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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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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집과 아이와 여자, 그리고 여자와 또 여자 – 07
오랜만에 만난 옛 애증의 파트너에게 생긴 젊은 남자를 질투하며, 한편으로는 그 젊은 남자의 숨길 수 없는 매력에 끌리는 기분을 느끼고, 그런 스스로의 모습에 당황하며, 겉으로는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팜므파탈 매력의 차수연.
자기 여자이자 우선권을 가진 차민영에게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새로 자신의 손아귀에 굴러들어온 먹잇감인 차수연에게 매력을 느끼고, 차갑고 위압적인 분위기로 차수연을 은근슬쩍 제압해가는 나쁜 남자 유진.
그리고 둘 사이에서 때로는 긴장감을 조성하고, 때로는 긴장감을 해소하며 쥐락펴락 분위기를 좌우하다가, 은근슬쩍 차수연이 유진에게 굴복하도록 유도하는 자신.
파멸적인 분위기를 가진 세 남녀의 긴장감 넘치는 대면은 종래에는 알코올의 힘을 빌려 흐트러져 가고 결국 차수연의 교성으로 끝을 맺는다.
라는 것이 원래 차민영이 계획하던 오늘 밤의 술자리였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어머, 어머. 소진이 좀 봐. 이렇게 이쁘다니. 선배 너무 해. 사진 정도는 보내줄 수도 있는 거였잖아!”
평소 우아하게 와인이나 위스키를 즐긴다고 주장하던 차수연은 캔맥주를 벌컥벌컥 삼키며 거실 책장에서 찾아온 소진이의 앨범을 탐독하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유진은 그녀의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이거 맛있네. 이거 더 가져다…… 아니야. 내가 직접 챙겨 오지.”
노려보는 눈빛만으로 여자 속옷을 벗겨 버릴 수 있을 것 같던 유진은, 실제로 분위기만으로 차민영이 그 앞에 무릎 꿇고 그의 것을 입에 물게 했던 그 유진은, 차민영이 예의 삼아 내온 안주들을 맛보더니 식도락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처음에는 이거저거 더 달라고 하다가 눈치가 좀 생겼는지 아예 직접 냉장고와 팬트리를 뒤지고 있었다.
“어이, 당신 술은 안 마셔? 남자가 촌스럽게 안 주나 조지고 있냐?”
“맥주가 무슨 술이야. 상하지 말라고 알코올 첨가한 음료수지. 마실 것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걸 무슨 맛으로 먹어.”
“오호, 그래? 그럼 이건 어떠냐? 대한민국의 자랑 1 대 1 소맥 칵테일이다.”
“으엑. 이건 뭐하는 싸구려 술인데? 아주 역한 냄새를 인공 감미료로 숨겨봐야 이걸 모를 수가 없는 수준인데?”
“그래서 맛없어?”
“아니, 맥주랑 섞이니까 제법 괜찮네. 싸구려 술 분명해 보이는데, 이렇게 마시니까 맥주랑 잘 어울리네.”
“오. 소맥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어. 그래도 술은 와인이지. 난 샴페인이 좋아. 당신도 마실래?”
“난 레드 와인.”
“샤움바인이 있네. 이게 고급 와인은 아니지만, 일상적으로 먹기에는 괜찮다고 들었어.”
“그거보다 이거 먹어봐. 브리스데일 스파클링 쉬라즈. 호주건데, 진짜 괜찮아.”
나중에는 아예 둘이 쿵짝이 맞아 소맥을 말고, 와인 냉장고를 습격하고 있었다.
쿵짝이 맞는 것까지는 좋은데, 하는 꼴이 아무리 봐도 차민영이 바라던 성적 긴장감이 넘치는 그런 상황과 분위기로 전개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벌써 술에 취한 차수연은 긴장이 완전히 풀린 꼴이 대충 차민영의 생각대로 된 것 같은데, 유진이 문제였다.
유진은 술을 물처럼 들이키면서 햄, 치즈, 견과류 같은 안주는 물론이고, 기타 차민영이 팬트리와 냉장고에 보관 중이던 것 중에서 별도의 조리가 필요 없는 것들을 다 해치우고 있었다. 햇반을 잔뜩 돌려서, 3분 카레와 3분 짜장에 비벼 먹으며 감격까지 하는 꼬락서니에, 차수연은 깔깔거리며 손뼉을 쳤고, 차민영은 차마 보고 있기 민망할 정도였다.
차민영은 그래도 앞으로의 일을 고려해서 계획대로 두 사람의 분위기를 어떻게든 끌어내려 노력했지만, 효과는 미약했다.
차수연은 술에 취해 갈수록 유진에 관한 관심을 줄이며 점점 더 차민영에게 달라붙어서 징징거렸다.
어떻게 그렇게 칼 같이 연락을 끊을 수 있냐는 둥, 자기들 다 버리고 혼자서 정말 행복했냐는 둥, 소진이가 선배만의 딸은 아니라는 둥 자신이 뭔 소리를 하는지도 모를 것이 분명한 개소리를 지껄이며 달라붙는 차수연에게 차민영은 진절머리가 났다.
애증으로 얽힌 깊은 사이라고 해도 술주정은 받아 줄 만한 것이 아니다.
그럼 유진은 좀 나았는가?
차민영이 차갑고 묵직하며 카리스마가 넘치는, 폭력적이고 신비로우며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유진은, 식탐에 미쳐서 먹고 먹고 또 먹는 것에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처음에는 차민영이 술안주로 내온 땅콩이나 팝콘, 과자 종류를 조금씩 주워 먹던 것이 냉장고에서 생햄과 치즈를 꺼내서 직접 와인 안주를 제조하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도 냉동실에서 만두와 튀김을 꺼내서 전자레인지와 에어 프라이어까지 활용하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저거 정말 인간 새끼 맞는 걸까?’
처음 파리에서 그 폭력적이며 비정상적인 식욕과 소화력을 보았을 때는 두려움과 경의가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그냥 진절머리가 날 뿐이었다.
결국 차민영도 자포자기해 버리고 말았다.
‘될 대로 돼라.’
차민영은 나중에 유진이 강하게 요구하면 거절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오늘 일로 바가지를 긁어 주겠다고 결심했다. 바로 이틀 전만 해도 뭘 요구해도 따를 수밖에 없었던 두려움의 상대인 유진에게, 바가지를 긁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민영도 포기하고 오랜만의 술자리를 즐기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아무것도 숨길 것 없는 사람들과 마시는 술은 달디 달았고, 너무 술술 넘어갔다.
그냥 가볍게 맥주로 시작했던 그녀의 음주는 소맥을 거쳐 와인으로 갔다가 위스키를 넘어 차수연이 만들어 내는 온갖 이상한 폭탄주들로 진화했다.
그리고 평상시에 충분히 음주로 단련되어 있은 차수연이나 알코올? 그거 설탕과 비슷한 신경 자극제 아닌가? 정도의 마인드인 유진에 비해 취하도록 마셔본 것이 6년도 훨씬 전인 차민영은 자신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그녀를 마시는 순간에 금세 도달해 버렸다.
결국 어느 순간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그녀는 식탁에서 기댄 머리를 더 이상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아련하게 차수연이 잭 다니엘에 콜라를 섞으며, 원래는 약간의 위스키에 콜라를 붓는 거지만, 위스키 잔뜩에 콜라 약간 부으며, 잭콕은 술이 아니라 음료수라고 사기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친년아, 위스키 맛 콜라가 잭콕이지, 콜라 맛 위스키가 어떻게 잭콕이야.’
입을 열 힘이 없어서 속으로만 중얼거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차민영은 의식을 잃었다.
차민영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쉽게 말하는 자각몽이었다.
그리고 그건 원래 그녀에게 별로 좋지 못한 일이었다.
그녀의 자각몽은 주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사고 소식을 듣던 일이나, 죽은 남편에게 처음으로 강간당하던 그때의 일, 감금된 상태로 굶주림과 폭력 그리고 강간에 시달리다가 결국 의지를 꺾던 시절, 남편의 손에 이끌려 창녀처럼 다른 남자들에게 다리를 벌리던 경험,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임신을 알게 된 남편 강준화가 불같이 화를 내던 일이나, 중절 수술을 위해서 병원에서 기다리다가 남편의 사고 소식을 듣고 안도하던 기억들 따위를 다시 보는 일이었다.
좋은 일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지금 꾸는 꿈은 그녀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꿈이었다.
소진이가 집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귀여운 수영복 차림이었다. 누군가 호스로 하늘에 물을 뿌려 비처럼 보이게 만들어 소진이에게 뿌리고 있었고, 가리는 부분이 거의 없는 민망한 비키니를 입은 차수연이 한쪽에 놓인 비치 체어에 누워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쟁반에 술과 안주, 간식거리를 챙겨 차수연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이 부분이 순간적으로 차민영을 빡치게 만들었다.
‘다 놀고 있는데, 내가 왜 술 서비스를 하고 있어! 그것도 수연이 년 것을!’
그것이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차민영은 지끈거리는 숙취에 한껏 얼굴을 찌푸리며, 귀여운 딸 아이의 목소리의 알람부터 우선 껐다. 딸에 대한 사랑을 위해 알람 소리를 슬슬 바꿔야 되지 않을까 고민했다.
“아우, 속 쓰려. 망할 년.”
강산이 반 이상 변할 시간이 흘렀는데도, 하나도 변한 것 없이 자신의 속을 뒤집어 버린 차수연에게 불만 겸 안도의 마음을 담아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딸인 소진이와 함께 쓰는 1층 방에서 깨어났고, 속옷만 입고 있는 차림이었다.
자신이 직접 이 방에 들어와서 직접 옷을 벗은 건지, 함께 술 마시던 누군가가 자기 옷을 벗기고 여기다 눕힌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내외하는 사이도 아니고 차수연과 유진 둘 다 볼 장 다 본 사이였다.
“아우, 라면이라도 끓여야겠다.”
다행히 어제 유진이 미친 듯이 박살 내던 식료품에 라면은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 기억났다.
숙취로 요동치는 배와 두통에 고통받으며 방을 나선 차민영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난장판이 되어 있는 식탁과 그에 비해 깔끔하게 정리된 주방이었다.
난장판 술자리가 벌어졌던 식탁은 어쩔 수 없고, 말끔한 기억은 아니어도 어제 주방에서 유진이 꺼낸 접시와 사용한 기구 뜯어낸 음식 포장이 한두 개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깨끗하게 정리된 주방의 모습은 꽤 놀라웠다.
쓰는 틈틈히 정리하면서 썼다는 뜻이었고, 어지간한 프로 주부도 그러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차민영 자신과 차수연 공통으로 부엌에서 뭐 하나 하면 난장판으로 만들고 뒷정리에 온종일 걸리는 스타일이었다.
즉 유진이 정리했다는 뜻이었다.
“성격인가?”
앞으로 같이 살아야 할 사람으로서, 그리고 무지막지한 식탐에 많이 놀란 입장에서 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정리 안 해도 라면 끓여서 세 사람이 먹을 공간 정도는 있다는 점이 현재 가장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술자리 벌였던 식탁 공간과 별도로, 그녀의 커다란 주방에는 가볍게 세 사람 정도 쓸 수 있는 아일랜드 테이블이 있기 때문이었다.
유진의 식성까지 고려해서 라면 다섯 개는 넉넉하게 끌일 수 있는 커다란 냄비에 물을 가득 부어서 가스렌지 위에 올린 차민영은 아마 잠들어 있을 차수연과 유진을 깨우기 위해 2층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방음 끝내주게 잘되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는 2층 메인 침실의 육중한 원목 나무 문을 여는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리를 듣고 말았다.
“아아앙! 가요. 수연이 갑니다. 갔어요. 또 간다. 아아앙! 이 개새끼야! 그만, 그만해!”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차수연이 숨넘어갈 듯한 비명을 질러내고 있었다.
극치의 오르가슴을 맞이한 여자의 숨길 수 없는 환희가 가득 찬 그 절규에 차민영은 많이 놀랐다.
“얼레?”
두 사람이 이렇게 되는 것이 원래 자신의 계획이기는 했지만, 어젯밤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건 너무 뜻밖의 소리였다.
차민영은 궁금증을 담아 소리가 들려온 욕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렇게 쳐들어가서 보게 된 장면은 그녀가 생각하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