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36화 (36/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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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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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대의와 정의 그리고 국익 – 15

마주 보고 있지만 어색한 분위기.

셀림이 먼저 입을 열었다.

“허기져 보이는군. 먹을 것이라도 좀 드릴까?”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바벨의 기억’은 유진을 억제하는 족쇄였지만, 이제는 그를 지키는 최소한의 방어벽이기도 했다.

몸은 미칠 듯이 영양분을 원하고, 굶주림의 고통은 마치 몸이 불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믿을 수 없는 자 앞에서 마스크를 벗고 뭔가 먹을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누군가의 앞에서 마스크를 해제한 것은 차민영이 처음이었고, 누군가의 앞에서 긴장을 잃고 무방비로 있었던 것도 그녀가 처음이었으며, 누군가 건네주는 음식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먹은 것도 그녀가 처음이었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구출, 섹스, 식사, 대화까지, 그녀는 확실히 유진에게 뭔가 남들과는 다른 여자였다.

유진이 잠깐 딴생각에 빠진 사이, 셀림이 말을 이었다.

“좋은 태도군. 식사 같은 건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것만 먹는 것이 좋지. 본인이 직접 모든 것을 준비하면 더 좋고. 독은 총이나 칼보다 더 쉽게 사람을 죽이는 법이거든.”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독 같은 것을 겁내지는 않지만, 유진은 식사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내 편이 아닌 사람과 함께 하는 식사는 사양이었다.

“이런 습관적인 잔소리가 길어질 뻔했군. 짧게 이야기하기로 하지. 위조여권은 어디다 쓸 생각인가?”

“유럽을 떠나려고 한다.”

미국을 생각했지만, 미국이 아니라고 해도 유럽에서 벗어나려면 일단 여권이 필요했다. 걸어서 유럽을 벗어나기에는 너무 오래 걸리고, 너무 많은 노출의 위험이 있었고, 화물선 같은 것에 밀항했다가 들키면 바다에서 미사일 공격 같은 것을 받고 수장당하기 딱 좋았다.

그런 면에서 열차를 이용하건, 기차를 이용하건, 차량을 대여할 것이든 일단 여권이 필요했다.

“안 좋은 생각이야.”

“유럽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 위조여권으로 뭔가를 하려는 것이.”

“어째서?”

“911테러 이후 전 세계 주요 공항과 항만은 전산 네트워크와 강력한 보안 시스템으로 연결되어 있네. 이제 위조여권 따위 전화 한 통 하고 키보드 한번 두드리면 금방 확인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일세. 거기에 각 주요 시설마다 설치되어 있는 CCTV 감시 시스템까지 합쳐지면서, 얼굴이 알려진 거물은 이제 위조 신분 따위로 자신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해졌지.”

유진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이자 셀림은 예를 들었다.

“자네, 빈 라덴에 대해서 아는가?”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투는 정중했다.

“현대 정치와 경제, 군사학 관련 교육 때 들어본 적 있다.”

유진은 연구소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빈 라덴과 911은 21세기 세계의 정치와 경제, 군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이름이었고, 초인과 슈퍼 솔져의 개발 흐름에도 영향을 끼쳤다.

셀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알면 그 친구가 수십 년 동안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표적이었다는 것은 알겠군.”

“물론.”

“그럼 그 친구 어떻게 죽었는지도 아나?”

당연히 알 거로 생각하고 확인을 위해 물어본 질문이었는데,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죽었나?”

셀림은 잠시 황당함을 느끼다가 세상 물정 모르는 유진의 행동을 생각하니 나름 또 이해가 가서 그냥 이야기를 이었다.

“파키스탄의 아보타바드의 호화주택에 머물다가 미국의 해군특수전개발단 DEVGUR에게 사살당했지. 여기서 자네에게도 의미가 있는 것은 아보타바드라는 장소라네.”

“장소?”

“아보타바드는 파키스탄의 수도 근방이고, 빈 라덴이 머물던 곳은 그곳의 호화주택이었지. 빈 라덴이 어디 산골짝 동굴 속에 숨어 지낼 거라고 믿던 미국 애들이 꽤 당황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자네는 반대로 왜 빈 라덴이 호화주택에 머물 생각이라면 굳이 고작 파키스탄이었을까를 생각해야 하네.”

유진은 파키스탄이 빈 라덴이 주 세력권인 아프가니스탄과 거리상 가깝다거나, 알카에다의 주 인적자원인 아프가니스탄 파슈툰족이 파키스탄에도 많이 거주한다거나, 파키스탄이 알카에다에 비교적 우호적인 이슬람 국가라는 점등의 지리적, 사회적, 정치적 요인들을 머릿속에서 떠올렸지만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고작이라는 단어가 걸렸기 때문이었다.

유진의 대답이 없어도 셀림이 계속 말을 이었다.

“정말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난 경험상으로 그곳이 그가 갈 수 있는 최대한의 장소였다고 생각한다네.”

“최대한의 장소?”

“빈 라덴이 자신의 세력권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생각일 수도 있었겠지. 아니 아마 그게 맞을 거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더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했지. 왜 불가능했을까?”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추적을 받으니까 당연히 불가능했겠지.”

“그래 추적받고 있으니 불가능했겠지. 하지만 추적당한다고 왜 불가능했을까? 지금 자네가 하려는 것처럼 위조여권 같은 걸 사용하면 되지 않았을까? 그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파키스탄이나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가명으로 진짜 여권도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

유진은 침음성을 삼키며 대답했다.

“끝까지 속이기에는 그가 너무 유명하니까.”

“맞아. 그거야. 전 세계 주요 국가들도 빈 라덴도 모두 알고 있었지. 빈 라덴이 들키지 않고 숨어 지낼 수는 있어도, 그 정도 거물이 들키지 않고 위장 신분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리고 그런 면에서 자네는 어떨까?”

“나?”

“위조여권은 소매치기나 말단 갱단원 같은 피라미 범죄자나, 불법 체류 노동자 같은 사람들에게는 쓸 만한 물건이야. 시스템은 그런 하찮은 범죄자들까지 적극적으로 추적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해서 그런 자들은 직접 걸리면 그때그때 처벌하는 정도에 불과하네. 하지만 상대가 빈 라덴 같은 거물이라면 위조여권의 사용은 그를 존재를 특정하고 추적하는 근거가 되겠지. 운 좋으면 현장에서 거물을 낚을 기회가 되어주기도 할 테고. 그런 면에서 자네는 스스로가 피라미와 빈 라덴 중 어디에 가깝다고 생각하나?”

유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테러리스트는 아니지 않냐는 말은 그냥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테러리스트는 오히려 모든 국가와 권력자에게 적극적으로 처리해야 할 대상이 아닐 수도 있지만, 자신은 자신을 아는 모든 부자와 국가들에 너무도 탐나는 보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질병 치료, 생명 연장, 인체 강화.

유진은 돈과 권력이 있는 인간들 모두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성배 그 자체였다.

“어설픈 위조여권 따위 사용할 생각도 하지 말게. 그러다가 공항 같은 곳에서 들통나면 자네를 특정하지 못했던 자들까지 불러들이는 수가 있네. 자네가 보기에 UE가 정말 거대한 세력으로 보이겠지만, 이 세계에는 그들에 버금가는 힘을 가진 세력이 대여섯 곳은 더 있다네. 그들 모두에게 표적이 되고 싶지는 않겠지?”

유진은 그냥 숙소나 가게에 사용하기 위한 최소한의 신분증이 필요할 뿐이었지만, 셀림의 이야기는 거창하면서도 살벌하기 그지없었고, 약간의 짜증과 분노를 일으켰다.

“그래서 당신 생각에 내가 어쩌면 좋을까? 그냥 이대로 신분 같은 것은 가질 생각하지 말고 유럽 뒷골목을 숨어서 이동하면서 계속 사고나 치고 테러나 일으키면 될까?”

셀림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난 자네가 유럽을 떠나주었으면 하네. 나를 위해서라도 자네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유럽 시민들은 물론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도 자네가 하루 빨리 유럽을 떠나는 것이 이득이야.”

“어떻게 하라는 소리야?”

“내가 여권 하나를 주지. 위조여권이 아니라 진짜 여권을. 그걸로 유럽을 떠나게.”

유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떤 시스템에도 유진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유아 시절 납치된 후에 그가 존재했던 기록 자체를 UE가 말살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존재 그 자체를 부정당한 것이다. 그런 유진에게 진짜 여권을 그것도 국가도 아닌 뒷골목의 인물 따위가 제공해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생각났다. 셀림이 앤 헤이즈와 연결된 인물이며, 바로 오늘 직전에 앤 헤이즈가 유진에게 여권을 주었었다는 것을.

“앤의 여권인가?”

“이해가 빠르군. 그건 미국 정부가 공식으로 기록한 합법적인 여권이야. 이 세상 그 어떤 시스템에도 위조가 아니라 진짜로 등록되지. 그 누구도 어떤 시스템도 너를 수상하다고 특정하지 못하게 될 거다.”

“CIA를 대표로 미국은 빼고, 말인가?”

“아마 UE도 떨어져 나가지는 않을걸세. 자네가 어디 만화에 나오는 인간처럼 얼굴을 원하는 대로 맘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아, 그러고 보니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성형 수술은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유진의 재생력은 그 작동의 속도는 유진이 컨트롤 할 수 있어도, 그 작동의 방식은 유진이 컨트롤 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유진의 외형은 훈련이나 식생과 상관없이, 유진의 DNA와 이식된 초월자의 시스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다. 어떠한 손상도, 변경도 결국은 다 원래대로 복구되어 버린다.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군. 그 마스크를 계속 쓰고 있는 이유도 가능한 얼굴을 노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겠지.”

사실 머리와 뇌를 보호하겠다는 강렬한 생존본능이 가장 큰 이유지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자네도 느끼겠지만, 전 세계 전부와 싸울 수는 없고, 전 세계 전부를 속일 수도 없어. 그런 면에서 미국은 가장 마지막까지 그래도 믿어 볼 만한 존재일세.”

“미국을 신뢰하라고?”

유진은 어이가 없었다. 영국 정도는 아니어도 미국이 정의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었다.

“물론 신뢰할 수 있는 국가라서가 아니라, 가장 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존재이기 때문일세. 어쩔 수 없이 적으로 삼아야겠다면 미국은 마지막의 마지막이어야 해. 또 자네가 아예 숨어버리면 미국이나 UE가 무슨 짓을 벌일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나? 그들에게 꼬리 정도는 계속 보여주게. 그들이 자네를 찾겠다고 온 세상에 불을 질러서, 자네를 빈 라덴처럼 만들어버리면, 빈 라덴처럼 목숨을 걸고 함께 할 사람도 없는 자네는 정말 비참해질걸세.”

그 부분은 상관없었다. 미국이나 UE가 자신을 빈 라덴처럼 세계의 적으로 만들면 유진은 진짜 세계의 적이 되어줄 생각이 있었다. 살아서 UE에 복수하려면 할 수 있는 일이 꽤 제한적이지만, 목숨을 버려 세계를 멸망시키겠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일이 꽤 많았다.

그것을 제외하면 셀림의 제안은 꽤 애매했다. 그가 CIA의 일원으로 의심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건 조언이라기 보다 유혹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셀림의 이어진 이야기로 조금 희석되었다.

“물론 그 여권으로 미국으로 가거나, 남미로 가거나,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같은 곳으로 가는 바보짓은 추천하지 않네.”

유진은 움찔했다. 미국을 포기한 상황에서 유진이 가장 고민하고 있던 두 곳이 남미 혹은 아프리카였다.

“인적 없고 치안 안 좋은 오지로 숨어들겠다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일세. 그런 곳은 이득이 안 되는 곳일 뿐이지, 무력 투사가 어려운 곳이 아닐세. 미국이 저격수나 전투 부대도 아닌 미사일 폭격으로 암살을 시도한 남미 보스가 한 둘이 아니야. 그런 곳이라면 유럽에서보다 더 거리낌 없이 자네를 상대할 수 있지.”

유진은 슬슬 지쳤다.

여러 면에서 유진이 생각지 못한 부분에 대해 조언해 주고 있는 셀림의 말이 유익하기는 했지만, 장황한 그의 말에 대한 짜증과 허기의 고통이 유진의 인내심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래서 재촉했다.

“당신 말대로 말이 너무 길어지는군. 결론만 말해주겠나?”

셀림은 그런 유진의 모습에 기분 나빠하지 않으며 자신의 생각한 최선의 국가 이름을 말했다.

그것은 유진에게 너무도 의외이면서도, 뜻밖의 이름이었다.

“미국 여권을 가지고 한국으로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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