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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55화 (55/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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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작은 사회, 하지만 복잡한 사회 – 5

일의 시작은 옆집 사는 고영은이었다.

그녀가 옆집 남자와 결혼해 옆집으로 거처를 옮긴 지 3년, 그 이전까지 그녀는 차민영과 소진이와 함께 이 집에서 살았다. 지금 유진의 방이 원래 그녀의 방이었다.

거기에 서로가 상대방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거의 없는, 서로 입만 뻥긋해도 상대와 같이 지옥에 떨어질 수 있을 사이인 탓에 오히려 서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였다.

남들에게 할 수 없는 고민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서, 차민영이 유진과 함께 한국에 돌아온 후 소진이가 유진에 대해서 보인 반응이라거나 유진의 터무니없는 나이에 대한 주변 시선에 대한 고민 등을 상담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날은 유진이 너튜브를 통해 갈고 닦은 요리 실력에 감탄한 소진이가, 그걸 친한 이모인 고영은에게 자랑하는 바람에, 전문가인 고영은이 유진의 요리를 품평을 해주러 방문한 날이었다.

결혼해서 집을 옮긴 이후에도 식구들이 모두 외출해서 혼자 있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 집으로 건너오거나, 자기 집으로 불러서 차민영과 소진이와 함께 식사하곤 했기 때문에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잡채와 김밥 그리고 놀랍게도 구절편까지 선보인 유진의 요리를 맛보고 꺼낸 첫마디가 이거였다.

“유진씨, 알바 해볼래요?”

“알바가 뭔가요?”

“아르바이트의 준말인데, 어? 이걸 막상 설명하려고 하니까 애매하네?”

워낙에 자연스럽게 쓰던 말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의미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해 당황하는 고영은을 대신해 함께 요리를 맛보던 차민영이 대답했다.

“단기로 행하는 비정규직 노동이야. 원래는 전문직이 본업 외의 일에 자기 능력을 발휘해서 추가 수입을 얻는 부업을 말하는 거였는데, 요즘은 그냥 비전문가가 비전문적인 일에 최저 수준 급여로 일하는 것을 말해.”

“그거 말만 들어도 정말 매력 없어 보이는 일이네요.”

“동감이야.”

유진은 자신이 만든, 그런데도 정말 맛있는 요리들을 듬뿜 집어먹으며 성의 없이 대답했고, 차민영도 그런 유진의 의견에 동의했다.

아니 사실 설명을 통해 그런 반응을 유도했다.

딸 하나 양육하는 것도 벅찬데 생활 감각이 전혀 없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까지 하나 추가될 생활을 걱정하던 것과 달리, 만능 가사 일꾼에 끝내주는 아이 돌보미이기도 한 유진의 존재 덕분에 생활에 귀족적 여유까지 느끼게 된 차민영은 솔직히 유진을 밖으로 내돌리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유진은 명백하게 폭탄이었다. 지금이야 집안에만 있으니까 표가 안 나지,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무서웠다.

하지만 그런 차민영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영은은 적극적이었다.

“아냐. 아냐. 급여는 충분히 줄게. 하루 4시간 근무에 일당 10만원 보장. 혹시 추가 근무 필요하면 1시간 근무에 시간당 2만원. 이 정도면 시간도 급여도 괜찮지 않아?”

생각 외의 고액 알바에 차민영이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인데요?”

“식당 문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이대로 가면 시누이가 끼어들지도 몰라.”

대답하는 고영은의 표정이 조금 어두웠다.

고영은은 단지 내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고작 서른 가구 남짓 사는 전원주택 단지에 무슨 식당이냐 싶겠지만, 사실 카페와 식당을 겸하고 마을 회관 역할도 하는 이 식당은 꽤 장사가 잘되는 정도를 넘어서 대박이 나고 있었다.

한참 바로 인근에서 4배 규모로 전원주택단지 확장 공사 중인 그녀 남편 회사의 직원들과 인부들이 매일 이용하고 있기도 하고, 단지 내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문화시설인데다가, 학생들 공부방 겸 모임 장소, 주변 마을 사람들 외식장소로도 인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근 시작할 때부터 있던 원년 멤버들이 각자의 사정으로 다 떠나고, 그 자리를 메운 이웃 동네 아주머니들이 음식 솜씨는 있어도 체력이 부족한 탓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소문을 들은 남편 가족들이 은근히 가게 운영권을 탐내는 분위기까지 있어서 고영은은 요즘 고민이 많았다.

아직은 어려운 시절 자신을 외면했던 가족들에게 노여움이 풀리지 않은 남편이 칼같이 자르고 있지만, 계속 가게 운영이 엉망이 되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일이었다.

남편이 자신이 이 식당을 운영하는 것을, 본인에게 쓰는 신경이 줄어든다는 어린아이 같은 이유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탓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고영은에게는 식당에서 힘이 필요한 일을 도와줄, 그러면서 요리 실력도 있고, 무엇보다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요리 실력을 확인한 결과 유진이 정말 딱이었다.

고영은에게 그 식당이 단지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며, 새로운 가족에 대한 그녀 마음의 상징이라는 것을 아는 차민영은 조금 망설여지기는 했다.

그래도 찬성은 안 했다.

“하지만 진은 지금 관광객 무비자 입국으로 들어와 있는데요? 알바 불법이에요. 그러다가 문제가 되어서 국외 추방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해요?”

차민영의 말에 유진은 질색했다.

그러면 새 여권으로 다시 입국하면 되겠지만, 입국 심사에서 다시 지랄하게 될 것이 뻔하니 그런 위험은 사절이었다.

하지만 고영은이라고 생각 없이 말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도 전에 유진씨 체류 기간 문제로 걱정했었잖아. 그것 때문에 내가 생각해낸 건데 D-4-5 비자가 있어.”

“D-4라면 일반 연수 비자네요. 5는 뭔가요?”

“한식조리연수행 비자. 취업도 가능한 거야.”

차민영이 그녀의 말에 스마트폰으로 해당 비자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그녀 말대로 꽤 조건이 좋은 비자인데, 발급 자격 요건에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이건 본국에서 요리 관련으로 학력이나 경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발급되는 건데요? 유진은 그런 거 없어요.”

함께 지내며 유진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어느 정도는 차민영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대화 중에 어쩌다가 그런 부분이 화제가 될 때마다 아예 화제를 끊기는 좀 애매해서 대충 추상적이거나 비유적으로 이야기해 준 것이다.

유진이 차민영에게 설명해준 과거는 실제와는 거리가 좀 있었고, 디테일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차민영은 유진이 평생 제대로 된 공교육을 접해 보지 못했고, 정상적인 사회생활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인식했다.

당연히 학위 같은 것도 없었고, 요리사 경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고영은은 당당했다.

“전에 자기가 유진씨 체류 문제 때문에 고민한 것 때문에, 내가 좀 알아봤는데, 브로커 말이 대상자가 미국인이라면 그 정도쯤은 간단한 위조 서류로 문제없이 처리 가능하다고 하더라고. 어디 중국이나 동남아 사람이라면 몰라도 미국인이 한국에 교육 및 취업비자 신청하는데 그렇게 깐깐하게 심사 안 하고, 미국 서류는 오히려 위조하기도 쉽다고.”

차민영은 고영은이 이 일을 그냥 즉흥적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브로커 통해서 연수추천서도 확보했고, 주말에 가끔 몰아서 교육받는 정도로 사증 발급신청서 신청해줄 학원도 이미 알아봐 놨어. 이거면 체류 기간도 문제없고, 알바도 전혀 문제없이. 1석 2조 아니야?”

이 정도면 거의 일 다 끝내고 확인만 요청하는, 아니 하라고 강요하는 수준의 일 처리였다.

하지만 기분 나쁜 정도는 아니었고, 그녀가 보기에는 여러모로 괜찮은 것 같았다.

그래도 마지막 판단은 유진에게 넘겼다.

“진, 자기 생각은?”

유진은 자신의 몫으로 퍼온 잡채의 마지막 한 올을 씹어 삼키면서 대답했다.

“잘 됐네. 그렇지 않아도 찜이나 탕 같은 것은 너튜브 만으로는 좀 애매했는데 직접 가서 배울 수 있으면 좋지.”

유진은 사실 체류 기간 같은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

자기를 여기에 보낸 것이 자그마치 미국이고 그중에서도 앤 헤이즈이니 그런 걱정 따위는 안했다. 적당히 때가 되면 그쪽에서 뭐라도 할 거로 생각했다. 여차하면 미국 대사관 직원 신분이라도 만들지 않을까가 예상 1순위였다.

유진에게는 체류 기간 관련 비자보다는 오히려 한식 요리 교육 자체가 더 흥미를 끌었다.

유진이 동의하자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고영은이 고용한 브로커가 꽤 거물이었던 덕에 유진의 교육 비자 발급은 물론이고, 외국인 등록과 시간제 취업 허가서는 물론이고 원래 그가 할 만한 일도 아닌 보건증 발급까지 3일 만에 한 큐에 끝내 버렸다.

차민영은 고영은이 얼마나 썼길래 그런 것이 가능한지 혀를 내둘렀고, 유진은 들어간 비용 말해주면 자신이 갚겠다고 했으나 고영은은 사양했다.

사실 그녀가 브로커에게 지불한 것은 돈이 아니라 인연이었다.

이혼 당시만 해도 아무것도 못 하고 맨몸으로 쫓겨났던 그녀는 그 후 차민영의 전남편 강준화의 지배를 받으며 반쯤 창녀처럼 몸을 굴리는 과정에서 우습게도 필요하면 가볍게 전 남편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힘과 인맥을 얻었다.

반쯤 창녀처럼 몸을 굴렸다고 해서 진짜 창녀 노릇을 한 것이 아니었다.

행정부의 이름 있는 고위 관료의 이혼한 사모님이라는 신분과 본인도 몸 함부로 굴리는 여자가 아니라 원래 좋은 집안의 학벌 높은 고위층 출신이라는 점을 어필해서 그야말로 대한민국에서 한가락 하는 남자들에게만 은밀히 접대에 이용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게 창녀 아니라고 하면 할 말 없기는 하지만, 최소한 그녀는 그 남자 중 그 누구에게도 화대 따위를 받거나 핸드백 하나, 향수 하나 선물 받은 적이 없었다. 선물하려고 했던 남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자기도 함께 즐긴 건데 이런 걸 왜 받아야 하냐며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녀에게 안 좋은 소문도 많이 붙었음에도 그녀와 잠자리했던 남자 중 그 누구도 그녀를 얕잡아 보지 않고, 함부로 집적거리지도 않았으며, 더 이상 섹스 상대가 되어 주지 않음에도 기꺼이 그녀와 사교를 유지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렇게 구축한 인맥과 그 인맥의 힘으로 그녀는 전남편에게 가끔 소소하게 복수한다.

이번처럼 행정 관련으로 일손이 필요할 때 연락하면, 행정부 고위 관료인 그녀의 전남편은 맨몸으로 쫓아낸 전처가 보낸 연락을 받아 기꺼이 발로 뛰며 동기와 친구, 부하와 동창들을 총동원해서 해당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 것이다.

진짜 제대로 된 복수를 당해서 좆 되는 경우를 피하고자.

그리고 그렇게 고영은이 힘쓰고 고생해서 만들어낸 적법해 보이는 절차에 따라, 오늘이 드디어 유진이 알바를 시작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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