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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35화 (35/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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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대의와 정의 그리고 국익 – 14

혼란, 혼돈, 공포, 붕괴. 뭐라고 해도 좋았다.

파리의 질서와 치안은 짧은 시간이지만, 완전히 붕괴하였다.

파리 중심가와 인근을 가리지 않고 7곳이나 되는 곳에서 동시에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미국의 월드트레이드센터 항공 테러 당시와 비교하면 각각의 피해 규모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작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7곳이나 동시에 테러가 발생했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도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던 프랑스의 정보부서들과 경찰들의 필사적인 방어 덕에 7곳으로 준 것이었다. 군과 경찰, 헌병대의 특수부대들이 사전에 막아낸 테러만도 10건이 넘었다.

막아내지 못한 것 중 가장 크게 문제가 된 것은 에펠탑 인근 마르스 광장에서 터진 폭탄이었다.

원래는 에펠탑을 노린 폭탄으로, 사복 경찰들과 특수부대들이 에펠탑 진입은 결사적으로 막아냈지만, 터지는 것 자체는 막아내지 못했다.

그 폭탄이 이번 전체 테러의 메인이었다. 폭발 규모가 나머지 폭탄 테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컸다. 에펠탑은 손상되지 않았지만, 마르스 광장이 쑥대밭이 되었다.

에펠탑을 관광하려는 관광객과 파리 시민이 에펠탑 주변보다 오히려 더 많이 모이는 그곳에서 터진 폭발은 엄청난 인명피해를 발생시켰고, 그래서 프랑스 정부와 경찰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인원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긴급 소집된 프랑스 비상 내각도, 위기 대응 본부도 전투가 벌어지는 모든 장소에 관심을 줄 수 없었다. 유진을 노리고 있던 계획에 의한 UE의 내부 사보타주까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유진과 GIGN 으로 위장하고 있던 ‘머스킷티어’와 다시 GIGN으로 위장한 ‘블루팀’이 외부 개입 없이 난장판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유진은 차민영의 방으로 향하던 중간에 파리에서 난리가 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그 난리를 치는 동안, 그 장소가 생드니 시청 바로 앞임에도 불구하고 왜 경찰이 출동하지 않은 것인지 그걸로 이해할 수 있었다.

파리의 상황을 파악한 유진은 아주 잠시 고민하다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차민영이 아니라 차민영을 구하는 과정에서 확인했던 위조여권 업자에게로 발을 돌렸다.

앤의 의도대로 그녀가 준 여권을 인지해 버린 순간 유진은 신분증의 필요성을 느껴 버렸다.

물론 그 여권은 전투 중에 완전히 파괴되어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걸로 국경이나 은행은 쓸 수 없어도, 전산화 안되는 허름한 숙박업소 등에서는 쓸 수 있었을 물건이기에 좀 아까웠다.

한번 손에 들어왔던 것을 잃게 되자, 여권을 만들고 싶은 욕망은 더 커졌다.

물론 당장 급하게 구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파리 상황을 알게 되자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많이 급하게 여겨졌다.

파리에서 대규모 테러를 벌인 것이 누군지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진실이건 아니건 테러는 무조건 이슬람 테러 단체의 짓이 확정적이었다. 당연히 파리 내의 이슬람 커뮤니티에 대한 압박과 감시가 강화될 것이 틀림없었다.

유진이 확보한 여권 업자의 이름은 명백하게 이슬람 계열의 것이었고, 그래서 유진은 지금이 아니면 그에게 여권을 확보할 기회가 없으리라 판단했다.

유진에게는 참 어이없게도 그 이름은 ‘셀림’. 앤 헤이즈가 떠올린 이름과 같은 이름이었다.

셀림. 셀림 바게르 파르사.

이란 출신의 독실한 이슬람교도로 파리 뒷골목의 이슬람교도 이민자들 사이에서 제법 영향력을 가진 이 노인이 CIA의 정보원으로 근무한 것은 20대 시절부터였다.

독실한 이슬람교도가 미국의 악을 상징하는 기관인 CIA에 근무한다는 점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모든 독실한 이슬람교도가 극단주의자는 아니고, 모든 이란계 이슬람교도가 호메이니의 혁명을 찬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란 혁명 당시 파리 유학 중이었던 그는 혁명으로 뒤집힌 고국으로 귀환을 거부하고 프랑스로 망명했고, 이후 그의 배경을 확인한 CIA에게 포섭되었다.

극단주의가 고국에 해가 될 거라는 생각과 CIA와의 협조를 통해 고국에 남은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거라는 나름 뜻한 바 있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그는 여전히 독실한 이슬람교도고, 여전히 CIA의 현지 정보원이지만 고향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암흑가의 중요 인물이자, 첩보원으로 살아 남아오면서 그는 이제 대의에 불타는 젊은이가 아니라 세상 풍파 닳아 버린 늙은 괴물이 되어버렸다.

이제 그에게 가장 남은 정체성 중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 부분은 자신이 파리의 뒷골목에서 이슬람교도 이민자나 불법 체류자들이 최소한의 규칙을 지킬 수 있도록 조정하는 중재자이자, 불법적인 방법으로나마 그들이 조금 더 나은 세계로 나갈 수 있도록 돕는 후원자라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셀림은 갑자기 찾아온 젊은 남자가 대뜸 여권 거래를 요청했을 때, 상대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고 정말로 황당했다.

언급 받기는 했지만 정말로 자신을 찾아오리라고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자신을 어떻게 알고 찾아온단 말인가?

그래서 그 부분부터 물었다.

“나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나?”

“전직 아프리카 군인이나, 용병 출신으로 보이던 자들이 당신의 이름을 언급하더군. 물어보니까 여기 주소를 알려 주더군.”

셀림은 어이가 없었다.

젊은 시절에는 CIA의 정보 공작의 목적으로 위조여권 제작을 하기도 했다. 범죄자나 수상한 인간들에게 따로 표시된 위조여권을 건네 CIA가 그들을 파악하도록 도왔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진짜 위조여권도 많이 만들었다. 하지만 그건 먼 옛날의 이야기다.

그 계통에서 아직 크게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직접 그 일을 하지는 않는다. 그런 일을 직접 하기에는 그가 이제 너무 거물이 되었다. 물론 가끔 희망을 품을 자격이 있는 같은 신앙의 형제를 돕기 위해서 가끔 손을 대기는 했지만, 아직도 자신을 위조여권 업자로 아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유진이 말한 병신이 어떤 놈들인지, 그리고 유진은 어쩌다가 그런 병신과 만나 자신과 엮인 것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 병신들은 지금 어디 있나? 헛소리 한 대가를 치러줘야 할 것 같은데.”

“어딘가 땅속이나 시체 안치소 아닐까?”

셀림은 혀를 찼다.

유진이 살인에 대해 너무 담담하게 늘어놓는 태도로 보아 수틀리면 자신의 죽이는 것도 별로 마다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 그 전에 고문부터 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제 와 새삼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고문은 사양이었다.

셀림은 어떻게 할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냥 적당히 사진 하나 찍어서 CIA 공작용 여권에 작업해서 전달해 주는 것이었다. 유진은 그 퀄리티에 만족할테고, 앤은 자신이 그를 비밀리에 감시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할 터였다.

하지만 셀림은 이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나중에라도 유진이 이걸 알면 원한을 가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셀림은 가능한 유진에게 나쁜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파리 뒷골먹의 거물이자, 중부 유럽에서 손꼽히는 거물급 스파이로서 셀림도 UE, 생체실험, 초인, 슈퍼 솔져 그리고 앤의 퇴출과 복귀에 대해 조금씩이라도 들은 것이 있었다.

자신이 들은 것의 1할만 진실이어도 눈앞의 이 존재를 적으로 삼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과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좋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선은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관여하지 않는 것이었다.

셀림은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기를 들었다.

“나요, 마담을 부탁하오.”

셀림이 갑자기 통화를 시작하자 혹시 경찰이나 조직원을 부르는 것인가 생각했던 유진이지만, 이어진 통화에 당황했다. 셀림의 전화기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셀림이 밝힌 적도 없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데도 새삼 더 놀라지는 않았다.

“마담이 바꿔 달라는군, 유진.”

유진은 허탈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받았다.

상대의 첫 마디부터 유진은 칼로 가슴이 후벼 파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좀 어이가 없군요, 유진. 어떻게 골라도 거길 골랐나요?”

앤 헤이즈는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유진은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녀에 대한 적의가 약간 누그러들기는 했어도 전화로 잔소리 따위 듣고 있을 사이는 전혀 아니었다.

기껏 찾아온 위조여권 업자 따위가 어떻게 앤 같은 거물과 직통으로 연결이 되는지 황당하고, 하필이면 그런 사람을 찾아온 자신의 운에 어이가 없기는 했다.

유진은 다른 업자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약간 골치가 아팠다. 딱히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많이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셀림을 해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앤과 관련된 거물을 건드려서 앤과 미국을 자극하는 일은 피하고 싶었고, 또 충분히 자신을 속일 수 있었는데도 앤에 대해서 알려준 점에 대해 약간의 호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상대방의 연락으로 울려대는 전화기를 셀림에게 건네고 몸을 돌렸다. 그 와중에 살짝 목례로 셀림이 자신에게 보여준 호의에 감사도 표했다.

그 모습이 셀림의 마음을 약간 움직였다.

유진이 압도적인 능력을 갖춘 초인일지라도, 지금 셀림의 눈에 비친 유진은 명백한 약자로 보였다.

유진이 비록 자신의 신앙의 형제는 아닐지라도,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온 어린아이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신실한 진짜 신앙인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셀림은 유진을 붙잡았다.

“시간이 있으면 이 늙은이 이야기 좀 들어보겠나?”

유진은 다른 위조여권 업자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좀 급했지만, 셀림의 목소리에는 그런 유진을 붙잡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유진은 조용히 다시 몸을 돌리고 셀림의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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