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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목을 바꾸어 보았습니다.
[초인 유진 - 영웅도 악당도 거부한다.] 에서 [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 것은 거절한다.]
로 바꾸었는데, 그게 그거 같지만 독자분들 보시기에는 어떤지 궁금하네요.
#007 피가 흐른다 – 01
고주희는 자신의 지정 주차석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오늘은 출근이 늦은 참이었다.
욕먹을 상황은 아니었다. 주말에 이어 월요일까지 연달아 야근하다가 새벽에 잠깐 집에 들어가 눈 좀 붙이고, 씻고, 옷 갈아입고 나오는 참이었다. 최근 몇 년간 거의 이런식으로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지라 오랜만의 빡센 철야에 좀 지쳐있었다.
그녀는 성화 물산 전략기획실 제2부속실 3팀 소속의 과장이었다.
담당 업무는 차민영과 법적인 이름은 강소진인 본명 유소진에 대한 경호 및 감시였다. 유소진의 출생이 확인된 직후부터 담당 책임자였다.
같은 팀의 다른 과들이 맡은 회장님 정식 일가나 사생아들과 달리, 고주희가 맡은 차민영과 유소진은 워낙에 조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서 지난 5년간 그녀는 거의 월급루팡 아니냐는 눈총을 받을 정도로 편하게 회사생활을 했다.
물론 그건 남들 평가이고, 그녀는 회장님 보다 더 무섭다는 평가를 듣는 사모님의 직접 관리를 받는 처지라서 지난 5년간 제대로 숨도 못쉬고 살아왔다.
그래도 일단 차민영이 사고는 치지 않아서 좀 편하게 지내기는 했는데, 최근 그녀가 유럽에서 이상한 남자를 데려와 동거를 하는 사고를 치는 바람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이 이상한 남자가 수상한 목적으로 모녀에게 접근한 것은 아닌지, 혹시 범죄자 같이 위험한 사람은 아닌지 확인이 필요했는데, 일단 확인된 정보는 아무리 재벌 그룹 사람들인 자기들이라고 해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위험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놈이라는 것뿐, 아무리 여기저기 쑤셔봐도 정보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지난 주말만 해도 미국지사의 정보팀 붙잡고 한참 난리를 피운 참이었고, 아무리 야근하며 정보를 캐고 정리해도, 사모님에게 보고할 내용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반쯤 미치기 직전인 상황이었다.
그런 개짜증나는 상태였기 때문에, 주차장에서 주변을 서성거리던 낯선 남자가 자신을 보고 다가오는 순간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룹 계열사 임직원의 수를 다 합치면 수만 명이 넘는다.
본사 주차 빌딩에 차를 댄 것으로 보아 계열사 과장급 이상은 되는 것 같았지만, 수도 없이 많은 그리고 쉴 사이 없이 새로 생겨나고 없어지는 계열사 과장 따위 그녀가 신경 써줘야 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 그 인물이 지금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것은 그녀가 현재 있는 위치상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본사로 가는 길은 반대 방향에 있습니만?”
고주희는 지금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여기가 다른 층이라면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따라왔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있는 층은 건물의 1층이었다.
본사로 가려면 건물 출입문 쪽으로 향해야지 이쪽으로 올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남자가 자신에게 한눈에 반해서 쫓아왔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길 가던 사람들은 한 번 정도는 뒤돌아볼 정도의 미녀이기는 했지만, 여기는 주차장이기는 해도 엄연히 회사 내부라고 볼 수 있는 장소였다.
사내에서 여자에게 수작 부릴 정도의 머리로 과장급 이상이 되려면 그룹 총수의 직계 혈족 정도는 되어야 했다.
고주희가 알기로 이 남자는 로열패밀리의 일원이 확실하게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자를 꾀려는 남자치고는 표정이 너무 매우 어두웠다.
남자는 품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더니 고주희에게 내밀며 인사했다.
“실례하겠습니다. 건설 비서실의 최지용 과장입니다. 혹시 제2부속실 소속이신가요?”
고주희는 대답 없이 일단 명함을 받아서 들었다.
상대가 명함을 주며 인사를 건네는데 본인 소개를 하지 않는 것은 몹시 무례한 행동이지만, 고주희는 그래야 했다.
그녀가 속한 전략기획실 산하 제2부속실은 그 존재 자체가 회사의 암묵적인 금기인 부서였다.
명함조차도 그냥 사명과 직책인 과장 정도만 표시될 정도였다.
계열사 직원이 묻는다고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소속과 직위를 밝힐 정신머리라면 과장 달기 전에 퇴사 조치당했을 것이다.
대답 없이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그녀에게 압박을 느꼈는지, 최지용 과장이 서둘러 용건을 말했다.
“제가 제2부속실 성문후 차장님과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미팅 약속이 있는 성 차장님과는 지금 통화가 안 되는 상황인데, 사무실을 찾지 못해서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질문드린 겁니다.”
최지용 과장의 말은 성화 그룹 과장급의 일 처리치고는 매우 어설펐지만, 나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는 했다.
제2부속실 사무실은 안내판에 표시되지 않으며, 엘리베이터를 타도 소속 직원 외에는 갈 수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성화 건설은 그룹 내에서 반쯤 따돌려지는 회사이기 때문에, 그쪽 직원은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 어려운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고주희는 자신의 판단으로 그를 안내하기 전에 일단 확인부터 했다.
“잠시 실례할게요.”
최지용에게 양해를 구한 고주희는 사무실에 있을 당직 직원에게 연락했다.
약속 당사자인 성문후 차장에게 연락하지 않은 것은 현재 통화가 되지 않고 있다는 최지용 과장의 말 외에, 그녀가 성문후 차장과 다른 지휘 계통에 속하는 탓에 서먹한 사이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곧 통화가 연결되었고 고주희는 짧게 용건만 말했다.
“나에요. 여기 1층인데 건설 비서실의 최지용 과장이라는 분이 성문후 차장님과 약속이 있다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방문자 확인 부탁해요. 그래요? 알겠어요. 내가 안내하도록 하지요.”
고주희는 이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지위나 이름은 입에 담지 않았다.
그녀는 상대가 허락된 방문자이고 같은 그룹에 근무하는 계열사 직원이라고 확인되었다고 해도 상대에게 자신에 관한 신상을 노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런 철저함이 지방 전문대 출신인 그녀가 고작 나이 서른에 과장을 달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가시죠.”
고주희는 짧게 말하고는 최지용을 안내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엘리베이터의 층수 버튼 아래에 있는 인식 센서에 자신의 보안키를 가져갔다.
엘리베이터가 층수 표시에 없는 지하 2층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최지용 과장은 긴장을 풀기도 할 겸 도와준 고주희에게 호의의 감정을 가지고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소개를 못 받았군요. 이름과 지위가 어떻게 되시나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여자였지만, 보여주고 있는 분위기와 타고 있던 차를 생각해 최지용 과장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그에 비해 고주희의 태도는 삭막했다.
자기 이름과 직위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 부하 직원에게 전화하며 자기 이름도 밝히지 않은 그녀는 자기소개할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
“아실 필요 없습니다.”
분위기가 썰렁해졌고, 최지용 과장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비서실 과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얼핏 책상물림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최지용은 거의 폭력조직만큼이나 험하다는 소리를 듣는 건설사에서 이런저런 뒤처리를 주로 맡는 인물이었다.
우락부락한 체격에 외모도 거칠고 성격도 절대 얌전한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리 본사 소속이라고 하지만 자신보다 훨씬 어린 여자 직원 따위가 자신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것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가 한 소리 하기 전에 겨우 2층밖에 안 내려온 엘리베이터가 문이 열리며 보인 모습과 들려온 소리에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던 욕설을 다시 삼켜 버렸다.
꽤 체격 좋은 최지용 과장보다 훨씬 큰 체격을 가진, 그리고 누가 봐도 전문 훈련을 받은 것이 분명한 덩치의 남자가 고주희에게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는 것을 본 것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과장님. 손님은 이제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응, 수고.”
고주희는 부하 직원에게 짧게 손짓 인사만을 건네고는 최지용에게는 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걸어가 버렸다.
최지용은 끽해야 대리 나부랭이 정도일 그거로 생각했던 젊은 여자가 자신과 같은 과장급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제2부속실은 엄연히 그룹 전체의 컨트롤 타워인 전략기획실의 일부였고, 그룹 지주 회사이자 본사 격인 성화 물산의 전략기획실 과장이라는 직위는 제법 잘 나간다고 해도 그룹 내 위상이 약한 편인 성화 건설의 비서실 과장과는 급이 다른 직위였다.
최지용은 여기가 본사라는 점을 생각해 말을 조심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중 나온 젊은 직원에게 물었다.
“방금 그분 과장인가요? 젊어 보이시는 분이 대단 하시군요.”
나름 그녀를 칭찬하며, 젊은 직원에게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었다.
이런 질문을 하면 보통의 경우 그녀의 이름과 지위를 말해주며 그녀에게 대한 간단한 설명 정도는 해주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자면 - XXX 과장님이십시다. XXX를 담당하시죠. – 정도로 대답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최지용은 자신이 본사를 정말 얕봤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젊은 직원은 분명 여성과 달리 자신보다 명백한 하급자일 것이 분명한데도 그의 질문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자신의 할 말만 했다.
“성문후 차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입니다. 안내 없이 이동하시면 보안에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수작이 이빨도 안 들어가는 꼴에 최지용 과장은 속으로 조금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겉으로는 얌전히 새로운 직원을 따라 이동했다.
사실 최지용 과장도 고주희에게 딱히 신경 쓸 정신이 아니기는 했다.
그냥 평상시 보지 못한 스타일의 인물을 보니 사람을 파악하는 것이 주 업무인 탓으로 생긴 직업병이 도졌을 뿐이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회의실에는 미리 통화하고 얼굴도 확인해 둔 성문후 차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문후 차장은 사십 대의 나이로 매우 부드러운 인상의 전형적인 책상물림 스타일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최지용은 그의 앞에서 긴장을 풀지 않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2부속실이 뭐 하는 조직인지 알고 있고,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일을 하는 처지에서 이 업무를 맡는 차장급이 어떤 사람일지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건설 비서실 최지용입니다.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최지용에 비해 성문후 차장은 고개만 까닥했다.
서로의 상하 관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이어지는 말도 그랬다.
“성문후입니다. 상황이 상황이니 반갑다고는 못하겠군요.”
매정한 말이지만 최지용도 성문후의 말에 속으로 동의했다.
지금 상황은 반갑다는 말 같은 것을 나눌 상황은 아니었다.
아니 인사라도 그런 말을 나눴다는 것이 윗분들의 귀에 들어가면 치도곤을 당할 상황이었다.
성문후가 말을 이었다.
“우리 서로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 따로 긴말은 필요 없겠지요. 이번 일은 몹시 불행한 일이고 저희도 도울 생각은 있지만, 건설 사장님께서 직접 처리하시겠다고 도움을 거절하셨다고 전달받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과장님이 왜 방문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최지용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이번에 동후 군이 불행한 일을 당한 과정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동후 군이 가지고 있던 비밀 명의의 스마트폰이 사라진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통신사의 도움으로 그 핸드폰이 마지막으로 접속한 지역이 파주 인근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접속 지역 인근이 동후 군이 딱히 방문할 이유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요?”
“그래서 저희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좀 더 자세하게 조사하다가 좀 특이한 인물에 대한 정보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인물에 대해서 저희가 맘대로 접근할 수가 없어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그런가요? 누구인데 그러죠?”
“혹시 차민영이라는 이름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