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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65화 (65/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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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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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 미궁과 그림자, 그리고 심연 – 4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유진이 상황을 인식하자마자 곧바로 이 집에 쳐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장화진, 성무연 모녀가 몹시 괴로운 일을 겪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고 해도 유진에게 그녀들은 우선이 될 수 없었다.

유진은 산책 중이던 소진이는 옆집에 맡기고, 의아해하는 소진이를 달래주고, 우연히 눈에 들어온 고영은 집의 캠핑용 손도끼까지 하나 챙긴 다음에야 느긋하게 장화진의 집에 침입했다.

그리고 그녀들이 당하는 광경을 보면서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어둠 속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지켜보기에는 유진의 기준으로도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자 뒤늦게 끼어든 것이었다.

일단 들고 온 손도끼를 정동후를 향해 휘두르기는 했지만, 날이 있는 부분으로 휘두른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죽이기에는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유진은 날이 아니라 옆면으로 정동후의 머리를 후려쳤고, 정동후는 그대로 뇌진탕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그 정도면 사실 죽을 수도 있는 중상이지만, 유진은 기절 이상의 큰 후유증은 없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건 본능을 넘은 초능의 영역에서 세밀한 조절이었다.

그렇게 정동후가 쓰러지고, 남은 일행들이 갑작스러운 습격에 대응해 반격을 한다거나 인질을 잡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다고 큰 문제는 아니지만, 유진도 파리에서의 경험으로 나름 요령이 생긴 참이었다.

무엇보다 정동후의 후배 넷은 나름 주먹도 쓸 줄 아는 건장한 체격의 운동부 출신들이기는 했지만, 유진이 파리에서 겪은 이들에 비하면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그들은 이런 급박한 상황에 대응하는 법도, 대처해본 경험도 없었다.

그들은 연이어 휘둘러진 유진의 손도끼에 허수아비처럼 서 있다가, 차례대로 얻어맞고 차례대로 쓰러졌다. 바로 옆에서 선배와 친구가 쓰러지는 연이어 쓰러지는 동안에도 그 누구도 반응하지도 대응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쓰러진 다섯의 중앙에서는 채찍질이 멈췄음에도 불구하고 두 모녀가 여전히 울고불고 애원하고 절규하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런 경우 보통은 가해자가 모두 제압되면 피해자를 보살피는 법이지만, 유진은 일단 두 모녀보다 자신이 제압한 다섯 남자부터 신경 썼다.

유진 이 다섯을 끌어다가 그들이 있는 거실 안쪽으로 모은 다음 하나씩 꼼꼼하게 묶었다. 줄은 집 창고에 있던 빨래 줄 여분을 미리 챙겨왔다.

집에서 가져온 이런 물건은 혹시라도 나중에 증거가 될 수 있으니 되도록 지양하는 것이 맞지만, 유진은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물건이 증거로 사용될 일은 만들지 않을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다섯 명의 젊은 남자들을 손발이 뒤에서 하나로 겹치게 잘 묶고, 입도 집에서 가져온 박스 테이프로 잘 틀어막은 다음에야 유진은 피해자들에게 신경을 돌렸다.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는 딸과 달리,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린 엄마 장화진이 멍한 얼굴로 유진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유진과 눈이 마주치자 벌벌 떨면서 마구 소리치고 애원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유진은 그녀의 과한 반응에 잠시 의아함을 느꼈지만, 사실 장화진의 반응은 당연했다.

지금 유진은 얼굴에는 ‘바벨의 기억’을 변형시켜 만든 특유의 무늬 없는 금속 마스크를 쓰고, 후드를 깊게 눌러쓴 상태로 손에는 캠핑용이지만 손도끼를 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토막살인마로 생각하기 딱 좋은 살벌한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이미 그 도끼로 다섯이나 되는 사람을 쳐 죽인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는 후유증도 거의 없을 정도로 알맞게 조절해서 도끼 옆면으로 쳐서 기절만 시킨 것이었지만, 옆에서 보는 사람 눈에는 도끼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이 그 도끼에 맞아 죽은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자세히 보면 도끼에 맞은 것치고 피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장화진은 그 정도까지 세심하게 상황을 살필 정도로 제정신은 아니었다.

당연히 장화진에게는 그녀와 딸을 강간하던, 하지만 이제는 존재 자체는 익숙한 개새끼들보다 유진이 더 두렵고 무서울 수 밖에 없었다.

장화진 입장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은 정신을 놓고 소리를 지르는 그녀가 몹시 거슬렸다. 그래도 사정을 봐서 처음에는 좋게 좋게 대해주려고 했다.

“쉿!”

마스크 입가에 검지를 세우고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냈지만, 당연히 공황 상태인 장화진은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

유진은 약간 고민하다가, 남자 놈들 입을 막는 데 쓴 덕트 테이프로 그녀의 입을 막아 보았다. 하지만 영상에서 그렇게나 만능으로 사용되던 그 방법은 의외로 별로 효과가 없었다.

“으으읍! 으읍!”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도 시끄러운 것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코로 얼마나 숨을 격하게 몰아쉬는지 혹시 호흡곤란이 오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거기에 얼굴을 마구 흔들고 격하게 얼굴 근육을 움직이다 보니 덕트 테이프가 오래 붙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처리 방법을 고민하는 유진에게,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딸 성무연이었다.

“우리 죽이기 전에 부탁하나만 해도 되나요?”

유진은 딸 목소리가 들리자 더 발버둥 치는 장화진을 버려두고, 반대쪽으로 돌아 성무연쪽으로 향했다.

성무연의 얼굴은 남자들이 얼굴에 싸질러 놓은 정액의 찌꺼기와 눈물이 섞여 엉망이 되어 있었고, 눈빛도 죽어 있었지만, 표정과 목소리는 지금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온했다. 방금 전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고 있던 모습을 생각하면 몹시 이질적이었다.

특이한 그녀의 모습에 유진은 호기심을 느끼고 말을 걸었다.

“왜 내가 너희를 죽일 거로 생각하지?“

”저 새끼들 죽이러 온 프로 아닌가요?“

”프로? 전문 킬러 말하는 건가?“

”잠깐 고민해 봤는데 당신이 우리처럼 저 새끼들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사람으로는 안 보였어요. 그런 것치고는 너무 차분해요. 그럼 남은 가능성은 저 새끼들 죽이려고 고용된 프로라는 뜻이겠죠. 저 새끼들 행태로 봐서는 언젠가 누군가 오긴 올 거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 정도로 여러 사람에게 원한을 샀는데, 그중에 복수할 능력자가 하나도 없지는 않을 테니까.“

유진은 그녀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유진이 알기로 세상에는 원한 따위 두려워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될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고, 그중에 죄의 대가를 치른 사람은 정말 적었다.

그보다는 그녀의 사고방식에 흥미가 생겼다.

”내가 프로인데 왜 너희를 죽일 거로 생각하지? 프로라면 목표만 깨끗하게 처리하고 가겠지. 목표랑 상관없는 제삼자까지 쓸데없이 손을 쓸 이유가 없지.“

”특히 정동후 같은 거물을 처리하면서는 증인과 증거를 남겨둘 리가 없으니까요. 프로라면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니 깨끗하게 다 정리하겠죠.“

”거물이라고? 저딴 놈이?“

유진은 성무연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차민영의 이름이 거론되었고, 그녀를 향한 알 수 없는 뭔가가 진행 중이니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어서 여기에 개입했다. 하지만 지금 자기 손에 제압당한 고만고만한 남자들 다섯 중에 거물이라는 소리를 들을만한 놈이 있는지는 의아했다.

유진은 연구소에서 실험체로 살아가면서 정말 많은 고위층을 보았다. 갈아 죽여 버리고 싶게 증오하는 인간들이었지만, 그래도 각자 지배자이자 악당이자 악마에 걸맞은 뭔가를 가지고 있고 또 보여주는 인간들이었다. 가장 형편없는 쓰레기였던 닥터 리샤르조차도 한 조직의 리더다운 광기와 집념, 카리스마가 있었다.

하지만 이놈들은 그냥 흔해 빠진 뒷골목의 갱들만 한 뭔가도 보이지 않았다. 차민영을 구하는 과정에서 파리의 뒷골목 지하도에서 죽인 아프리카계 갱들조차 이놈들에게 비하면 거물로 느껴졌다.

특히나 처음 제압한 놈이 리더 격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말투와 행실 모두에서 거물이라는 표현을 듣기에는 너무 천박하고 하찮아 보이는 수준이었다.

유진이 자기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이자 성무연이 다시 말했다.

”정동후 몰라요?“

”저놈 이름이 정동후라는 것은 알겠는데, 저게 거물이라고? 저런 하찮아 보이는 놈이?“

”당신 몰랐나 보네요. 정동후는 성화 그룹 직계에요. 현 회장인 유명선 회장의 외손자. 5대 재벌 그룹 회장의 직계 손자를 건드리고 후한 감당할 수 있겠어요?“

유진은 이번에는 진짜로 놀랐다.

”성화 회장 손자라고?“

”그래요. 장녀인 유인영 이사장 둘째 아들이에요. 성화 건설 정문철 사장의 아들이죠.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주자면, 정문철 사장 부친은 전직 판사 출신의 4선 국회의원이었고, 정동후 삼촌들도 판사, 국회의원이에요. 집안 전체가 법조계와 정치계의 거물 집안이죠.“

정동후에게 당한 이래, 성무연도 복수 혹은 탈출을 위해서 정동후에 대해서 나름 여러 가지 조사를 해보았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점점 더 절망적이기만 해서 이제는 거의 자포자기한 상황이었다. 매번 이 꼴을 겪을 때마다 죽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만, 그래도 결국 자살하지 못한 것은 죽는다고 이 일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자기가 자살하면 정동후가 엄마는 물론이고, 아버지나 동생들에게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과 그리고 자신이 겪은 일들이 세상 전부에게 구경거리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은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성무연에게는 너무도 절망적인 그런 배경은, 유진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들이었다.

”성화, 성화라고? 이 병신이? 이 병신이 어떻게 성화일 수 있지?“

유진에게는 아무리 봐도 병신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이것이 유명선의 핏줄이고, 유인영의 아들이라는 것이 더 놀라웠다. 아무리 봐도 이 병신에게는 유진이 예상하던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유진이 성화의 핏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한 그 어떤 것도!

”정말 성화의 핏줄 맞아? 양자 같은거 아냐? 아니면 그 남편 놈이 들여온 사생아라거나?“

유진이 태도가 몹시 이상했지만, 성무연은 유진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집안에서 내놓은 놈이기는 해도, 유명선 회장 외손자 확실해요. 유인영이 낳은 것도 확실하고.“

”크크큭. 미치겠군. 이게 성화 직계라고? 이런 게?“

유진은 웃었다.

연구소를 떠나서 어이없고 황당한 일들 참 많이 경험했지만, 이건 정말 그중에서도 손꼽을만한 일이었다.

그냥 차민영과 소진이를 노리는 위험한 시도를 차단하려던 그의 의도는 이제 많이 일그러져 버렸다.

유진은 허무와 분노 그리고 깊고 깊은 어떤 곳에서 끓어오르는 어둡고도 차가운 형용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며 잠시 침묵 속에서 사색에 잠겼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해 해야 할 일들을 결정한 유진이 성무연에게 물었다.

”넌 무엇을 원하느냐, 어린 여자야.“

그 목소리는 지금까지 유진이 성무연에게 들려주던, 그리고 차민영이나 소진이에게 쓰던 것과는 전혀 다른 톤과 어조였으며, 무엇보다 인간의 것 같지 않은 소름이 끼치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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