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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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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집과 아이와 여자, 그리고 여자와 또 여자 – 04
차민영은 만나기로 약속한 입국장 앞에 유진이 보이지 않자 당황했다.
차민영은 찾아야 할 화물도 많았고, 세관 신고할 물품도 많아서 이것저것 서류 작성까지 하면서 꽤 시간이 소모되었다.
그에 비해 유진은 짐이라고는 어깨에 메고 있던 작은 가방 하나뿐이었니 금방 입국 심사를 끝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진이 기다리다가 짜증이라도 내지 않을까 싶어서 서둘러 움직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고생 끝에 나온 입국장 주변에 유진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국장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유진이 자신을 두고 먼저 갔을 리는 없으니 입국 심사 중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사고 친 것 아니겠지? 혹시 뒤늦게라도 프랑스에서 수배라도 걸린 걸까?’
여러 가지 불안한 사람이라서 무슨 일이 벌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그녀도 같이 문제가 될 일도 많았다.
초조하게 유진을 기다리다 보니, 차수연이 먼저 나타났다.
“우리 주차장에서 보기로 한 거 아니야, 선배?”
차수연은 기내에서 차민영에게 꺾이고 굴복당했던 것과 달리 꽤 도발적인 모습이었다.
심란한 차민영은 그런 차수연의 도발적인 모습에 짜증을 느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차수연은 당당하게 그런 차민영과 눈싸움이라도 하듯 시선을 마주했다. 하지만 차민영은 차수연의 눈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깨에 힘주고 당당한 척하고 있지만, 그 안쪽 깊은 곳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이 내재해 있었다.
차수연은 사실 차민영을 무시하고 도망가 버릴 생각이었다. 어린 애인을 옆에 끼고 있는 차민영을 보고 욱해서 질러 버리기는 했지만, 이내 굴복당했다. 이대로 차민영의 의도대로 끌려가면 끔찍했던 과거로 다시 돌아가게 될지 모르니 겁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도망가지 않기로 했다. 이대로 도망가면 앞으로 평생 차민영의 그림자를 두려워하며 살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제 간신히 과거에서 좀 벗어났는데, 다시 그렇게 살기는 싫었다. 무엇보다 이제 그녀도 나체 사진과 섹스 비디오 좀 찍혔다고 겁먹고 시키는 대로 하던 20대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평판을 걱정할 상황도 아니었다.
차수연은 차민영이 그 어린 애인을 시켜 자신을 강간하고 협박이라도 하면 그걸 이용해 두 사람 다 지옥으로 보내 버릴 계획까지 세웠다.
차민영은 대충 차수연이 뭔가 불손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무시했다.
기내에서의 일로 여전히 그녀가 과거 그대로의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본인이 무슨 생각이든 굴복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 당시 그녀들이 받았던 세뇌와 조교는 몇 년 외면했다고 벗어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차민영은 이번 파리에서의 일로 확실히 깨달았다.
그래도 차수연의 도발은 좀 짜증 나기는 했다.
“선배의 그 어린 원조교제 애인은 어디 갔어?”
“애인 아니고, 원조도 아니야!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헤에, 내가 선배를 아는데 그런 거짓말을? 선배가 비행기에서 그 짓을 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바로 봤는데? 그거 아니어도 워낙 선배가 티를 많이 내서 후배 크루 하나가 부녀가 남편 몰래 어린 모델 돈으로 꾀어서 밀월여행 다녀오는 것 틀림없다고 확신해서 내가 선배 돌싱이라고 변명해야 했어.”
‘이 썅년이!’
차민영은 입에서 튀어나오는 욕설을 간신히 삼켜냈다.
성질 같아서는 뺨이라도 후려쳐버리고 싶은데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차수연의 동료로 보이는 스튜어디스들이 그녀들을 보며 소곤거리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성질대로 하기에는 너무 보는 눈이 많았다.
차민영은 혹시나 차수연이 유진에게 실수하지 못하도록 경고할 필요성을 느꼈다.
“돈으로 꼬신거 아니고, 모델도 아니고, 밀월여행도 아니야. 애초에 이번에 프랑스에서 만난 미국인이라고. 그래서 외국인 입국 심사대로 가는 바람에 헤어져서 지금 기다리고 있는 거고.”
낮은 목소리로 이를 갈며 말한 차민영의 대답에 차수연은 많이 놀랐다.
“어? 이번 여행에 만난 거라고? 미국인? 몇 일 여행이었던 건데 남자를 만들어? 선배, 한눈에 반하거나, 남자 필요해서 원나잇 하는 그런 성격 아니잖아? 뭣보다 뭐하는 남자야, 그거? 척 봐도 어려 보이던데?”
“위험한 남자.”
“뭐?”
“파리에서 위험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이가 나를 구해줬어. 자세히는 말해주기 그렇지만 총과 칼이 있었고 피를 봤다는 정도까지는 이야기해주지. 나도 사실 그이와 함께 한국까지 오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그이가 나와 함께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했을 때 거절할 수가 없었지. 무서워서. 그러니까 너도 그이 앞에서는 입조심 해.”
차민영이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그 말속에 담긴 두려움과 긴장감이 차수연에게도 명확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차수연은 그런 차민영의 말을 쉽게 믿지는 않았다. 그런 평가를 듣기에 그녀가 본 차민영의 애인은 너무 어리고 곱상한 아이였다.
차수연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따져 물어보려 했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내야 했다.
이야기 대상인 유진이 게이트를 넘어서 입국장으로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진! 여기!”
차민영은 서둘러 유진에게 손을 흔들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차수연도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가 움찔했다.
유진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왠지 모르게 두렵고 무서운 느낌을 주는 분위기였다.
“무슨 일 있었어?”
절로 붙으려는 ‘요’자를 옆에 있는 차수연을 의식해서 간신히 끊어낸 차민영의 질문에, 유진이 자신도 모르게 치솟았던 살의를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일단, 여기서 나가지. 오래 있고 싶지 않군.”
유진은 자신을 향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 공항 감시 카메라들을 생각하며 서둘러 걸었다. 차민영의 옆에 있는 차수연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유진이 앤 헤이즈의 이름을 팔아서 유치한 소리를 했던 것은 결론적으로 말해서 약간 무의미한 일이었다.
유진이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유진의 여권에 대한 위조 여부 확인을 위해서, 이미 미국의 관련 부서 쪽으로 조회를 신청한 상황이었다. 미국 측에서는 평소보다 굉장히 빠른 처리 속도로 유진이 자국 고위 공직자의 자녀이며, 범죄 이력 없고, 신원 확실하다고 통보했다.
유진은 조사하던 한국 직원들은 그 조사 결과를 유진이 듣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전달받았지만, 유진의 귀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확인하고도 한국 조사관들이 유진을 바라보는 표정이 오히려 더 의혹을 가지는 표정으로 바뀌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앤의 충고에 따라 그녀의 아들로 기록된 여권을 쓴 효과 자체는 있었다.
조사관과 동석했던 경찰관은 여전히 유진을 계속 수상하게 여기고 있었으나, 곧 상관으로부터 문제 일으키지 말라는 경고를 듣고 유진을 풀어줘야 했다.
유진은 셀림의 충고를 떠올렸다.
위조 여권 따위 사용했다면 그것이 아무리 잘 만든 물건이라고 해도 이번 상황에서 들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에 일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을지 유진 본인조차 상상하기 어려웠다.
앤의 충고도 떠올렸다.
유진이 앤의 이름을 직접 거론한 것은 별로 의미 없고 창피한 꼴이 되었지만, 앤의 아들로 기록된 여권 그 자체는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그녀의 신분 때문에 입국 심사관과 공항 수사관들은 유진을 수상하게 여기면서도 결국 풀어줘야 했다.
그렇지만 확실히 깔끔하게 처리된 것은 아니었다.
“실례했습니다. 부디 오늘의 불쾌한 기억은 잊으시고 즐거운 관광 즐기시길 바랍니다.”
정중하지만 형식적인 사과와 함께 유진을 배웅하는 그들의 태도에는 말과는 달리 전혀 이해의 기색이 없었다. 그들은 명백하게 그리고 오히려 신원조회 전보다 더 유진을 의심하고 있었다.
유진은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입국하자마자 한국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전 상식으로 공항 보안 업무에 한국 국정원도 참여하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도 끌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게 그냥 개인적인 일부의 관심으로 끝날지, 아니면 시스템 자체가 움직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가벼운 일은 아니었다.
‘확실히 사회 시스템이 정말 만만치 않군.’
앞으로의 계획에 많은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차수연 같이 잘해봐야 섹스 상대나 될 여자 따위에게 관심을 둘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세 사람의 사이의 분위기도 어색했다. 다들 말없이 서로의 눈치만, 마치 일행 아닌 것 같은 모습으로 묵묵히 걸었다. 공항 건물을 나와 주차장의 차민영 차에 도착할 때까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차민영이 스마트 키로 자신의 차를 확인시키는 순간까지는 그랬다.
삐삐삑!
전형적인 부저 알림과 함께 차 한 대가 후미등과 실내등을 번쩍 거리며 자기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 소리를 따라 눈을 돌린 유진을 당황하게 했다.
차민영의 차는 GMC 시에라 3500 SRW였다.
그건 전장 길이만 해도 무려 6m, 전폭과 전고도 거의 2m에 엔진으로는 6600cc V8휘발유 엔진을 달고 있는 정말 괴물스러운 픽업 트럭이었다. 픽업트럭의 본고장 미국에서도 초대형 캐러번 트레일러나 요트 캐리어 운반 같은 특별한 목적으로나 쓰이는 특수 목적 차량이고, 한국같이 도로 최소폭이 비교적 좁은 나라에서는 대형 화물차만큼이나 도로 주행도 까다로운 차량이었다.
유진은 그런 정보는 정확하게 몰랐지만, 이 말도 안 되게 커다랗고 육중한 차량이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20대로 보이는 부드러운 동안 외모의 여성이자, 5살 난 딸아이를 키우는 애 엄마이기도 한 차민영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차량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놀라는 유진에 비해 차수연은 태연했다.
“선배 취향 여전하네. 그래도 예전에 타던 해머보다는 나은 거야 이거?”
“그건 멋있고 안전하기는 해도 안락함과 편의성은 사실 포기한 차였어. 이건 대형 세단만큼은 아니어도, 매우 안락하고 편의성도 높은 차야. 안전까지 생각하면 훨씬 낫지.”
“뭐 차는 안전한 것이 좋긴 하지.”
타고 다니는 차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과 취향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차량 뒷 칸에 짐을 실으며 두 여자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유진은 자신이 차민영에 대해서 뭔가 잘못 파악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유진은 어쩌면 차민영과의 앞으로의 생활이 자신이 지금까지 생각하던 것과 매우 다를 수 있겠다고 처음으로 걱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