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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54화 (54/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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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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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작은 사회, 하지만 복잡한 사회 – 4

가장이 출근했다고, 집 안의 아침 일이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가장의 출근 준비보다 훨씬 빡센 일이 아이의 등원 준비다.

유진은 여기서도 먼저 출근한 엄마가 한숨을 내쉴 정도로 완벽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오늘 머리 스타일은 어떻게 해줄까?”

“어제 본 그 방송에서 본 별빛소녀의 그 언니처럼! 양 갈래로 갈라서 꼬불꼬불하게!”

어지간한 미용실에서도 꽤 시간이 걸리는, 어디 만화영화나 게임에서나 주로 볼 법한 롱웨이브 트윈 테일 스타일로 머리를 정리해 준다거나,

“오빠, 나 얼굴 괜찮아?”

“응. 괜찮아. 우리 소진이 워낙 이뻐서 립밤도 안 발라도 되겠지만, 그래도 바르면 더 이뻐 보이니까 바르자.”

얼굴에 영양 크림과 보습 크림, 립밤 같은 것 발라주는 피부 관리도 좀 해주고,

“옷은 뭐 입을 거야? 이거? 별로 마음에 안 든다더니?”

“하아. 내 맘대로 입었더니 다른 아줌마가 사진 찍어서 엄마에게 뭐라고 했단 말이야. 맘에 안 들어도 엄마 체면을 생각해줘야지.”

입을 옷도 같이 고르며,

“자. 준비장을 보니까 오늘 종이컵 인형 만들기 한다고 해서 종이컵이랑 색종이, 가위랑 풀 같은 것 다 준비했어. 가위 조심하고. 뭐 더 가지고 가고 싶은 것 있어?”

“단추! 나 인형에 단추 달 거야!”

“음. 그래 저번에 보니까 엄마 옷장에 예비 단추들 있더라. 작은 걸로 몇 개 가져올게.”

“이쁜 걸로!”

준비물도 같이 준비하는 등 여유롭게 등원 준비를 마쳤다.

소진과 차민영이 원래 하던 등원 준비가 거의 전쟁터로 보이는 지경이었던 것에 비해, 유진이 함께 하는 등원 준비는 무척이나 스무스하게 진행되었다.

엄마로서 차민영이 무능한 것은 아니다.

작지만 하나의 회사를 운영하는 CEO이자, 전문 업무로는 연봉으로 따지면 몇억씩 되는 고액의 돈을 받는 유능한 프로젝트 기획자이자 리더, 일정 관리 매니저이기도 한 그녀가 고작 다섯 살 아기의 유치원 등원에 필요한 준비를 관리하는 일에 능력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단지 엄마가 유능한가 아닌가와는 전혀 상관없이 엄마와 아기들이 겪게 되는 문제들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아기의 눈높이를 도저히 맞춰주지는 못하는 엄마의 인간한계로서 어쩔 수 없는 손재주라거나, 엄마가 사회적 체면을 위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아기의 취향과 아기가 자기 관점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엄마의 취향 격돌 등등의 문제는 유능과 무능과 상관없이 발생하는 문제였다.

그런 면에서 우선 유진은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교한 손재주와 티끌 하나의 흠도 놓치지 않는 완벽한 주의력, 그리고 어떤 사소한 사항도 놓치지 않는 기억력 등으로 소진이의 뜬금없는 요구들도 완벽하게 대응해 주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보면 그 초월적인 초인의 능력으로 어린아이 비위나 맞춰주는 그 모습에 어이가 없겠지만 유진은 그런 자기 능력에 매우 만족했다. 서비스받는 처지인 소진이도 마찬가지였고.

그리고 유진은 어지간하면 소진이 취향에 맞춰주었다. 덕분에 한두 번 차민영의 사회적 체면과 동네에서의 평판에 문제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그녀는 이 동네의 평판에 그렇게까지 민감한 사람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유진이 소진이에게 약한 것처럼, 소진이도 유진에게 약해서 소진이도 엄마와는 달리 되도록 유진의 의견을 들어주는 편이었다. 엄마를 사랑해도 엄마랑 취향과 의견 차이가 발생하면 고집을 피우면서 싸우는 것과 달리 오빠에게는 약한 소진이었다.

준비를 마친 유진은 자신의 짐도 챙겨 들고 소진이와 함께 집을 나섰다.

보통은 유치원 버스가 집 앞까지 와서 아이들을 태워 가는 것에 비해 이 전원 단지에서는 아이들이 단지 안의 정해진 자리에 모여서 함께 버스에 탔다. 단지 내의 도로가 차도와 인도의 구별이 안 되어 있고, 커브와 경사도 심하며, 아직 공사 중인 곳도 있으므로 차가 단지 내를 돌아다니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하게 여겨진 탓이었다.

하지만 그 탓에 피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등 하원 때마다 같이 유치원 등원시키는 아이가 있는 동네 아줌마들과 마주쳐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머, 소진이 오빠. 오늘은 오빠가 소진이 등원시키나 보네요. 소진이 엄마는 바쁜가 봐요?”

등원 버스를 타는 곳에 도착하자, 두 사람이 꽤 일찍 왔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와서 기다리던 여자가 유진에게 말을 건넸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말임에도 비꼬는 기색이 역력한 그녀에게 유진은 그 태도에 걸맞은 대꾸를 해주었다.

“아침부터 일찍 미팅이 잡혀서요. 돈만 몇억씩 주면 다냐고 투덜거리면서 가더라구요.”

내 사람에게는 눈치 더럽게 없지만, 외부의 적의에는 민감한 유진은 똑같이 그냥 듣기에는 일상적이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속이 뒤집히기 딱 좋은 어투였다. 어느덧 이런 대화에도 익숙해진 유진이었다.

듣고 있던 여성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지만, 추가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조금 사이가 나쁘기는 해도 애들 앞에서 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구별할 줄 아는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군요.”

“네. 그렇습니다.”

무난하게 서로의 말을 그렇게 마무리하고 둘은 다른 사람들과 버스를 기다리며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와중에 여성의 아들인 꼬마는 소진이와 유진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고, 소진이도 그런 친구와 친구 엄마에게 반갑게 인사했으며, 유진에게 틱틱거리던 여성도 소진이에게는 웃으면서 인사를 받아줬다는 것이 참 웃기는 일이었다.

작은 동네라고 모두가 친할 리는 없다.

이제 고작 28가구가 거주하는, 그리고 한참 새로운 집이 건축되고 있는 이 단지에는 유치원 다니는 아이가 있는 학부모가 고작 6가구밖에 안 되는데 그들은 두 개의 파벌로 나누어져 있었다.

특이하게도 이 파벌은 압도적 고가인 개인 주택 거주자와 비교적 저가인 그러나 만만치 않은 가격인 타운하우스 거주자 사이에서 나눠진 것도, 여성도 일을 나가는 맞벌이 부부와 그렇지 않은 외벌이 부부 사이에서 나눠진 것도, 딸 가진 집과 아들 가진 집 사이에서 나눠진 것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들의 파벌은 웃기게도 차민영과 비교적 우호적인가와 아닌가로 나뉘어 있었다.

혼자 살며 아이를 키우는 미모의 젊고 부자인 여자를 꺼림칙하게 여기며 견제하는 파벌과 남편과 사별하고 서울을 벗어나서 혼자 힘으로 딸을 키우며 사는 젊은 과부를 안타깝게 여기는 파벌로 나뉜 것이다.

사실 차민영 본인은 두 부류 모두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할 수 없고, 필요 없는 동정을 보내는 사람도 별로였다.

한편으로는 두 부류 다 별로 싫어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동정해주는 사람 굳이 싫어할 필요 없고, 자신을 견제하는 사람들은 그럴 만하다고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차민영은 둘 다 와 데면데면하고 거리감 있는 사이였다.

여기서 가장 웃기는 점은 동정하는 쪽도 견제하는 쪽도 모두 차민영과 별도로 소진이에게는 각별하게 신경 쓴다는 점이었다.

소진이가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제일 앞장서서 혹시 자신의 아이들이 소진이를 따돌리지 않는지 확인하고 아이들이 서로 어울릴 수 있도록 노력한 사람이 지금 바로 유진을 비꼬고 있는 이 여성이었다.

엄마가 기분이 나빠 보이는데도 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소진이나 유진에게 친한 척하는 것도, 아줌마가 오빠에게 틱틱 거리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진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밝은 표정으로 인사하는 것도 그 유였다.

그런 사정을 미리 들어 뒀기 때문에, 유진도 적대적으로 나오는 이 여성에게 적당히 같이 비꼬는 정도로만 응수할 뿐, 그 이상은 나가지 않았다.

유진의 사고방식이나 기본적인 성향을 고려할 때, 그렇지 않았다면 이 아주머니는 조금 많이 위험했었다.

다행히 두 가족만의 어색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금세 다른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기 시작했고, 버스가 도착해서 아이들을 태워갔다.

“오빠, 이따가 봐!”

소진이가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유진도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아줌마들과 아이들이 불손한 시선을 외면하며, 손을 흔들었다.

“집에 올 때 전화해. 문자로 말고, 전화!”

소진이는 고작 다섯 살에 자신만의 최고급 최신형 스마트폰을 쓰는 얼리어답터였는데, 어린아이 임에도 최고 비싼 요금제를 쓰는 주제에 통화보다 문자를 선호했다.

그것이 요즘 아이답기는 했는데, 핸드폰에 익숙지 않은 유진은 문자를 싫어했다.

그렇게 소진이를 보낸 유진은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아줌마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목례하고 몸을 돌렸다.

아줌마라고 불리면 몹시 서운할 그 아줌마 중 하나가 그런 유진을 붙잡았다.

“어머, 소진이 오빠, 오늘은 그냥 가는 거예요?”

사실 유진은 요 몇일 차민영 대신 소진이를 유치원 등교시킬 때, 이 아줌마들과 수다를 떨고는 했다.

자신에게 매우 불손한 눈길을 보내고, 차민영과 자신에 대한 뒷담을 수군거리는 주제에, 이 아줌마들은 또 유진과의 대화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진도 이 아줌마들과의 대화를 싫어하지 않았다.

대화 중에 살짝 비꼬는 투를 쓰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닌데 선을 넘는 정도는 아니었고, 대신 일상 생활력이 부족한 유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었던 탓이었다.

장 볼 때의 요령, 요리법, 청소 시 주의 사항, 근처의 맛집, 아이들 요즘 취향과 유치원 분위기, 차후의 소진이 초등학교 등교 문제까지 짧은 시간에 정말 많은 정보를 취득할 수 있었다.

아줌마들 수다의 힘도 있었고, 유진이 가진 가장 초능력의 힘도 있었다.

유진은 따로 배우거나 듣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벼운 지식을 자연스럽게 흡수하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제가 알바를 시작해서 지금 얼른 가봐야 해서요.”

“알바?”

“네, 알바.”

그랬다. 유진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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