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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37화 (37/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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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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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대의와 정의 그리고 국익 – 16

유진은 셀림이 건네준 작은 가방을 들고 그의 보석과 장식품을 판매하는 그의 가게를 나섰다.

가방 안에는 앤 헤이즈가 유진에게 건네줬던 그 여권과 같은 내용을 가진 여권과 함께, 앤 헤이즈가 건넸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액수의 현금 그리고 셀림의 가게에서 판매하는 몇 가지 장신구와 기념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진은 초고가는 아니어도 싸구려도 아닌 보석 장신구와 기념품들이 그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것에 황당함을 느꼈지만, 그냥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노회한 셀림이 그런 걸 넣어둔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하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고아한 느낌을 주는 그 물건들이 마음에 들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너무 허기지고 배고파서 더 이상 사소한 걸로 실랑이나 하고 있고 싶지 않았다.

유진이 떠나고, 가게를 잠시 정리하고 문을 잠근 셀림이 앤 헤이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떠났다. 여권과 현금 모두 받아 갔고.”

“여권을 보고 별다른 반응은 없었고?”

“별생각 없어 보이더군. 하지만 그건 여권의 이름을 받아들였다기보다는 그것의 의미를 느끼지 못해서로 보이더군. 그나저나 묻지 않을 수 없군. 여권의 가명에 무슨 생각으로 당신 성을 붙인 거야?”

유진은 별로 주의하지 않았지만, 유진의 위조된 하지만 미국무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그 여권에 적혀 있는 이름은 유진이 원래 사용하던 이름인 유진 스토너가 아니라 유진 헤이즈였다. 그리고 그 헤이즈라는 성은 앤 헤이즈의 것이었다.

“셀림. 그거 알아? 조슈아와 함께 죽은 내 아이, 태어나지도 못하고 내 뱃속에서 아빠와 함께 살해당한 그 아이의 이름이 원래 유진이었어. 아들이 태어난 유진, 딸이 태어나면 유제니라고 부르자고 조슈아와 상의했었거든. 유진 헤이즈라는 내 아들의 이름이고, 그 아이가 받아 간 그 여권의 인적정보에도 유일한 가족으로 모친인 내가 등록되어 있어.”

셀림은 잠시 전화기를 귀에서 떼고 질릴 눈으로 전화기 화면을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앤 헤이즈의 죽은 남편 조슈아 헤이즈의 이름이었다. 부부가 함께 스파이였고, 동유럽에서 작전 중에 KGB에 버금가는 러시아의 첩보기관 GRU 소속의 스페츠나츠와 교전이 벌어져서 사망했다. 앤 헤이즈도 당시 중상을 입었는데, 하필 상처 부위가 자궁 부분이었고 임신 초기였던 아이를 잃은 것과 동시에 두 번 다시 임신 같은 것은 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그녀의 잔혹하고 냉정한 성격은 그때의 일이 원인이라는 것을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죽은 남편과 아이를 입에 올리는 것을 본 사람도 없었다. 그녀의 적중에 그녀를 격동시켜 보겠다고 그 이야기를 입에 담은 자 중에 멀쩡히 죽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여자가 다 늙은 나이에 그때 죽은 아이 이름을 누군가에게 사용한다는 것에 소름이 끼쳤다.

“다 늙어서 미쳤나? 무슨 생각인 거야?”

“국무부 사람들에게는 서류만이라도 그렇게 만들어두면 나나 미국이 필요할 때 그 아이에게 간섭할 여지가 생긴다고 설득했지. 다들 내 희생을 오히려 고귀하게 생각하더군.”

“진실은?”

“그 아이 몸에 떼어낸 간이, 지금 내 몸속에서 내 간을 대신하고 있어. 간 말고도 한둘이 아니야. 내 블랙 사이트에서 구출된 다음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그 덕분이지. 그 때문인지 그 아이가 정말 남 같지 않게 느껴져.”

“나 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황당해하는 셀림의 질문에 앤은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낮게 들려오는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셀림은 정말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노리고 있을지 정말 두려웠다.

죽은 남편과 아이의 복수를 하겠다고 한때 전 세계의 반을 지배한 초강대국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을 상대로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한다. 소련이 무너진 것이 그녀의 첩보 공작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가 흐른 피 중 많은 양은 그녀가 아니었으면 흐르지 않았을 수 있을 피였다.

유진과 이번 작전을 대하는 앤의 태도에서, 셀림은 그때의 그 광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부분은 굳이 건드리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조국을 옛 적국처럼 취급할 생각이라도 하고 있더라도 그건 셀림이 알바가 아니었다.

셀림은 오히려 다른 부분이 궁금했다.

“그나저나 왜 한국이었나?”

셀림이 유진에게 한국을 권한 것은 앤의 요청 때문이었다.

비교적 쉽게 유진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이 굉장히 합리적인 목적지이기 때문이기는 했다.

한국은 UE의 주력인 주요 유럽 선진국의 영향력이 가장 적은 국가 중 하나였다. 대신 미국이 영향력이 막대하지만, 그 미국이라도 대놓고 무장병력을 활용할 수 있는 국가는 또 아니었다. 총기 관련 치안 수준에 관해서는 세계 최고로 손꼽히는 국가이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높은 수준의 사회적 인프라와 생활 수준을 가진 국가이며,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이 가장 적은 나라이기도 했다.

물론 한국보다 치안이나 생활 수준 등이 더 높은 국가들도 있지만, 그런 국가들의 대부분 작은 도시국가들이었다. 숨어 지내야 하는 상황에서는 수도 광역권의 인구수만 2천 만명을 넘는다는 한국과 비교할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뭘로 봐도 유진과 같이 비공식적인 세력에게 쫓기는 자가 숨어 보내기에 가장 최적의 국가였다.

하지만 셀림은 앤이 그런 이유로 유진이 한국으로 가길 원했다고 생각되지 않아서 물었다.

앤은 대답 없이 통화를 끝냈다.

그녀가 유진을 한국으로 이끈 진짜 이유는 오직 그녀만이 들을 수 있도록 혼잣말로 속삭여졌다.

“그곳이 유진이 태어난 곳이니까.”

“한국이라.”

돌아가는 길.

유진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떠올리며 많이 복잡한 마음이었다.

한국은 차민영을 만났을 때부터 고려하고 있던 목적지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길디긴 목록의 중간 어디쯤의 항목일 뿐이었다.

자신이 한국계이고 차민영이 한국인이니 신분 위장과 대리인으로서 여러모로 편리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굳이 그녀를 이용하면 한국에 적응하기 편리하겠다는 생각까지도 없었다.

‘하지만 진짜 그런 걸까?’

유진은 차민영을 구한 자기 행동을 스스로 완벽하게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를 구해준 이후 그녀 덕분에 얻은 것들이 꽤 많기는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그 당시에 기대할 만한 것들이 아니었고, 또 생각할만한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셀림의 입에서 한국이 언급되고, 그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잊고 있던 아니 모르는 척하고 싶어 했던 옛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내가 아닌 여자를 임신시킨 남자.

원한 적 없는 아기를 자기 뱃속에서 지우는 대가를 바란 여자.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 아이의 탄생을 원한 남자의 어머니.

태어난 아기의 존재와 아기에게 아무런 모정도 느끼지 못하는 딸에게 절망한 여자의 어머니.

아기를 죽이고 싶어 했던 남자의 가족들.

태어난 것 자체가 불행인 손자를 불쌍히 여겨 외국으로 숨긴 남자의 아버지.

대가를 받고 맡은 아기의 죽이라는 회유에 넘어가 아기를 죽일 킬러를 고용한 어떤 부부.

태어나서 UE의 연구소로 팔려 오는 동안 겪은 많은 기억, 그 당시에는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그 일들이 새삼스럽게 다시 떠올랐다.

유진이 겪은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UE의 죄악이었지만, 유진은 원래 그런 것들 겪지 않아도 되었었다. 자신의 피가 시작된 그 가문이 아니었다면.

UE와 CIA라는 가장 눈에 띄는 적에 대한 우선적인 관심이 사라진 지금 유진에게 떠오른 새 목표는 그들이었다.

유진은 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생각을 굳혔다. 그리고 그걸 위해 차민영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녀는 물론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뭐든지 하겠다고 약속했었고, 유진 자신을 거스르지도 못하는 처지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한국의 딸에게 안전하게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그 딸이 있는 한국에서까지 자신을 도우라고 하면 그녀의 반응이 부정적일 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유진의 그런 고민은 호텔 방에 도착하고 나서 조금 바뀌었다.

어느새 어두워진 파리. 사방에서는 아직도 잡히지 않은 불길이 치솟고 있고,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도시 전체를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으며, 차민영이 머물던 호텔은 중심가의 고급 호텔임에도 불구하고 단전 상태로 어두웠다.

그리고 그 어두운 방 한구석에서 차민영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어떤 미친놈들이 그녀의 호텔방문을 미친 듯이 두드리고 있었고, 놀랍게도 이 고급 호텔에서 어떤 호텔 직원도 그들을 제지하러 오지 않고 있었다.

“문 열어! 이 돼지 같은 동양 창녀 년아! 문 열란 말이다! 그 많은 음식을 너 혼자 처먹을 작정이냐! 문 열란 말이다!”

불어가 아니라 영어라서 알아들을 수 있는 그들의 고함은 차민영을 더 두렵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흔한 철제 도어와 달리 이 프랑스 호텔의 메인 도어는 목재였고, 제법 튼튼하기는 하지만 계속되는 충격에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유진이 도착한 것은 그 문이 거의 부서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유진은 우선 현관으로 가서 문이 부서지기 전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갑자기 열려 버린 문에 오히려 약간 당황한 문밖의 인물들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흑인 하나에 백인 둘로 이루어진 건장한 체격의 그 사내들은 자신들의 눈앞으로 내민 물건을 정확히 알아보고 기겁해서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나름 둔기나 칼을 들고 있기는 했지만, 총구 앞에서 만용을 부릴ㄹ 정도는 아니었다.

Colt M1911 피스톨은 미국인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물건이니까.

“어, 그게 그러니까.”

그들은 뭐라 변명을 해보려 했지만, 유진은 짧게 끊었다.

“내가 여기서 너희를 다 쏴 죽이면 그건 살인일까? 정당방위일까?”

프랑스 법률에서는 애매하지만, 미국에서는 명백한 정당방위다.

“살려 주세요!”

덩치는 커도 나이는 별로 많이 보이지 않는 그들은 기겁해서 애원했다.

“조용히 꺼지고, 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라. 너희들 발소리만 들려도 방아쇠를 당겨 버릴 테니까.”

세 미국인은 네 발로 움직이는 개처럼 황급히 도망쳤다.

유진은 문을 닫고 고개를 돌렸다.

차민영이 바닥에 주저앉아 안도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유진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빵 자르는 칼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그건 식사 도구치고는 제법 많이 날카로운 물건이기는 했고, 그런 거라도 일단 들고 자신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그녀의 노력이 가상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건 그녀를 지키기보다 오히려 더 위험하게 만들 물건이었다.

“어이가 없군. 당신 또 죽을 뻔한 건가?”

이걸로 이틀 사이 벌써 3번째였다. 죽을 뻔한 그녀를 구해준 것이. 이 정도면 이 여자는 자신이 없으면 절대로 살아서 파리를 떠날 수 없다는 운명이 느껴질 정도였다.

차민영도 비슷한 것을 느꼈다. 계속해서 닥치는 위험한 일들에 그녀의 정신은 이제 정말 한계였고, 눈앞의 남자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알면서도 이 남자에게 어느새 의지하고 있었다.

유진이 차민영에게 다가갔고, 차민영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유진이 허리를 숙이고, 차민영은 그 목을 끌어안고 유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첫 키스였고, 암묵적인 계약의 승인이었다.

유진은 굳이 한국으로 함께 가기 위해 그녀를 설득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003 대의와 정의 그리고 국익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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