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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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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피가 흐른다 – 02
자신의 자리로 향한 고주희는 업무를 시작하며 최지용 과장과의 짧은 만남은 깨끗하게 잊었다.
차민영과 그녀의 동거남인 유진에 대한 조사만으로도 미칠 만큼 바쁜 그녀에게, 출근하다 우연히 만난 다른 회사 과장 따위 기억할 가치 따위 전혀 없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아 마자 직원들이 조사한 추가 내용들에 대한 보고가 시작되었다.
“차수연? 이 여자는 뭐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차민영 씨의 후배이자, 죽은 전남편의 여자 중 하나입니다. 전남편 사후 전혀 만남이 없었는데 최근에 갑자기 다시 교류를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
“예?”
“전혀 교류가 없던 전남편의 세컨드를 갑자기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긴 다음에 왜 갑자기 다시 만나냐고.”
“그, 글쎄요.”
“글쎄요?”
“죄송합니다, 워낙 자료가 없고 최근에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서 딱히 뭔가 확인할 만한 조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씨발. 그래 이해한다. 지금 이런 여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 그 유진이라는 남자는 어떻게 됐어?”
“완전히 막혔습니다. 인천공항에서 입수한 여권 정보로 추적을 해봤는데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공항 직원들은 유진과의 대화로 유진의 배경에 대해서 좀 알고 있었지만, 고주희의 팀원들은 거기까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워낙 위험한 배경이라서, 이야기를 아는 인원들에게 함구 명령이 내려졌고, 몇몇 기관에서 극비 정보로 취급하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 수 없는 고주희로서는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설마 그게 끝이야?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차민영이 그냥 사생아 낳은 하룻밤 지나가는 여자로 끝일 줄 알아? 차민영하고 소진 양에 대해서는 매달 꼬박꼬박 사모님이 직접 보고를 받으신다는 거 몰라? 내가 사모님에게 차민영에게 스무 살 남친이 생겼는데 그 남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라고 보고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나만 좆 되고 끝날 것 같니?”
고주희 언성이 높아지자 대답하던 부하 직원과 다른 직원이 끼어들었다.
“완전히 막혔다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공적 정보가 전혀 없어도 일단 미국 국적이니까 미국 지사 통해서 유명한 사립 탐정에게 조사를 맡겼는데 그쪽에서 딱 하루 만에 의뢰 포기하고 착수금 반납했다고 합니다.”
“응?”
“지사 쪽 직원 말로는 의뢰를 맡긴 사립 탐정이 불법적인 일도 마다치 않는 인물로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 뒷조사도 마다치 않고 하는 인물인데 고작 하루 만에 손을 뗀 것이 몹시 수상하다고 합니다. 정말 위험한 인물일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위험하다는 거야.”
“미국 쪽 변호사의 조언으로는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 뒤를 파는 것도 마다치 않을 정도의 사립 탐정도 꺼릴 정도의 경우는 보통 셋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증인 보호 프로그램 대상자이거나, 정보기관이나 군의 기밀 요원이거나, 수사기관의 언더커버 요원이거나. 저 세 부류의 존재는 뒷조사 자체만으로도 국제 외교 스캔들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위험합니다.”
“나도 알아. 리크 게이트로 미국 당대 정권의 실세들이 박살 나고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터가 고개를 숙여야 했을 정도인데, 모를 수가 있나.”
리크 게이트는 칼럼니스트 로버트 노박이 워싱턴 포스트에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을 비난한 전 이라크 대사 조세프 윌슨 전 대사를 비난한 칼럼을 기재하면서, 윌슨의 아내가 CIA 비밀 요원이라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발생한 미국 정계의 스캔들이었다.
CIA 요원의 신분을 드러내는 비밀 정보 누설은 징역 10년 이상의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중죄였고, 로버트 노박에게 이 비밀 정보를 누설한 당시 백악관 부실장 칼 로브와 부통령 비서실장 루이스 리버가 처벌받고, 당시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부통령 딕 체니와 네오콘의 권력도 엄청나게 쪼그라들었다.
이 폭로에 관련된 뉴욕 타임스 기사와 워싱턴 타임스 기자들의 부도덕성이 밝혀지는 바람에 역사와 전통 그리고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두 신문도 해당 기자들을 해고하고, 사과까지 해야 했다.
리크 게이트는 한때 미국 최고의 권력 집단이던 네오콘이 단일 세력으로는 사실상 전멸당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 몰락의 실제적 시작이었던 것은 분명할 정도의 일이었다.
미국 정권 실세들조차 그런 꼴이 되었는데, 잘 나간다고 해봐야 세계적으로는 알아보는 사람도 별로 없는 대한민국 재벌 그룹 따위는 어떤 꼴이 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너희 생각에 그 새끼는 셋 중 어디일 것 같아?”
“솔직히 나이로 봐서는 증인 보호 프로그램 대상자가 아닐까 했지만, 증인 보호 프로그램 대상자를 해외로 내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그 친구 하는 행동이 별로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에 조심하는 느낌도 없습니다.”
“그리고?”
“기밀 요원이나 언더커버 요원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립니다. 또 실제로 그런 인물이라고 하면 차민영 씨와 함께 지내는 것도 이상합니다. 차민영 씨가 저희에게나 중요하지, 미국 같은 국가에서 신경 쓸 가치가 있는 인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래서 솔직히 정말 모르겠습니다.”
“씨발.”
자신 없는 태도로 말소리가 작아지는 부하 직원의 대답에 고주희가 욕설을 내뱉었다.
듣고 있던 부하 직원들이 움찔했지만, 기분 나빠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상사라서 욕설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욕설이 자신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였다.
그녀는 그저 이 상황 자체에 열을 받아 욕설을 내뱉은 것이었다.
그들이 국내에서 정보 수집하는 일에 국정원 뺨치는 전문가들이라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었다.
국내 정보도 아닌 미국 정보를, 그것도 미국 전문가도 손을 못 댈 정도의 일을 알아보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고 고주희는 할 수 없는 일을 못 했다고 화를 내거나 책임을 묻는 상사가 아니었다.
“그럼 지금 그 인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뭐가 있는 거지?”
“여권 정보 외에는 공항 입국 심사 당시에 그 친구를 심문했던 담당자들에게 간신히 얻어낸 의견 정도가 전부입니다.”
“위험하고 수상해 보인다는 그 의견?”
“네. 딱히 근거는 없는 담당자들의 사견일 뿐이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전문가들의 사견이 그냥 편견으로 끝나는 경우 생각 외로 적습니다.”
그건 배후 VIP에 대해서 언급할 수 없었던 담당자들이 주머니에 찔러주는 용돈의 대가로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의견이었다.
“씨발.”
고주희는 다시 한번 욕설을 내뱉었다.
정체불명의 위험한 젊은 남자가 모녀만 사는 집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비극으로 진행되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의 스릴러 영화 시나리오에 나올만한 문구이고, 누가 봐도 위험이 느껴지는 신호였다.
사실 고주희는 차민영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었다.
문제는 그녀의 딸 강소진, 본명 유소진 팀 내부에서는 소진 아가씨라고 부르는 아이였다.
강소진은 고주희에게 있어 그냥 흔해 빠진 재벌 사생아가 아니었다.
강소진의 존재를 알아차린 시점부터 그랬다.
강소진의 친부인 유성준은 재벌 가문 남자치고 사생활이 꽤 깨끗한 편이기는 하지만 재벌 3세가 미남에 매너까지 좋은 탓에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하룻밤 같이 보낸 여자가 한둘이 아니고 그래서 그냥 스쳐 지나가는 하룻밤 접대 상대에 불과한 차민영은 부속실의 관심 대상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회장 사모님인 유주영 여사께서 직접 부속실에 오더를 내리면서 상황이 변했다.
사모님은 특정 기간을 지정한 후에 이 시기 가문의 남자들과 가까이 지낸 여자 중 임신한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들을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과정에서 고주희가 담당하던 유성준과 하룻밤을 보낸 차민영이 임신한 것이 확인되었고, 혹시나 해서 태어난 강소진의 머리카락과 혈액 등을 얻어내 조사한 결과 유성준의 아이로 확인되었다.
그걸로 부속실의 흔해 빠진 여직원 중 하나였던 고주희가 대리가 되었다.
그걸로 끝나지도 않았다.
강소진과 그녀의 모친인 차민영의 신변 보호를 위해 파견된 직원들이 어설픈 짓을 하는 바람에 오히려 위험을 느낀 차민영이 파주의 시골로 도망가 숨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자, 차민영과 강소진을 보호하고 감시하는 임무가 그녀에게 떠맡겨져 버렸다.
원래는 문제의 책임을 고주희에게 덮어씌우기 위한 사내 정치의 일환이었는데, 고주희는 이걸 전화위복으로 삼았다.
고주희는 차민영과 강소진을 보호 감시하기 위해서 그녀의 이웃인 성지호 사장의 북성건설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그녀의 이웃에 문제가 될만한 사람들이 이사 오는 것을 은밀하게 차단했으며, 주변의 지역에 간접적인 감시 및 경호에 사용할 거점도 소리소문없이 확보했다.
차민영 본인에게도 직접적으로 접속하여 약간 위협을 가하기는 했지만, 그녀에게 상황을 납득시키기도 하고, 뒤로는 평판이 박살이나 일거리가 없어진 그녀의 커리어도 은밀하게 관리해 주었다.
그걸로 고주희는 입사 9년 만에 계약직 사원에서 정직원 대리가 된 지 고작 1년 만에 다시 과장이 되었다.
급여는 1년 만에 4배로 뛰었고, 직접 쓰는 업무 비용은 상상 이상이 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고주희는 강소진에 대한 지속적인 보고를 위해서 그녀의 직속 팀장이나 제2부속실 전체를 담당하는 실장은 물론 상무급인 전략기획실장조차 얼굴 보기 힘들다는 회장 사모님과 한 달에 한 번씩 직접 면담하는 임무도 맡게 되었다.
문고리 권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의 사회에서 그룹 총수인 회장의 아내이자, 회장인 남편을 데릴사위로 맞아서 결혼한 실질적인 오너인 회장 사모님의 심복이 된 그녀의 신분은 그날을 기점으로 천지개벽해 버렸다.
원래는 손가락으로 그녀를 부리던 상사들이 이제는 그녀의 눈치를 보고, 허공의 먼지 바라보듯 그녀를 바라보던 다른 직원들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꺼리는 지경이 되었으며, 원래는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하던 부속실장이나 전략기획실장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물을 정도가 되었다.
조선시대 기준이라면 물 긷던 천한 무수리에서 왕비를 모시는 중궁전 상궁으로 한 번에 신분 상승한 격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받는 이 모든 대우는 그녀가 회장 사모님의 마음에 들게 강소진을 케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모님이 소진 아가씨에게 보내는 관심의 정도를 고려해보면, 원래 그녀의 임무였고 지금도 그녀의 임무인 유성준에 대한 관리 임무조차 이제는 유성준이 성화 그룹 직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강소진 양의 친부이기 때문으로 여겨질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