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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56화 (56/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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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작은 사회, 하지만 복잡한 사회 – 6

고영은의 식당은 따로 이름이 없다.

허가 단계에서는 회사이름과 주택 단지 이름을 따서 ‘성하식당’으로 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사람들은 그냥 다 마을식당이라고 불렀다.

유진이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식당으로 다가서자 마침 식품 재료를 배달하는 냉장 트럭이 도착해 있었다.

평상시보다 너무 빠르게 도착한 식재료에 조금 당황하고 있던 고영은은 막 도착한 유진을 보고 반색했다.

“미안해요, 유진씨. 소개랑 인사도 하기 전에 일부터 시켜서 미안하긴 한데 이것 좀 도와줘요.”

유진은 쌀과 감자, 양파, 당근 등이 묵직하게 들어 있는 포대들을 보면서 확실히 자기 도움이 필요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은 난처한 표정을 하고 있던 배달 기사 겸 도매상 사장과 자신을 빼면 전부 여자였고, 그 중에 40대인 고영은이 가장 어린 여자였다. 식당 종업원으로 보이는 다른 두 사람은 유진의 기준으로는 거의 할머니로 보였다. 무엇보다 유진 빼고 유일한 남자인 배달 사장조차 마르고 왜소한 편인 할아버지였다.

유진은 불만 없이 일에 끼어들었다.

일반적이라면 원래의 알바 시간 전에 일을 부탁하는 것은 정말 무례하고 부당한 일이겠지만, 어차피 유진의 알바는 시간당 계산이기도 했고, 고영은이 자신에게 해준 도움을 생각하면 이런 상황에서 도움을 거절하면 그건 진짜 나쁜 놈이었다.

“어디로 옮길까요?”

유진은 쌀 포대 3개를 겹쳐서 왼쪽 어깨에 올리고, 오른손으로는 양파 한 포대를 집어 들고는 물었다.

쌀 한 포대라고 해봐야 고작 20kg, 유진은 그 배라도 거뜬하게 나를 수 있었지만, 일단 사람들 눈을 생각해서 적당히 들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보는 사람들 기겁하게 하기 충분했다.

“학생, 아니 총각, 아니 뭐라고 부르지. 어쨌든 그거 그렇게 들 필요 없어. 여기에 얹어서 나르면 되는데.”

보고 있던 종업원 중의 하나인 화순댁이 말했다.

흰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했지만, 그래도 많이 나이 들어 보이는 그녀에게 유진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한국에서 와서 생활하면서 차민영이 가장 강조한 것으로 가장 먼저 익혀야 했던 연장자에 대한 존칭 사용 및 연로자에 대한 한국식 예의에 대한 교육의 성과였다.

“괜찮습니다. 저한테는 별로 무겁지도 않고, 이게 더 빠를 것 같아요.”

힐끔 본 식당 입구에는 계단이 몇 개 있었고, 그 계단을 우회하는 경사로는 꽤 길게 돌아가야 하며 좁기까지 했다.

화순댁이 가리킨 구르마라는 물건에 실어 나르는 것보다 유진이 직접 나르는 것이 훨씬 빠르고 효율적일 것이 분명했다.

그 태연하고 대범한 모습에 화순댁의 친구이자 또 다른 종업원인 순천댁이 감탄을 토했다.

“워메, 덩치도 좋지만, 힘이 장사구먼, 그려.”

고영은이 상황을 정리했다.

“성 언니. 유진씨에게 창고랑 냉장고 좀 안내해줘요. 몸도 안 좋은 언니가 직접 뭐 나르시지 말고 그냥 안내만 해주세요. 차 언니는 식당 정리 좀 먼저 시작해주세요.”

유진에게 힘든 일 몽땅 떠맡기겠다는 이야기에 두 아주머니가 오히려 유진의 눈치를 봤지만, 유진은 태연했다.

그녀들에게는 이 일이 힘들일 이겠지만, 유진에게는 그냥 가벼운 운동 정도에 불과했다.

“자, 얼른 움직이죠.”

유진의 재촉에 아주머니들이 눈치를 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휴, 다행이네요.”

고영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갑작스럽게 생긴 곤란함에 일부로 이렇게 일을 진행하게 한 것이었는데 유일하게 기분 나쁠 수 있는 유진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서 다행이었다.

그녀라고 딱히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유진이 남자라서 힘든 일 떠맡긴 것은 아니었고, 유진에게 아주머니들보다 2배 이상 높은 급여를 주기로 한 데다가 여러 가지 다른 혜택도 있는 상황인지라 아주머니들이 나중에 알고 서운해하지 못하도록 일부로 선수를 친 것이었다.

고영은에게 이 두 아주머니 종업원은 단순히 아랫사람이라고 여기기에는 꽤 껄끄러운 관계였다.

이 두 아주머니는 남편이 구해줬던 원래 세 명 있던 직원 중 두 명이 훨씬 좋은 기회를 얻어서 떠난 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근처 마을에서 뽑은 사람들인데, 약간 문제가 있었다.

지금 한참 공사 중인 새로운 전원주택단지 근처에 있는 이 마을은 단지의 주 통행로이자, 이웃임에도 서로 살아가는 환경이 많이 다른 탓에 관계가 소원했고, 공사 민원 문제로 갈등도 조금 있었다.

고영은의 남편인 성지호 사장은 이걸 무마하기 위해서 마을에서 괜찮은 조건으로 일꾼도 구했고, 물건들도 사주었으며, 고영은이 이 아주머니들을 마을에서 구한 것도 그런 이유가 컸다. 하지만 그런 탓에 고영은도 이 아주머니들을 그냥 함부로 아랫사람으로 취급할 수가 없게 되었다. 정치적인 고려가 필요한 관계인 것이다.

마지막 남았던 직원이 함부로 이 아주머니들에게 텃세를 부리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이 아주머니들보다 그녀가 훨씬 더 일 잘하는 베테랑이었음에도 그녀를 내보냈어야 했을 정도였다.

다행히 시골 인심 사납다는 말과 달리 김포가 어디 깡시골은 아닌 덕인지, 둘 다 인성에 문제는 없었다.

게으름 피우는 일도 거의 없고, 나이 어린 고영은의 지시에도 고분고분했다.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힘쓰는 일에 한계가 많았고, 이런 일을 전문으로 해본 경험도 없어서 일머리도 예전 사람들에 비해 많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새로 사람 뽑아서 추가하기도 뭐한 것이 외부 사람은 이미 한번 충돌한 전적이 있고, 마을에는 더 이상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마을에서 비슷한 사람 하나 더 뽑아도 인건비에 비해 효율이 안 나오는 다는 점도 컸다.

그런 면에서 고영은이 만난 지 고작 며칠 만에 유진에게 이 일을 권하고, 그걸 위해 별로 상종하고 싶지 않은 인맥까지 동원한 것은 그녀 나름대로 많은 생각 끝에 이득과 위험성을 계산해서 나름 냉정하게 생각한 결정이었다.

‘일단 시작은 성공적이네.’

고영은은 일단 유진이 생각보다 쉽게 적응하는 것 같아서 그쪽에 관한 관심을 줄이고 본격적으로 자기 일을 시작했다.

두 아주머니가 이런 일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녀가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가장 먼저 처리한 것은 약속된 시간보다 한참 일찍 와서 사람 재촉까지 한 주제에 도와줄 생각은 전혀 안 하며 짜증만 내던, 그래 놓고 뒤늦게 연신 사과하는 식재료 배달 사장님을 처리한 것이었다.

그녀는 사과하는 사장님을 웃으면서 배웅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탓에 사과에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했고, 조만간 거래처 바꿀 생각이었다.

이 계통 사람끼리 서로서로 담합이 심해서, 마음에 안 든다고 한 사람 쳐내도 다른 사람 구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유진을 보니 사람 못 구하면 그냥 대신 차 한 대 구해서 직접 시장에서 물건 구해와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업 준비의 시작은 결제를 위한 포스 기계와 현금 결제를 위한 잔돈 확인이었다.

고영은은 결제 관련으로는 될 수 있으면 아주머니들에게 일을 맡기지 않았고, 만약을 위해 카메라도 달아 뒀다. 그녀들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돈 문제는 애초에 칼같이 관리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에야 본격적으로 음식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과정이 시작되자 고영은은 유진에 관한 자신의 판단이 굉장히 기분 좋은 과소평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진이 발휘하는 역량이 그녀가 예상하고 상상하고 기대했던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요리 준비를 위해 재료들을 챙기는 과정에서 유진은 무거운 것들을 가볍게 후딱후딱 들어 나르며, 지금은 물론이고 예전 베테랑이 있던 시절보다도 훨씬 빨리 준비했다. 한 번만 설명해주면 뭐가 어디에 있는지 두 번 설명할 일이 없었던 것은 감탄이 나왔다.

양파와 당근 같은 밑 재료들의 껍질을 까고 씻는 과정이나, 그 재료들을 요리를 위해 채를 써는 과정 들에서도 유진은 다른 세 사람 합친 것보다 더 빨랐다.

달걀을 풀어 흰자와 노른자를 섞는 과정도, 커다란 솥에 물을 가득 채워 면을 삼는 과정에서도, 하다못해 커다란 대야에 재료를 잔뜩 부어서 나물을 섞는 과정에서도 유진의 힘과 요령은 세 명의 여자가 뭘 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놀라운 속도를 발휘했다.

원래라면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칼질하고 재료와 물을 나르며 고생했어야 할 고영은과 두 아주머니는 혼자 하는 것이 더 편하고 빠르다는 유진에게 밀려나 요리의 재료 분량과 간을 맞추고, 전을 굽는 정도밖에 할 일이 없었다.

오늘 메인 요리인 돼지불고기조차 유진이 돌덩어리 같이 얼어 있던 고기를 그대로 칼질해서 자르는 묘기를 부린 다음, 그녀들이 맞춰주는 재료 분량에 맞춰 커다란 대야에 한꺼번에 섞어서 양념을 버무리더니, 나중에 양념이 밴 후에는 그동안 아무도 쓰지 못해 장식이나 다름없던 초대형 중화 팬에 전문 중화 요리사 뺨치는 불 쇼를 벌여가면서 직접 볶기까지 했다.

그 압도적인 힘과 실력, 그리고 속도에 세 사람 모두 막바지에는 넋을 잃고 구경할 정도였고, 그렇게 영업 준비는 평소 3시간으로도 모자라서 점심시간 시작하고도 완전히 준비가 끝나지 않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고작 2시간 만에 끝나 버렸다.

그 후 테이블 정리와 식당 청소까지 유진이 나서는 바람에, 나머지 세 사람은 오늘 영업이 아니라 내일 영업을 위한 콩나물 다듬기를 미리 하는 시간을 갖게 될 정도였다.

황당하기까지 한 유진의 일솜씨에 말을 잃고 콩나물을 다듬던 순천댁이 그동안 신경도 못 쓰던 입구 계단까지 청소하는 유진을 훔쳐보며 입을 열었다.

“사장님. 총각은 얼마 받고 일하는 거예요?”

고영은은 피하고 싶었던 질문에 잠깐 움찔했지만, 이런 것을 속이면 나중에 큰일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배웠기 때문에 솔직하게 말했다.

“자세히 말해 드리기는 좀 그렇고, 시급으로 따지면 두 분 두 배가 좀 넘어요.”

직원 급여는 사실 비밀이 원칙이지만, 이런 작은 가게에서 서로 알음알음 알 수밖에 없기에 솔직하게 말했다.

두 사람이 급여 차이 때문에 마음 상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기우였다.

두 사람의 반응은 오히려 그녀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우와. 고작 그거요? 솔직히 사장님 그 정도면 너무 헐값에 부려 먹는 것 아니에요?”

고영은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라면, 이 두 사람이 지금 그녀의 밑에서 부업 삼아 알바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본인들도 오랜 경력의 농사꾼으로 농번기에는 직접 사람 구해서 쓰는 사장님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하루 8시간에 일당 10만 원 이상씩 주고 구하는 일꾼 중에서도 유진처럼 성실하고 일 잘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원래 그녀들이 아는 일꾼이란 40분 일하면 20분은 담배를 피우고 수다 떠는 일에 쓰는 사람들이고, 그 정도는 아니어도 원래 50분 일 시키면 10분 휴식 보장은 기본이었다. 심하면 담배 피는 틈틈이 일한다는 소리도 듣는 것이 용역 일꾼이었다.

그에 비해 유진은 지금 벌써 거의 3시간째 쉬지 않고 일하고 있었다. 그녀들이 오히려 일은 중간에 약간씩 쉬어 가면서 해야 한다고 충고할 정도였다. 유진은 힘들면 쉬겠다고 웃으면서 넘겨 버렸다.

그녀들은 유진 같은 일꾼이라면 자신들은 8시간 일하는 하루 일당으로 20만 원이 아니라 그 이상도 아깝지 않게 줄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그녀들 시급 2배 정도는 사실 좀 적어 보였다.

고영은이 오히려 변명해야 했다.

“시급만 주는 것이 아니라 따로 요리 학원에 교육도 보내주고 있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해주고 있어요. 유진 씨도 돈이 아쉬운 처지가 아니라서 돈 보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와준 거예요.”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

“그나저나, 사장님. 매번 유진 씨라고 부르는데, 총각 성이 유씨인 거예요?

“아니요. 유진이 이름이고 성은 헤이즈에요. 한국인으로 보이고 한국말도 잘하지만 미국인이에요. 여기서 일하는 것도 취업비자 받아서 일하는 거예요. 참 미스터 헤이즈라고 불리는 것은 싫어해요. 양어머니 성인데, 사이가 나쁜 모양이더라고요.”

“워메. 말만 들어도 사연 평범하지 않겠다는 것 알겠구먼. 사람들이 입 함부로 놀리지 못하게 말해 둬야겄네.”

흥분하면 고향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순천댁의 말에 화순댁도 고개를 끄덕였다.

고영은은 이야기가 생각보다 더 좋게 정리되어서 기분이 좋았다.

이 정도면 유진도 아주머니들도 최소한 대우 가지고는 아무 문제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영업시간이 되자 다시 흔들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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