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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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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피가 흐른다 – 03
사모님이 고작 사생아인 소진 아가씨에게 왜 그렇게 관심을 쏟는지는 고주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고주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어린 아가씨의 일에 자기 목숨이 걸려 있다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잘린다고 안 죽는다는 것은 평범한 직장인이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고주희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대기업에서 가장 더럽고 위험하며 비밀스러운 일을 하며 10년이나 근무했다.
그 사이 여러 문제로 퇴사한 동료와 선배, 후배 중에 어느 날 갑자기 소리 없이 사라진 사람도 여럿 보았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
그녀처럼 일가친척 하나 없는 보육원 출신의 고아라는 것이었다.
고주희는 서울대 연대 고대 같은 대한민국 최고 대학 출신은 물론 외국 명문대 출신들도 입사를 위해 줄을 서는 대기업이 자신 같은 지방 전문대 세무학과의 야간 대학 졸업생을 뽑은 이유도 그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어디 산속에 조용히 묻어 버려도 아무도 찾지 않을 사람이라는 점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일을 정말 목숨 걸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이 유진이라는 검은 머리 외국인은 명백하게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었다.
고주희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 새끼 처리할 방법 없을까?”
“비자 건드려 볼까요? D-4-5 비자 취득 과정에서 명백하게 불법 위조 정황이 있습니다. 이거면 추방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전 반대입니다. 차민영 이 여자가 이 새끼에게 얼마나 미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거주 문제 해결을 위해서 혼인 신고 같은 거라도 하면 더 큰 일 될 겁니다. 소진 양의 법적 부친이 되는 거니까요.”
“설마 그렇게까지 한다고?”
“남자나 여자나 이성에 미치면 뭔 짓인들 못 하겠어. 그 여자가 전남편에게 한 꼬락서니를 보며 그거보다 더한 짓 하고도 남아.”
“씨발.”
부하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주희가 다시 한번 욕을 했다.
그리고 어지간하면 정말 꺼내고 싶지 않은 말을 꺼냈다.
“물리적 방법은?”
“절대 반대입니다.”
“저희에게 그런걸 할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이 있을지는 별개로 치고, 미국 내 행적이 너무 수상하다는 것에 저희 모두 동의하지 않습니까. 일이 생겼을 때 미국에서 누가 날아와 무슨 일을 벌일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젠장.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뭐야?”
“이런 말씀 드리고 싶지 않지만, 솔직히 그놈이 그냥 문제없이 차민영 씨랑 적당히 연애하면서 소진 양을 잘 보살피기를 바라는 것이 최선 아닐까요? 다행히 지금까지는 굉장히 평판이 좋습니다. 소진 양도 굉장히 좋아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씨발. 씨발. 아아악! 씨발!”
고주희가 미친년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2주 후에는 사모님에게 보고하러 가야 하는데, 나보고 소진 양의 옆에 위험한 놈이 생겼는데 그냥 문제가 될 것이 없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라고? 사모님이 그런 소리 듣고 나를 살려 두실 것 같냐? 또 내가 죽게 되면 그냥 나 혼자 죽을 것 같아!”
부하들은 냉정하고 철저한 성격에 마녀라는 별명이 붙은 상사의 처음 보는 지랄 발광에 조금 놀랐지만, 그녀를 이해했다.
솔직히 그들도 허락만 되면 그녀처럼 발광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건 막혀도 너무 꽉 막혀 있었다.
그들 수준으로서는 뭔가 해볼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평상시에 고주희를 소 닭 보듯이 하던 팀장이 그녀를 찾아온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 미안. 내가 타이밍이 좀 안 맞았네.”
노크도 없이 고주희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던 그녀의 상관은 지랄 발광하는 고주희를 보고 당황했다.
고주희는 서둘러 일어나서 반듯한 모습으로 그를 맞았다.
“아닙니다, 팀장님. 하실 말씀이 있는가요?”
은근히 실세라고 불리며 많은 업무를 팀장을 제치고 진행하는 그녀였지만, 그런 만큼 더 팀장에게 깍듯하게 대했다.
소모품으로 입사해서 운 좋게 높은 자리에 올라온 그녀와 달리, 팀장은 회사에서 본격적으로 키우는 인물이었다.
신라시대 골품제로 따지면 고주희는 6두품도 아닌 일반 백성 수준의 1두품도 안 되는 노비 출신에 가깝지만, 팀장은 왕족인 성골은 아니어도 진골 정도는 되는 인물이었다.
그녀가 요즘 조금 성공했다고 해도 절대로 그걸 믿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팀장은 충분히 기어오를만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분수를 지키는 고주희의 태도에 새삼 만족하며 용건을 말했다.
“성 차장이 지금 당장 고 과장 좀 보자고 하는 데 혹시 걸리는 것이라도 있어?”
고주희는 오늘 오전에 마주쳤던 성문후 차장의 손님과 자신이 맡은 몇 안 되는 인물들 간의 관계를 고민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없습니다.”
“그래? 뭐 어쨌든 성 차장이 매우 급하게 요청한 것이니까 지금 가줘야겠어. 갔다 와서 어지간하면 보고 좀 해주고.”
“네. 알겠습니다.”
고주희는 한참 회의 중에 자신의 동의도 없이 부르는 상대에게 짜증이 났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제2부속실 소속이라고 해도 성문후의 1팀과 그녀가 속한 팀3은 위상이 아주 달랐다.
경호와 공작, 정치권 및 공무원에 대한 대관업무 보조 등을 주로 맡는 1팀의 위상은 끽해야 사고 치는 회장님 혈족의 뒤나 닦는 것이 주 임무인 3팀은 물론이고 언론 대응과 정보 수집 활동으로 실질적으로는 가장 많은 일을 하는 2팀조차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팀의 팀장인 성문후는 제2부속실에서 실장에 이은 명실공히 이인자였고, 전략 기획실 전체를 다 합쳐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였다.
어쩌다 사모님 눈에 들어 벼락출세한 그녀 따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갔다 올 테니까 아이디어 좀 생각해봐. 딱히 지금 당장 쓸 방법 아니어도 최소한 사모님께 말씀은 드릴 수 있는 걸로.”
“네, 과장님.”
고주희는 부하들을 뒤로하고 자신의 사무실을 나서 성문후 차장의 사무실로 향했다.
걸으면서도 성문후 차장이 왜 자신을 찾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유진 헤이즈라는 그 정체불명의 위험해 보이는 미국 국적의 한국 남자에게만 완전히 집중되어 있었다.
성문후 차장이 왜 자신을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대응할 생각이었다.
안내받은 회의실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고 과장. 차민영 씨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나름 이 이름이 함부로 언급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아는 성문후 차장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지만, 고주희는 그런 성문후 차장은 상상도 못 할 수준으로 반응을 보였다.
고주희는 당장 자신의 스마트 폰을 꺼내서 녹음 앱부터 실행시켰다.
회의실에서는 원래 있는 핸드폰도 꺼서 기밀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원칙인 상황에서 그녀의 행동은 성문후 차장만이 아니라 동석하고 있던 최지용 과장과 1팀의 다른 직원들 모두를 당황하게 했다.
그리고 그게 끝도 아니었다.
고주희는 또렷한 목소리로 현 상황을 묘사라도 하듯이 설명하기까지 시작했다.
“X 월 X일 본사 별관 전략기획팀 제2부속실 1팀 회의실에서 차민영 씨의 이름이 언급되었습니다. 회의에 참석하는 인원은 전략기획팀 제2부속실 1팀 팀장 성문후 차장, 성화 건설 사장 비서실 소속의 정문철 과장 그리고….”
“스톱, 스톱.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너 미쳤어!”
듣고 있던 성문후 차장이 앉아 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평상시의 부드럽고 차분한 태도는 어디 갔는지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고주희는 설명을 중단하기는 했지만 녹음 앱은 끄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들고 성문후 차장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상황에서 성문후 차장은 고주희 과장이 눈에 담긴 자신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성문후는 이 계통에서 일한 지 10년씩이나 되는 경력에 마녀라는 별명까지 있는 고주희가 자신이 언성 좀 높였다고 그 행동에 겁을 먹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고주희가 자신과 그녀 사이의 직위와 신분 차이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판단했다.
백을 믿고 겁을 상실한 것은 아닌 것 같으니 상황 파악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전부 나가.”
여전히 고주희를 노려보며 한 그의 말에 회의실에 있던 1팀 직원들이 망설임 없이 일사불란하게 자리에서 회의실을 밖으로 향했다.
성화 건설의 최지용 과장은 자신도 나가야 하는 것인가 잠시 고민했지만, 버텼다.
성문후 차장이 자신보다 상급자이기는 하고, 그룹 내의 위상과 지위도 비교할 수 없이 높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는 지금 건설 사장인 정문철을 대신해서 여기 있는 것이었다.
성문후 차장의 반말 명령에 움직이면 그 자신의 체면이 아니라 정문철 사장의 얼굴에 똥칠하게 되는 꼴이니 움직여서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의 판단이 맞았다.
성문후 차장과 고주희 과장도 그가 나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부하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자 성문후 차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고 과장, 이 미친 짓을 설명해봐.”
“전 사내에서 미리 지정된 인물이 아닌 인물이 최민영 씨나 강소진 양에 대해서 언급하면 그에 관한 모든 대화를 기록하여 보고해야 합니다. 이건 사모님이 요청하신 것으로, 회장님이 직접 공식 업무로 확정 지시하신 겁니다. 설사 회장님 혈족이 상대라고 예외 없습니다.”
성문후 차장은 깜짝 놀랐다.
“뭐? 나도 그 둘에 관한 이야기는 언뜻 들어봤지만 끽해야 유성준 이사 하룻밤 상대와 우연히 태어난 사생아인 것이 전부잖아? 유성준 이사는 이 모녀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한다고 들었는데?”
“전 회장님과 사모님이 말씀해 주시지 않을 것은 추측할 생각 없습니다. 그저 따를 뿐입니다.”
고주희의 대답에 성문후는 다시 자리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고주희의 말은 얼핏 들으면 성문후에 감히 회장님과 사모님의 결정에 다른 생각하는 것이냐고 묻는 도발로 생각될 수 있었지만, 성문후는 고주희가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고주희의 공격적인 어투와 달리 몸짓이나 표정, 눈빛에서 성문후가 이 일을 언급하는 것을 만류하는 의지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성문후는 어렵지 않게 고주희의 본의를 추측해 낼 수 있었다.
‘지뢰밭이라는 뜻이군. 들어가면 뒤진다.’
아까 참여 인원을 기록할 때도 부하 직원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건 확실히 배려였다.
‘잡부 출신이 운 좋게 윗분 눈에 띄어 벼락출세했는데도 주변 평판이 나쁘지 않은 이유가 있군.’
성문후는 그룹의 차기 최고 경영진의 일 좌를 노리는 처지에서 크게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을 막아준 고주희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음. 어떤 일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최 과장님 이야기를 좀 들어봐 주었으면 해. 자네도 들어보면 알겠지만, 이 일에 대해서는 회장님이나 사모님도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거야, 아마.”
성문후가 살짝 뒤로 빠지며 일을 최지용 과장에게 떠밀었다.
단지 완전히 발을 빼지는 않았다.
여기서 발을 완전히 빼는 것은 그것 나름대로 최지용을 파견한 정문철 사장과 그의 아내이자 회장님의 장녀인 유민영 여사의 원한을 사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씨발.’
지목당한 최지용 과장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래도 그룹 차원에서 관리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에 혹시나 하고 찔러본 것이었는데, 여기서 유성준 이사나 유성준 이사의 부친인 유정명 유통 사장이나 모친인 유인영 장학 재단 이사장도 아닌 회장님과 사모님이 거론될 것이라는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뒤로 뺄 상황이 아니었다.
성문후 차장이 그룹의 절대자인 회장님과 사모님이 언급되었음에도 발을 빼지 못했던 것처럼, 최지용 과장은 여기서 회장님과 사모님 눈치를 보려다가 자신의 직속 상사인 정문철 사장과 그의 아내 유민영 여사의 손에 뒤지는 일이 발생하는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지용 과장은 충격 요법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는 미리 준비했던, 하지만 성문후 차장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사진 한 장을 고주희 과장에게 내밀었다.
“용건을 말씀드리기 전에 우선 이걸 좀 봐주시겠습니까? 물론 보신 다음 어디서 이야기하시는 일은 없으셔야 할 물건입니다.”
고주희는 별로 큰 생각 없이 최지용 과장이 내미는 서류철을 받아서 열었다.
그리고 그 안의 사진을 보고는 얼어붙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