로 곁에서 예민하고 유진을 살피고 있던 리샤르는 유진이 말을 하는 와중에 폐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유진의 의향을 눈치채고 알파에게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조금 더 발버둥 쳤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알파를 제외한 다른 자들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씨발. 실험체는 사람 모양을 가축이라고 안 했었냐? 우리와는 다르다고? 그런데 쟤들이 우리보다 훨씬 대우 잘 받았는데?”

“와 저 새끼 저거, 말은 가축이라면서 자기는 우리 따위와는 달리 인텔리라고 말하는 거야?”

“졸라 짜증 나네. 당당한 시민인 우리는 국가에서 무시당하는 동안, 저런 가축 새끼는 고등교육을 받았다고? 씨발, 이러니 니거나 샌드 니거, 칭키 따위 다 추방해야 하는 거라고!”

“역시 총통이 옳았어! 가축 따위에게 고등교육을 하느라고 우리 세금이 낭비되는 거라고!”

팀원들이 중구난방 떠들어댔다.

조금 전까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실력과 냉정함으로, 치열하고 완벽하게 전투를 벌이던 자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오합지졸 같은 모습이어서, 보고 있던 유진이 좀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물론 유진은 그 모습에 방심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오늘 저들에게 당한 공격들이 너무 치명적이었다.

유진은 발악이 심해지는 리샤르의 머리를 한번 후려쳐서 경고한 다음, 알파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희가 진짜 오합지졸인지, 훌륭한 연기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나를 바보로 취급하는 건 그만둬라. 내가 더 화나면 다음에는 이 개자식의 대가리속 뇌수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될 거다.”

“읍! 읍!”

기겁한 리샤르가 발작했고, 팀원들은 입 다물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확실히 오합지졸이라기보다 훌륭한 연기자 쪽이었다.

잠시 꼼수 써봤지만 안 통한 알파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실험체. 너도 뭔가 원하는 것이 있으니까 닥터를 인질로 잡은 거겠지? 그럼 요구사항을 말해봐라.”

“요구사항?”

“그래 원하는 것을 말해봐라. 들어줄 수 있는 한 최대한 들어주겠다.”

“너희 따위가 뭘 들어주고, 뭘 약속할 수 있지? 너희에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권한이나 책임이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나?”

알파는 이를 악물고 최후의 블러핑을 시도해봤다.

“좋아. 솔직하게 말하지. 가능한 리샤르 박사를 살리면 좋겠지만, 너를 놓아주면 닥터는 몰라도 닥터의 윗선이 우리에게 끔찍한 처벌을 내릴 거다. 그러니 우리는 박사랑 너를 같이 죽이더라도, 절대로 너를 놓아줄 수 없다.”

알파가 확실히 뛰어난 현장 지휘관인지는 몰라도, 이런 협상을 해본적이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인질범을 상대로는 절대라는 표현은 절대 쓰면 안 된다. 인질범이 더 이상 협상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게 되고, 그러면 대부분 투항하기보다는 자포자기해서 인질을 죽이고 자폭하려 들기 때문이었다. 단지, 유진은 평범한 인질범이 아니었고, 리샤르를 인질로 잡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화내지는 않았다.

“그래, 이제 본심이 나오는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그 몰골로 어떻게 살아있는지는 신기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나도 알 수 있다. 더 싸울 수 있다면 죽은 척 따위는 하지 않았겠지. 항복해라. 살아만 있으면 앞으로 다시 탈출할 기회를 다시 노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죽으면 끝이지.”

“큭큭큭큭. 크하하하하하!”

유진은 웃었다.

정말 미친 듯이 웃었다.

이럴 생각 전혀 없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웃다가 못해 거의 우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웃었다.

유진이 왜 그러는지 알고 당혹감을 느끼는 리샤르와 달리 알파는 그런 유진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한참 만에 웃음을 멈춘 유진이 대답했다.

“3년 전에 나 한테 당신과 똑같은 말을 한 사람이 있었지. 그때는 그 말이 참 설득력이 있었어. 더군다나 그때 걸린 목숨은 나 하나가 아니었거든.”

“그런가? 기묘한 우연이지만, 결과가 궁금하군.”

“결말부터 말하자면 내 친구들은 다 도살당했고, 지금 너희들 몸속에 그때 도살당한 내 친구들의 피와 살점 그리고 장기 일부가 숨을 쉬고 있군. 내가 지금 어떤 심정일 것 같나?”

장내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유진의 대답이 가진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화를 통해 시간을 벌어서 준비를 끝낸 유진이 리샤르의 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지옥에 가면 준에게 사죄해라. 준이 누구냐고? 니가 그날 마구잡이로 칼질해서 산채로 해체한 내 어린 친구의 이름이다.”

리샤르 박사는 이제야 죽음을 인식했다. 그는 발버둥쳤다. 그 대단하던 지식에 대한 욕망도 진짜 죽음 앞에서는 흔적도 없었다.

그리고.

탕!

방금 전까지 빈손이었던 유진의 손에 갑자기 나타난 권총이 불을 뿜었다.

유진과의 대화를 위해 조금 앞으로 나서 있던 알파가 머리를 뒤로 재 끼며 쓰러졌다. 후방 지휘관이었단 알파는 방탄 헬멧을 착용하고 있지 않았던 탓에 머리에 박히는 구리 탄환을 막아내지 못했다.

즉사였다.

지휘관인 그가 쓰러지자 다른 팀원들이 순간적으로 유진에 대한 주의력을 잃고 당황했다.

으드득.

그 순간을 노린 유진의 왼팔이 리샤르 박사의 목을 수수깡처럼 부숴버렸다.

“쏴!”

누군가의 뒤늦은 괴성과 함께 총탄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리샤르 박사의 시체가 총탄에 걸레처럼 난도질당하며 그 형체를 잃었다.

하지만 유진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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