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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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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집과 아이와 여자, 그리고 여자와 또 여자 – 03
차수연은 성심성의를 다해 차민영의 보지를 정성껏 핥았다.
세뇌되고 훈련되어 스위치가 눌리면 정해진 동작을 반복하는 장난감과 같은 그녀의 행동에, 차민영은 사실 자신이 이렇게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짜증이 났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차수연도 여전히 죽은 남편의 그림자를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차민영은 이런 상황이라면 확실히 자신이 다시 차수연을 지배하는 것도, 그리고 유진에게 사용하는 것도 차수연에게 나쁘지 않겠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정신없이 차민영의 보지를 핥던 차수연이 정신을 차리고 입을 뗐다.
차민영은 엉망이 된 차수연의 얼굴을 손수건을 닦아 주며 물었다.
“남자가 있니?”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망연자실해 하던 차수연은 여전히 자신을 압도하는 차민영의 박력에 순순히 대답했다.
“없어요.”
“지난 6년 내내?”
“5년 전에 한 명. 하지만 반년도 못 갔어요. 선배도 아는 남자예요. 주호씨.”
정신을 차린 탓에 더 이상 주인님이라고는 부르지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약간 눈치를 보기는 했다.
차민영은 그런 그녀의 태도는 보다는 언급된 이름에 눈살을 찌푸렸다.
악연이 있는 별로 좋지 않은 이름을 들었다.
하지만 이미 오래된 이야기라고 하니 넘겨버리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다음 플라이트 언제니?”
“선배?”
“유럽 근무였으니까 이틀 쉬고 3일 후지?”
“선배, 설마?
차수연을 슬슬 불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차수연은 죽은 옛 연인이자 주인 강준화에게 지배당하던 시절의 기억을 잊지 못했고, 차민영에게 애증과 미련을 느끼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그 시절을 완전히 악몽으로 기억하는 차민영에게 비해 차수연은 나름의 추억으로 여기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모를 나이는 아니었다.
문제는 마음을 그렇게 먹더라도, 그녀는 그걸 거부할 수 없게 조교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선배, 이러지 마요. 우리 사이에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그 와중에도 차수연은 가련하고 애처로운 모습을 보이며 애원했지만, 차민영은 코웃음을 쳤다.
”우리 사이? 니가 나를 준화 씨에게 팔아먹었던 사이? 우리가 함께 지옥에서 뒹군 사이인 것은 맞지만, 나를 그 지옥으로 잡아 당신 것은 너라는 것은 아주 상큼하게 잊어버렸니?“
차수연은 이를 악물었다.
이 이야기가 나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인천 도착하면 나와 함께 간다. 약은 당연히 먹고 있겠지?.”
차민영은 의사를 묻는 것이 아닌 결정을 통보했다.
차민영이 언급한 약은 피임약이었다. 차수연은 약을 언급하는 차민영의 말에 자신의 불길한 예상, 차민영이 자신을 그녀의 새 어린 애인에게 바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차수연은 어설픈 마음으로 차민영을 자극한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늦어버린 상황이었다.
그녀는 차민영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귀찮다고 했을텐데?”
차민영이 자리에 돌아오자,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 듯 보였던 유진이 한마디 했다.
차민영은 움찔했다.
귀에 헤드폰을 끼고 영화를 보고 있는 듯 보였던 유진이 제법 멀리 떨어진 화장실에서의 일을 모두 듣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유진이 인간 이상의 뭔가 알 수 없는 능력을 보여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계속 놀라고 있었다.
그래도 파리에서와 달리 조금 당당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귀찮을 일은 없을 거예요.”
유진은 약간 달라진 태도가 느껴지는 그녀의 모습에 호기심을 보이며,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차민영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파리를 떠나 한국에 가까워지는 것에 더해서 차수연을 굴복시키면서 억눌려 있던 그녀의 강인한 자존심이 조금씩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유진은 피식 웃었다.
“나를 귀찮게 하지 않으면 상관없겠지.”
차민영은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유진의 시선은 다시 보고 있던 영화로 향했다.
모니터에는 영화 ‘본 슈프리머시’가 한참 피날레로 향하고 있었다.
차민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굳이 첩보영화를 보고 있는 거예요?”
“필요할 거라고 권유받아서.”
차민영은 유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본 시리즈가 잘 만들어진 첩보영화라고 하더라도 진짜 첩보원이 그걸 보면서 재미를 느낄 수 있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은 제이슨 본 시리즈만이 아니라, 제로 다크 서티, 시티즌포, 스노든 등의 영화를 보며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들은 앤 헤이즈가 유진에게 전달한 메모에 있던 책과 영화 리스트 중의 일부였다.
일단 프랑스를 벗어나야 하고, 방법이 유일했기에 유진은 셀림이 준 여권을 사용했다. 그걸 이용해서 비행기표를 예약하자 그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앤 헤이즈가 출국장으로 사람을 보냈다. 전달받은 것은 신용카드와 2장의 메모였다.
그녀가 건넨 여권이 감시되고 있음은 분명하므로, 새삼 놀라지는 않았다.
그저 한국에 도착하면 시간을 가지고 여유 있게 제대로 된 다른 신분증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한국에 계속 머물던, 다른 곳으로 다시 이동하게 되건 이 여권을 다시 사용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들을 보면서 생각이 좀 많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구축한 전 세계적인 감시 시스템의 위력은 유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공개된 정도로도 이 정도면 도대체 공개되지 않은 영역에서의 수준은 어느 정도 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영화 말고 인터넷에서 찾아본 온갖 음모론들도 신경 쓰였다.
다들 그걸 믿는 사람들을 바보로 여기는 그런 글들이었지만, 유진은 그 헛소리 같은 음모론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야기도 찾아냈다.
단지 잠시 훑어본 것만으로도 세상이 유진이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살벌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설프게 위조 신분증 따위 쓰다가 다른 존재들의 관심 더 끌어들이지 말고, 차라리 미국과 협상하라는 셀림의 이야기가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그리고 유진은 곧이어 앤이 보낸 또 하나의 메모에 대해서도 더 고민하게 되었다.
비행기가 인천에 도착하고, 차민영과 헤어져 따로 외국인 입국 심사대로 향했던 유진은 황당한 꼴을 당했다.
입국 심사관은 유진의 여권과 짐을 확인하고는 간단한 나이와 이름 정도를 물어보더니, 곧바로 공항 경비대를 불러서 별도로 조사실로 유진을 연행했다.
유진은 당황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공항에서 곧바로 사고를 치기는 애매해서 반항하지 않고, 그들을 따라갔다.
혹시 한국 공항에 UE의 영향력이 닿았다거나, 한국 정부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인가 약간 걱정했는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조사실에서 공항 경찰이라고 밝힌 두 사람이 유진을 추궁했다.
“여행객이라고 하셨는데, 갈아입을 옷도 없군요. 그런데 이 조각상은 가지고 있고요. 이 수상한 조각상 뭡니까?”
“나이로 보아 학생인 것 같은데 어떻게 동행인도 없이 혼자 여행하는 거죠?”
”한국 이민자입니까? 아니라고요? 한국어가 너무 자연스러운데 어떻게 익힌 겁니까?“
”핸드폰이 없는 이유는 뭐죠?“
사실 유진의 모습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수상함 그 자체로 출입국 심사에서 문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파리 드골 공항의 출국에서 문제가 안 된 것은 담장자가 보기에 유진에게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출국하는 외국인에게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파리 드골 공항 관리자의 직무 유기에 가까웠다.
테러의 혼란이 수습되기는 했어도 정상화까지 된 것은 아니었던 드골 공항의 직원은, 아랍인도 아닌 동양인에게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저 외국인이 빨리 프랑스에서 꺼져주는 일이 고마울 뿐이었다.
그에 반해 처음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인 입국자에게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인천 공항의 담당자의 눈에는 유진은 너무도 수상스러운 존재였다.
유진이 심사를 위해 제출한 물건 중에서 열쇠나 핸드폰 같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자질구레한 소지품도 하나도 없었다. 이 시대에 핸드폰이 없는 틴에이저 미국인이라는 주장은 솔직히 누가 봐도 어설픈 위장 설정 느낌이었다.
외모도 그런 의심을 부채질했다.
아무리 봐도 혼혈도 아니고 순수 한국인으로 보이는 명백한 동북아계의 외모인데, 여권에 붙은 성은 동양계가 아니고, 출생지는 동양계가 거의 없는 미국 남부 텍사스 주로 되어 있었다. 이민자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런 주제에 또 구사하는 한국어는 틀림없이 토종 한국인 네이티브 발음이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유진이 소지하고 있던 조각상이었다.
그건 유진이 버리기 아까워서 챙긴 총기와 탄약을 밀수하기 위해서 ‘바벨의 기억’을 이용해서 만든 권총과 탄약 보관함이었다. 유진이 나름 애써서 자신의 기준에서 최대한 수상해 보이지 않게 모양을 만들기는 했는데 그건 유진 기준이었다.
사각형의 모양에 에펠탑과 개선문 등의 파리 전경을 음각으로 새겨 넣은 그 물건은 명백히 속이 빈 상자로 보였고, 그 안에 마약이나 밀수품이 들어 있을 것 같은 명백한 의심이 드는 물건이었다.
유진을 심문하던 자들은 그 안에 마약이나 밀수품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문제는 어쨌든 예술품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아무리 세밀하게 살펴봐도 연결 부위가 전혀 없는 통 주물이며, 탐지견이나 감지 시스템, X레이 등에도 아무것도 발견되는 것이 없다는 점이었다.
부쉈다가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은 없는데, 유진이 진짜 미국인이라면 후폭풍이 크게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기에 유진을 압박하는 중이었다.
신분이 가짜라는 증거를 찾거나, 유진에게 조각상을 부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진은 갈등했다.
일단 자신이 계속 버티면 이들이 뭘 어떻게 더 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유진이 알기로 한국은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서 시민권이 굉장히 제한되는 국가였고, 공무원은 임의로 불법적인 권한을 행사해도 관례라는 이름으로 묵인받는다고 들었었다.
이들이 입국을 거부하거나, 계속 구속해 두려고 할 때 자신이 뭘 할 수 있을지 애매했다.
이대로 추방당해 다시 프랑스로 가게 되거나, 미국으로라도 가게 되면 골치 아프게 될 터였다.
그렇다고 여기서 무력을 사용하면 그건 더 골치 아플 것이 뻔했다. 당장 이 방에도 감시 카메라가 달려 있었고, 공항에는 카메라가 없는 곳이 없어 보였다. 온 세계에 자신을 광고하게 될 터였다.
앤이 보낸 두 개의 메모 중 황당했던 두 번째 메모의 내용이 새삼 유혹적으로 느껴졌다.
‘서류상이라고 해도, 내 아들이 된 것을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름 유용할 거야. 공식적으로 의붓어머니가 미국 국무부의 고위 관료라는 점은.’
그냥 자신의 성으로 가명을 만든 것이 아니라, 서류상이라고 해도 공식적으로 자신을 아들로 등록했다는 앤 헤이즈의 메모를 보며 유진은 앤이 정말 미친 것이 아닌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유진은 여권에 적힌 자신의 가명 유진 헤이즈의 헤이즈를 보면서도 아무 생각도 없었다.
애초에 M16의 개발자 유진 스토너의 성과 이름을 따와 유진 스토너가 이름이었다. 친구였던 카를의 이름은 발터PPK로 유명한 발터사의 창립자 카를 발터였고, 미하일 칼라시코프나 알렉세이 수다예프 같은 소련 총기 개발자들의 이름은 물론이고, 중국인인 류칭언 같은 이름이 붙은 친구들도 있었다.
유진에게 이름, 특히나 가명은 아무 의미 없는, 그냥 문자의 나열에 불과했고, 헤이즈라는 이름도 그렇게 받아 들였다.
그래서 앤의 메모에 적힌 내용은 충격적이다 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였고, 여권은 이번 한 번만 쓰고 버린 다음 다른 신분증을 찾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았던 영화나 음모론들로 부족해,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되니 유진으로서도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셀림의 충고이해 계속해서 갈등하던 유진은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당신들이 뭘 하기 전에 우선 미국 대사관에 전화부터 한 통 하는 것이 좋을 거야.“
”대사관?“
”그래 대사관에 전화해서 국무부 장관 고문인 특별 보좌관 앤 헤이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잡아두고 있는데, 본인이 맞는지 확인해 달라고.“
”어? 어?“
”나한테서 범죄 증거 찾아내면 미국 정부에 좀 잘난척할 기회가 될 거야. 당신들 고위 관료 자식이 사고 치는 걸 잡았는데, 주위 좀 하라고. 하지만 경고하는데 내 잘못을 못 찾아내면 반대로 한국 외교부에 당신들 이름 박아서 미국 국무부 장관의 공식 항의를 넣어주지. 내가 못 할 것 같으면 어디 당신들 마음대로 해보고.“
어쩐지 자신의 영혼이 깎여 나가는 것 같은 느낌 속에 유진은 앤 헤이즈의 이름을 팔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