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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작은 사회, 하지만 복잡한 사회 – 9
#005 작은 사회, 하지만 복잡한 사회 – 9
유진이 소진이에게 전화를 받고 친구들 데려와도 된다고 허락한 것은 오후 2시 무렵이었다.
유치원에서는 점심 시간 직후의 놀이 시간이 끝나고 낮잠 시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유진은 아이들이 얼마나 올지 모르지만, 일단 장소를 옮길 생각부터 했다.
따로 말은 없었지만, 함께 생활하며 유진은 차민영이 집안에 손님 들이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느꼈다. 차수연이나 고영은 같은 사람들이 예외일 뿐, 유진이 마당 잔디를 능숙하게 깎자 이제 잔디 깎아주는 관리인 집안에 안 들여도 된다고 좋아할 정도였다.
원래부터 영역 본능이 강하고 감각도 예민해서 자신의 거처에 여러 사람채취와 흔적이 남는 것을 싫어하는 유진도 그런 차민영의 방침에 찬성이었다.
그리고 이제 어려울 것 같지만, 차민영 눈에 덜 띄기 위해서라도 집은 곤란했다.
오늘 마침 식당에서 한 번도 쓰인 적이 없어 보이는 오븐을 본 기억이 났다.
집에도 가정용 오븐이 있지만, 가게의 상업용 대형 오븐이 피자나 케이크 굽기에 더 좋은 것은 분명했다.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다시 찾아간 식당에서 고영은에게 비교적 쉽게 허락받았다.
고영은은 오히려 강한 흥미를 내보였다.
“그러니까 피자나 스파게티는 물론이고 짜장면을 위한 수타면도 뽑을 수 있다는 거죠?”
“아마도?”
유진은 실전은 처음이지만, 완벽하게 자신 있었다.
고영은 말고 두 아주머니도 흥미를 보였다.
마을에 중국집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평판은 별로 좋지 않다. 그냥 거기 외에 다른 집이 없어서 이용할 뿐이었다.
특히 수타면은 서울에서도 별로 쓰는 집이 없는 방식이었다. 어지간한 수타보다 기계로 뽑는 면이 더 맛있다는 평이지만, 그래도 수타에는 로망이 있었다.
“어, 그럼 우리도 맛 좀 볼 수 있을까?”
순천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겨우 첫 만남이었고, 조심스럽게 대하자고 결심했던 상대여서 쉽게 말하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조심한 어조였다. 추가 이유도 붙였다.
“유진 총각이 만든 짜장면이나 짬뽕이 괜찮으면 우리 메뉴로도 올릴 수 있을 거야. 백반보다 오히려 손도 덜 가고 가끔 특식으로 내놓으면 사람들도 더 좋아할 거야.”
맛있는 짜장이나 짬뽕 둘 중 하나라도 좋아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굉장히 특이한 사람들인 법이다. 매일 매일 내일 반찬 뭘로 할 건지 고민하는 처지에서 쓸 수 있는 메뉴가 늘어나는 것은 매우 큰 장점이었다.
유진은 별생각 없었다.
“세 분 점심 드시는 분량 보니까 그 정도야 오늘 준비해야 할 분량 생각하면 티도 안 날 것 같은데 상관없죠. 오히려 미리 맛 좀 봐주시고 평가도 해주시면 저야 좋죠. 아이들이 주로 먹을 거니까 충고도 좀 해주시고요.”
“물론이지. 자질구레한 일은 우리도 도울게.”
고은영도 끼어들었다.
“어, 식당 창고에 필요한 것도 필요하면 얼마든지 갔다 써요. 요리 주방장님 실력 발휘하시는데 그 정도야 내가 해줘야지.”
근무 하루 만에 파트타임 알바가 주방장으로 승격했지만, 누구도 불만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요, 그럼 고맙죠. 재료 아깝다는 생각 안 드시게 제가 실력 발휘해서 보여드리죠.”
유진은 최근의 경험으로 정말 자신 있었다.
요리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최고 수준의 요리인 미슐랭 3 스타나, 나라는 아니어도 한 지역이나 한 분야를 대표할 정도의 음식이 되려면 요리에 담긴 역사와 철학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을 완벽하게 갖추고, 경험과 역사를 쌓아가며 이룩하는 것이다.
요리에서 기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맛이고, 맛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재료와 알맞은 조리이며, 여기서 다시 알맞은 조리를 위해 중요한 것은 정확성이다.
정확한 분량, 정확한 재료 다듬기, 정확한 불질, 정확한 조리 시간 등등.
그런 면에서 유진은 요리사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아니 요리로 경지에 이른 거장들조차도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사기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힘도 좋네요. 저걸 기계도 없이 손으로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요?”
유진이 밀가루와 물을 섞어서 반죽을 만드는 것을 보며 순천댁이 탄성을 내뱉었다.
소싯적부터 지금까지 수제비 반죽 많이 만들어본 그녀는 밀가루 반죽이 보기에는 쉬어 보이지 분량이 어느 정도 되면 잘못하면 어깨와 손목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칼국수 밀가루 반죽은 손이 아닌 발로 밟아서 하는 기술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유진은 주먹 정도의 분량도 아니고 사람 머리통만 한 분량의 반죽을 조금의 어려움도 없이 아주 쉽게 뭉치고 풀고 구기고 펴면서 반죽해 냈다.
그것도 세 개나.
유진은 반죽들을 적당히 소분한 후에 랩을 씌워서 한쪽에 치워 두었다. 피자 도우 용 반죽도, 짜장면 짬뽕에 쓸 면을 뽑기 위한 반죽도 숙성이 필요해서 우선으로 만들었다.
다음은 케이크용 반죽이었다.
달걀 반 판이 순식간에 껍질을 잃었고, 유진은 달걀에 따듯한 물과 설탕, 버터, 물엿 등을 첨가해주고는 그릇을 품에 안았다.
“어? 유진 총각 우리 믹싱기 있는데.”
순천댁이 반죽용 믹싱기를 꺼내주기도 전에 유진은 손으로 거품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도와 정확도는 보고 있는 사람이 질리게 할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다. 믹싱기를 꺼내기 위해 찬장을 열었던 순천댁은 결국 찬장 문을 다시 닫아야 했다.
그 이후도 비슷했다.
동그란 케이크용 빵 2개를 만들어 오븐에 넣은 유진이 그다음 차례로 짜장을 볶기 위해 양파와 호박, 양배추, 돼지고기 등을 써는 모습은 오늘 아침에 식사 준비 과정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경이적이었다.
짬뽕에 들어갈 새우를 다듬고 오징어에 정교한 칼집을 내는 속도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첫 번째로 그녀들이 맞은 압권은 수타였다.
유진의 손이 가운데로 모였다가 좌우로 벌어지며 손에 쥔 반죽으로 도마 위를 내려칠 때마다 마치 마법처럼 면발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래서, 수타 수타 하는구나.”
만들어진 면은 사람 손으로 만든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일정한 모양이었다.
이어서 피자 도우 만들기는 아예 예술이었다.
반죽을 허공에서 돌려서 동그랗게 만든다는 것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보통 피자 도우는 바닥에 둔 채 밀대로 밀어서 만든다. 수타와 비슷하게 허공에서 도우를 회전시켜서 만드는 기술은,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완성형의 품질에 비해 너무 높은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손끝을 대는 것으로 사람 심장 박동과 내장 상태까지 느낄 수 있는, 염동력을 쓰면 아예 손을 안 쓰고도 도우 반죽 회전이 가능한 유진에게는 별로 관계없는 이야기였고, 유진은 너튜브에서 본 전문 피자 장인들 흉내를 내며 허공에 반죽을 던졌다 받았다까지 하면서 도우들을 만들었다.
한 종류만 만든 것도 아니고 보통 것, 두꺼운 것, 얇은 것 등을 자유자재로 만들었다.
피자 위에 토핑 얹어서 오븐에 구울 준비를 하는 정도는 그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그리고 최고의 압권은 케이크였다.
동그란 케익을 자른 다음 생크림과 딸기 등으로 채운 후 그 위에 다시 동그랗게 생크림을 바르고, 생크림 위에 중탕으로 녹인 다크 초콜릿을 부어서 덮은 다음, 화이트초콜릿을 녹이고 부어서 만든 장식용 딸기를 그 위에 다시 얹어서 데커레이션을 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행위 예술에 가까웠다. 옆에서 지켜본 고영은과 두 아주머니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그에 비하면 어디 한군데 덜 익거나 탄 곳도 없이 완벽하게 튀겨서 나오는 탕수육이나 중화팬을 이용하여 화려한 불 쇼와 함께 불맛을 입혀 볶아낸 볶음밥은 평범해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고작 3시간 만에 유진은 남들이라면 온종일 걸려도 과연 가능할까 싶은 종류와 분량의 끝내주는 요리와 디저트들을 완성했다.
“지니 오빵, 소진이 유치원 끝났어. 이제 갈 거야. 그런데 우리 12명이나 되는데 괜찮을까? 거기에 혹시 몰라서 우리 유치원 선생님이랑 기사님. 그리고 강준이 엄마랑 소윤이 엄마도 오실 거래.”
준비 끝날 무렵 걸려 온 소진이의 전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소진이는 사실 조금 아니 많이 불안한 상태였다.
그냥 가볍게 잘난 척 조금 할 생각이었는데 일이 너무 커졌다.
소진이와 같은 반 아이 중에는 무조건 가겠다고 집에 떼까지 쓰는 아이까지 있었다.
소진이네 노란 병아리반 총원이 15명이었는데, 이 중 피아노 학원이나 영어 과외같이 도저히 빠질 수 없는 오후 일정이 있는 아이들은 울고불고 난리도 났었다.
결국 도저히 집에서 허락을 못 받은 3명만 포기했다.
문제는 12명의 아이 중 소진이와 같이 전원주택단지에 사는 아이가 6명, 근처 마을에 사는 아이가 4명, 나머지 두 명은 유치원이 있는 인근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아이들이었다.
소진이네 집까지 20-30분은 걸리는 곳에 사는 아이들까지 무조건 따라가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결국 그 아이들을 책임지기 위해서 담임 선생님과 아이들 통학 버스 기사님까지 동행해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담임 선생님도 통학 버스 기사님도 흔쾌히 동행해 주시기로 하셨고, 소식 들은 전원주택마을에서 두 아주머니가 아이들 보살피는 것 돕기 위해 참석해주겠다고 했지만, 소진이로서는 늘어나는 사람들에 부담스럽고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사실 어른들이 아무 생각 없이 끼어든 것은 아니고, 혹시 몰라서 고영은 통해서 유진에게 허락과 양해 구해서 일을 진행한 것이었지만, 소진이는 그걸 잘 몰랐다.
소진이가 많이 특별하기는 해도 아기가 거기까지 생각하는 것은 무리였다.
유진은 겁먹은 듯한 소진이의 목소리에 주방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요리의 양을 보며 아주 자신 있게 말했다.
“소진이 오빠 믿지? 아무 걱정하지 말고 혹시 더 오고 싶은 사람 있으면 더 데려와! 오빠가 다 책임질게! 우리 소진이를 위해서 오빠가 다 책임진다!
“엄마한테 혼나는 것도?”
“어, 그, 그것도 책임져야겠지?”
“사랑해, 오빵! 금방 갈게!”
유진의 당당함에 자신감을 되찾은 소진이가 유진을 놀리기까지 한 통화가 끝나자, 듣고 있던 고영은은 새삼 놀라움을 느꼈다.
유진을 처음 만난 지 아직 한 달도 안 된 것 같은데, 소진이와 유진은 거의 평생 같이 산 남매나 부녀처럼 굴고 있었고, 그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자신도 과거도 잘 모르는 이 남자를 너무 쉽게 믿고 신뢰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오늘 처음 본 두 아주머니조차 너무 쉽게 유진에게 호의를 보내고 있었다. 두 분 다 그렇게 쉽게 누구와 친해지는 그런 사람들이 아닌데.
‘이 정도면 조금 무서운데?’
고영은은 조금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유진을 보자 다시 납득하고 말았다.
큰 키, 탄탄한 몸매, 그리고 선 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 보이는, 배우 뺨치는 얼굴까지.
원래 외모는 무기다. 미녀가 사람을 홀리듯 미남도 사람을 홀리는 법이다.
그 미남이 능력까지 출중하면 반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든 법이다.
‘모르겠다. 뭐 큰일이야 있겠어.’
아이들이 금방 몰려올 터였다.
면이 붇지 않도록 마지막으로 미뤄두었던 면 삶기를 할 시간이고, 이건 그녀들도 도와야 할 일이었다. 유진이 스파게티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바쁘게 움직이며 자신을 부르는 손짓에 그녀는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