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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42화 (42/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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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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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집과 아이와 여자, 그리고 여자와 또 여자 – 05

차가 달리기 시작하고, 차 안은 조용했다.

차민영은 운전에 집중했다.

그녀에게도 이 픽업트럭은 운전 시에 주의가 매우 필요한 차였다. 차폭이 워낙 넓어서 보통의 승용차 같은 감각으로 주행하면 까닥하다가 옆 차를 긁어버릴 수 있었고, 차가 워낙 무거운 탓에 브레이크 타이밍도 승용차와 달랐다.

사실 이차를 좋아하기는 해도 평상시에는 비교적 평범한 북유럽제 컴팩트형 SUV를 타기 때문에 가끔 타는 이 차를 운전할 때는 여유가 없는 편이었다.

뒷자리의 유진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앞으로의 생활과 목표 그리고 현재 상황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할 것이 많았다.

가장 뻘쭘한 것은 차수연이었다.

사실 차수연은 유진이 보조석에 타고, 자신이 뒷자리에 타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부부나 연인, 친구라고 해도 한쪽이 운전할 때 다른 한쪽이 보조석에 앉는 것이 당연한 에티켓이니까. 뒷자리에서 두 사람 사이를 관찰해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망설임 없이 뒷자리로 올라탔다. 뒷자리 외에는 타본 적이 없는 습관적 행동이었다. 그래서 차수연이 보조석에 탈 수밖에 없었다. 보조석 비워주고 유진의 옆자리에 같이 탈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차수연은 백미러로 계속 유진을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차민영이 보인 의도도 그렇고, 경고도 그렇고, 아무래도 차민영보다 유진 쪽이 더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거울에 비친 유진은 젊고 곱상한 외모와 달리 무언가 무섭고 살벌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점점 더 위축되는 마음과 어색함이 그녀를 괴롭혔다.

차수연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견뎌내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선배. 소진이는 어떻게 하고 파리에 다녀온 거야? 누가 봐줄 사람도 없잖아?”

엉뚱한 화재는 아니고 실제로 궁금한 부분이기도 했다.

강소진의 나이는 다섯 살.

차수연은 싱글이기는 해도 주변에 아이 키우는 유부녀 친구들이 여럿 있는지라 어린아이를 키울 때의 애로 사항에 대해서 들은 바가 많이 있었다.

가장 많이 들었던 문제가 바쁠 때 아이를 맡길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유치원 퇴원 시간에 맞춰 아이를 마중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에 유부녀 친구들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고, 유치원 시간 외에는 남편과 아내 둘 중 하나는 절대로 아이와 붙어 있어야 했다.

맞벌이하는 친구들은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에게 아이들을 부탁하는데, 이 경우에도 절대로 가족이라고 말로만 부탁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와이프 쪽 월급 대부분을 어머님들에게 용돈이라는 명목으로 진상해야 했다.

귀여운 손자 손녀 돌보시는 일에 돈까지 드려야 하냐고 놀라는 미혼 차수연에게 친구들은 모두 그 돈 받고 와주는 건 그래도 할머니니까 해주시는 거지, 남이라면 어림도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동의했다.

차민영이 자신들과의 연락을 완전히 끊어 버린 후에 차수연이 차민영에 대해 가장 궁금한 부분이 그 부분이기도 했다.

차민영이 강준화의 성노예로 전락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차민영에게 가족이 없다는 것이었다. 차수연과 강준화가 함께 놀러간다고 주변에 알리고 그녀를 납치 감금했을 때, 누구도 차민영을 찾는 사람이 없었다. 차민영이 결국 구원을 포기하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강준화에게는 모친이 있기는 했지만, 강준화와 차민영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분이었다. 두 사람의 신혼집이나 사업에 금전적으로는 꽤 도움을 주었지만, 돈으로는 도와줘도 오히려 인간적인 교류는 하지 않는 사이였다.

차민영의 그나마 몇 안 되는 친구들도 강준화와의 관계 이래, 차민영처럼 강준화의 성노예가 되거나 아니면 아예 멀어져 버렸다.

강준화와 차민영이 운영하던 회사의 부하직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개인적인 교류가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강준화 사후 회사가 박살 나는 과정에서 매우 더럽게 지저분한 갈등을 남기며 흩어졌다.

차민영에게는 차수연을 포함해 같이 강준화의 성노예였던 여자들 외에는 가까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차수연은 차민영이 강준화의 아이를 밴 상태로 그녀들과의 관계를 전부 끊어버리고 잠적했을 때 그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록 남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더럽고 추악한 인연으로 맺어진 사이라고 해도, 아니 그래서 그녀들끼리 더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차수연의 생각에 차민영은 정말 누구에게도 의지할 곳 없이 홀로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럽게 강소진을 키우고 있어야 했다.

그런 상황을 뻔히 알고 생각하니 어디 수련회나 학교 여행 같은 곳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닌 다섯 살 아이를 대체 누구에게 맡기고 파리까지 다녀온 것인지 궁금해진 것이다.

“동네 캠핑 모임에 따라갔어.”

“동네 캠핑 모임? 그게 뭐야?”

차민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망할 동네 캠핑 모임이 어쩌면 자신이 이번에 겪은 이 난장판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니 심란해지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설명해주기에는 타이밍이 나빴다.

“그건 이따가 집에 도착해서 이야기하자.”

차가 아스팔트로 포장된 대로에서 벗어나서 좁은 시멘트 도로로 접어들었다.

서울로 향하는 길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한참 신도시 아파트들 사이를 지나는 모습에, 차민영이 지긋지긋한 서울을 떠나서 신도시에 자리를 잡았나보다 생각하던 차수연은 조금 당황했다.

차가 비교적 낡고 지저분한 집과 건물로 이루어진 작은 시골 마을을 통과하더니, 논밭과 작고 허름한 공장들을 지나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타고 시골 언덕을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산 다 갈취당하고 낡은 시골집에 숨어 사는 건가?’

자신이 마지막으로 헤어질 무렵에만 해도 원래 가진 재산에 강준화의 사망 보험금과 적지 않게 받은 합의금까지 합쳐서 재산이 수십억이 넘는 것으로 기억하던 차수연은 생각지 못하게 외진 차민영의 거주지에 당황했다.

지금 당장 타고 있는 차가 한국에서는 정식 판매조차 되지 않아 개별 수입을 해야 하며, 차량 가격이 슈퍼카 수준은 아니지만, 유지비는 슈퍼카 수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이어 조금 전까지의 광경과는 대조되는 깨끗한 타운하우스들과 전원주택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차수연은 금방 착각을 벗어 던질 수 있었다.

“휴우. 난 또 선배가 사기라도 당해서 시골 산속에 숨어 사는 줄 알았네.”

“아! 여기 단지 진입로는 사실 따로 있는데, 그건 좀 돌아가는 길이라서 방금 길이 지름길이야.”

자신은 처음이지만, 동네 사람들이 비슷하게 경험을 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차수연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안 차민영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차민영은 부드러운 운전으로 차를 몰아 자기 집 지하 벙커 주차장에 깔끔하게 차를 주차했다.

“다 왔어. 둘 다 내려.”

차민영의 말에 차에서 내린 유진은 주차장을 둘러보며 새삼 신기함을 느꼈다.

차가 다가오자 자동으로 열린 셔터나, 자동으로 켜진 조명, 그리고 다시 자동으로 닫히는 셔터문의 기술이 신기한 것은 아니었다. 족히 대형차 4대는 주차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나,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가정집에 낯선 엘리베이터가 신기한 것도 아니었다.

신기한 것은 그 모든 것들의 조합이 여기를 가정집 주차장이 아니라 자신이 주로 살아온 연구소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과 그런데도 거부감이 없다는 점이 신기한 것이었다.

유진과는 포인트가 조금 달랐지만, 차수연도 감탄을 내뱉었다.

“우와! 이게 개인 집 주차장이라고, 선배? 무슨 회장님 저택이라도 구매한 거야? 이거 대체 집값이 얼마나 나가는 거야?”

딱 한국인다운 포인트로 감탄을 내뱉는 차수연에게 차민영은 퉁명하게 대꾸했다.

“전에 살던 서초 아파트 반값도 안 되었어. 그보다 입만 놀리지 말고 짐 좀 같이 챙겨. 네 거만 챙기지 말고.”

차수연은 당신 남자 두고 왜?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유진이 멀뚱거리며 여기저기 구경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냥 자신의 캐리어와 차민영의 캐리어 2개를 더 챙겼다.

차민영은 그러고도 남은 가방들을 들고 먼저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차수연과 유진은 멀뚱하게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 열린 엘리베이터에 먼저 짐을 실은 차민영이 차수연에게 말했다.

“짐 가지고 먼저 1층에 올라가. 전체 조명 스위치는 엘리베이터 바로 옆에 있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집주인이 손님에게 먼저 들어가서 준비하라는 꽤 황당한 소리였지만, 차수연은 이해했다.

엘리베이터는 두 사람 타면 빠듯한 아주 작은 크기였고, 차민영이 먼저 올라가면 차수연과 유진만 남았다가 같이 타게 된다. 유진과 차수연의 지금 어색한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건 차민영이 차수연을 배려한 것이었다.

“오케이.”

차수연이 먼저 올라가자 차민영이 유진에게 물었다.

“수연이 어때요, 관심 생겨요?”

아무 생각 없이 엘리베이터가 다시 내려오길 기다리던 유진은 그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관심?”

“정말로 섹스 상대로 전혀 생각이 없어요? 여기까지 와서도?”

“귀찮아.”

유진의 대답은 비행기에서와 같았다.

차민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차수연은 누가 봐도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데다가 남자들이 최고의 성적 판타지 중 하나로 꼽는 스튜어디스였다. 그것도 아직 제복까지 입고 있었다. 남자라면 혹하지 않을 수 없는 상대였다.

비행 중에야 자세히 보지 못했을 수도 있고, 굳이 그녀를 유혹하는 일이 귀찮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집에 같이 들어와서 이제 손만 뻗으면 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귀찮다는 유진의 대답은 그녀를 정말 어이없게 만들었다.

“유진, 당신 섹스를 즐기잖아요?”

“즐기는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섹스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아니 섹스는 해야지. 즐겁지는 않아도 주기적으로는 해야지.”

“그 주기는 얼마인데요?”

“어? 하루에 한 번 정도가 무난하고, 못해도 최소 이틀에 한 번 정도?”

차민영은 어이가 없었다.

“즐기지 않는다면서요?”

“즐거워서가 아니라 욕구 해소를 위해 필요해서 하는 거지.”

유진에게 섹스는 그냥 기호성 습관이었다. 섹스가 즐겁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술이나 담배처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습관에 가까웠다.

그래서 사실 보통의 남자들처럼 다양한 매력을 가진 여러 여자와의 섹스는 별로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기분에 충족한다면 그냥 한 명을 상대하는 것이 편했다.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일단 현재는 그랬다.

차민영은 유진의 반응이 황당했다. 이건 어떤 면에서는 여자를 납치해서 성노예로 조교 한 후, 다른 남자들이 자기 여자들을 짓밟는 것으로 보며 즐기던 죽은 남편보다 더 이상한 변태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유진이 그렇다고 하니, 이 기회에 확실히 말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즐기거나 즐기지 않거나 어쨌든 내가 당신을 상대해 줄 수 있는 것은 일주일에 하루 정도예요. 그것도 주기 안 맞으면 시간 더 필요할 수 있고.”

유진은 조금 당황했다.

“그건 좀.”

“어쩔 수 없어요. 내가 무슨 20대 젊은 아가씨도 아니고 매일 당신 상대해 줄 정도의 체력은 없어요. 거기에 난 직업이 있는 워킹맘이라서 섹스 말고도 할 일도 많아요. 업무 때문에 밤새울 정도로 야근도 많고, 소진이도 돌 봐야 하니 당신 상대해줄 시간에는 한계가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도 사실 힘들 수 있어요.”

차민영도 유진과의 섹스가 싫은 건 아니다.

유진과 파리에서 즐긴 섹스들은 정말 끝내줬다. 그건 극한의 막장을 추구하던 남편 생전의 시절에도 별로 경험해보지 못한 극도의 쾌락이었다.

솔직히 딸아이가 걱정되고, 주변의 시선이 무서운데도 불구하고 유진과의 동거를 결정한 것에는 유진과의 섹스에서 느꼈던 그 한계를 넘어 쾌락에 갈증을 느낀 영향도 약간 있었다.

하지만 차민영은 섹스가 즐겁다고 거기에 중독되어 일상을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그녀의 과거 경험이 너무 강렬했고, 그 와중에도 자기 마음을 지켜냈을 정도로 강인한 여자였다.

그녀에게는 딸 외에도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과 사람도 많이 있었다.

아무리 좋아도 섹스가 최우선일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올라가면 내가 기회 만들어 줄 테니 수연이 꼬셔봐요. 참고로 절대로 강간은 안 돼요. 강간으로 고소당하면 아주 지저분해질 테니까. 당신도 시끄러워지는 것은 싫죠?”

“물론.”

“그렇다고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여기까지 따라왔으니 제도 어느 정도 마음이 있기는 할 거예요. 또 쟤 술 마시면 꽤 풀어지니까 그때 적당히 분위기 잡으면 어렵지 않을 거예요. 내가 잘 도울게요. 그리고 뭐 시작만 하면 그다음에는 당신이 내게 한 정도의 반만 실력을 발휘해도 끝장이에요. 그다음에는 뭐 말만 해도 알아서 눕고, 알아서 벌리게 되겠죠. 그러니까 잘해요, 알았죠?”

유진은 대답 대신 차민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파리에서 출국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섹스 중일 때 외에는 자신과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도 못할 만큼 위축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내려다보는 유진의 시선을 마주 노려보며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유진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나 부담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알았냐니까요?”

재촉까지 했다.

이건 유진에게 조금 많이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고, 그런 그녀에게 자신이 전혀 반감이 생기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오히려 약간이지만 그녀에게 묘한 압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유진은 당혹감을 느끼면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가요.”

차민영이 유진의 팔짱을 끼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것도 유진에게는 당혹스러웠다. 파리에서는 이런 식으로 친밀감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서로 미친 듯이 섹스한 사이이기는 해도 친밀한 사이라기보다는 거래 상대에 가까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진이 가장 당혹스러운 부분은, 이렇게 친밀감을 표현하는 차민영의 태도에 오히려 유진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이상해? 이상해?’

그렇게 차민영은 당황하는 유진을 끌고, 차수연이 기다리는 1층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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