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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피가 흐른다 – 04
돼지 체(彘)자는 굉장히 낯선 한자이다.
사람들은 돼지를 뜻하는 한자는 돼지 돈(豚)자를 쓰고, 간혹 서유기의 저팔계(豬八戒)의 경우처럼 돼지 저(猪)자를 쓰는 경우는 있지만, 돼지 체(彘)자는 글자만 있을 뿐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렇게 된 이유가 있다.
중국 전한의 창업군주인 고제 유방의 정처인 고황후 여씨가 남편 사후, 남편이 가장 총애하던 첩이자 후계를 두고 싸우던 정적 척부인의 아들을 독살한 후, 그에 이어 척부인에게 잔혹한 보복을 했다.
고황후 여씨는 척부인을 산 채로 팔과 다리를 자르고, 눈을 뽑은 후, 혀를 잘라 벙어리로 만든 다음 귀에 유황을 부어 귀머거리로 만들어서 화장실 오물통을 겸하는 돼지 우리에 던져 넣었다고 한다.
그걸 인체(人彘)라고 불렀다.
척부인이 고제 유방에 생전에 워낙 말도 안되는 일을 여럿 벌렸고, 고황후 여씨의 속도 많이 뒤집었던지라, 사람에 따라서는 고황후 여씨가 나름 그럴만 했다고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최소한 여씨의 아들이자, 2대 황제인 혜제는 아니었다. 혜제는 어머니가 이복동생을 독살한 것에 이어, 죽은 이복동생의 어머니이자 아버지 첩인 척부인을 그꼴로 만든 광경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황제 업무를 때려 치고 술독에 빠져 살며 시름시름 앓다가 23살에 죽었다.
그 후 한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이 인체(人彘)사건을 너무 끔찍하게 여겨서, 아예 돼지 체(彘)라는 글자를 혐오하고 사용을 기피하는 바람에, 춘추전국 시대에만 해도 사용되던 글자가 한나라 이후 완전 사어가 되어 버릴 정도였다.
인체(人彘)는 그만큼 끔직한 형벌이었고, 그 꼴을 당한채로 당장 죽지 못하고 살아서 그 고통을 계속 느껴야 한다는 점에서, 인류사의 수많은 고문이나 형벌 중에서도 최악으로 꼽히는 잔혹한 처벌이었다.
유진은 정동후를 그걸로 만들었다.
척추 신경을 잘라서 목 아래의 감각을 모두 차단한 후에 무릎 위와 팔꿈치 위를 잘랐다. 팔과 다리 윗부분을 약간이나마 남겨둔 것은 그것이 더 잔혹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눈은 불로 달군 송곳으로 안구 안쪽까지 깊숙이 박아넣어서 안구는 물론 안구와 연결된 시신경까지 알뜰하게 지져버렸다. 실명된 눈을 전자 안구 따위로 되살려내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귀도 고막만 작살낸 것이 아니라 달팽이관까지 확실하게 끝장낸다. 마찬가지로 달군 쇠로 지져 버렸으니 현대 의학으로 복구할 방법은 없었다.
말을 하지 못하게 혀만 자른 것이 아니라 성대도 도려내고, 나중에 인공 성대 시술 따위 못하게 부분 신경도 확실히 다 부쉈다.
그 옛날 여후는 거기까지는 기술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똥오줌으로 가득찬 돼지우리에서 일부로 고통받으라는 뜻인지 후각은 안 건드렸지만, 유진은 후각도 알뜰하게 작살냈다. 화상은 신경 조직의 회복을 원천 차단하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적출 시술을 했다. 자지는 건드리지 않았다.
아무리 나쁜 놈이라고 해도 그건 어쩌면 같은 남자끼리의 마지막 배려였다. 대신 고환은 확실하고 철저하게 제거했다. 어디 미리 보관 처리해둔 정자라도 있거나, 아니면 인간 복제라도 성공하지 않은 이상 절대로 후손을 볼 수 없는 꼴로 만들어 주었다.
유진은 그렇게 정동후를 인체(人彘)로 만든 다음, 죽어서 토막 난 나머지 놈들의 시체를 담은 거대한 폐기물 봉투와 함께 인근에서 시공 중인 아파트 단지 지하 주차장에 버려두었다.
거긴 정동후의 부친, 정문철이 사장으로 있는 성화 건설의 직영 건설 현장이었다.
최지용 과장이 내민 사진은 산채로 구조되어 병원으로 옮겨진 정동후의 사진이었다.
많이 가려지기는 했지만, 사지와 코, 귀가 잘려있다는 것만으로도 누가 봐도 끔직한 사진이었다.
사전에 설명을 들어서 대충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었던 성문후 차장도 실제 사진의 모습에 침을 삼켰다.
최지용 과장이 사진을 설명했다.
“정문철 사장님과 유민영 여사님의 둘째 아드님이자 회장님과 사모님의 외손자이기도 정동후 도련님의 사진입니다. 이틀 전에 고양시에 있는 저희 성화건설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그 모습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사진으로 알 수 있듯이 팔다리가 잘린 것은 물론이고, 성대와 각막과 고막까지 파손되고 혀와 코가 잘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최지용은 이 부분은 설명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그래도 자신보다 훨씬 더 깊은 부분에서 그룹 일가의 비밀을 다루는 두 사람을 믿고 입을 열었다.
“고환이 잘려 나갔습니다. 성기는 비교적 멀쩡하지만, 고자가 된 겁니다.”
사진 속에 보이는 모습은 꽤 참혹했지만, 고주희는 정동후가 당한 꼬락서니에 별로 동정심이 생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우선은 사진으로 보고 말로만 듣는 것만으로 실제 정동후가 당한 참혹함이 별로 실감 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정동후의 그룹 내 입지와 고주희 본인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정동후의 개망나니짓은 관련 실무진들 사이에서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모친인 유민영 여사가 부친인 회장님이나 모친인 사모님에게 둘째 아들 이야기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룹의 관련 실무진들에게 경고를 날리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돌린 것은 유명했다.
그래봤자 소용없어서 회장님이나 사모님은 이미 손자로 여기지 않겠다고 암묵적으로 알리신 상황이었다.
즉, 정동후의 부친인 정문철 사장과 그 아내인 유민영 여사가 장악한 건설이나 그 계파 쪽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회장님 직속인 제2부속실, 그중에도 유인영 성화 장학 재단의 계파에 속하는 3팀장 산하이자 본인 자신도 성화 장학 재단 장학생 출신인 고주희에게 정동후는 그냥 소가 닭을 보는듯한 사이의 남이었다.
거기에 고주희는 그 옛날, 정동후가 본인이 담당하던 유성준 이사의 연인에게 저지른 패륜에 엮여서 그 책임을 지고 패가망신 할뻔 했던 아찔한 과거도 있었다.
그에게 나쁜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반가우면 반가웠지, 안타까울 사이가 아니었다.
고주희는 슬쩍 성문후 차장의 눈치를 봤다.
성문후 차장도 별로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닌 눈치였다.
고주희는 회장님 직계가 이런 꼴이 되었음에도 그룹 차원에서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회장님이 정동후를 손자로 여기지 않겠다고 하셨던 것이 단지 괘씸한 손자 잠시 혼내기 위한 말뿐인 이야기가 아니라 본인의 확고한 의지라는 증거였다.
회장님과 사모님이 나서시지 않는다면 그녀가 굽힐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당당하게 물었다.
“안타까운 일이군요. 그런데 왜 이 일에 왜 차민영 씨 이름이 나온 것인가요?”
최지용 과장은 그룹 본사가 아닌 건설사 비서실의 일개 과장에 불과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대기업에 주력 계열사 중의 하나이자 험하고 지저분하기로 유명한 1군 건설사에서 더러운 일을 하며 과장까지 단 능력자이기도 했다.
그는 고주희 과장의 태도를 통해서 그녀가 이 일에 별로 협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그가 해야 할 이야기를 생각하면 무척 난감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본인이 가진 카드가 더 있는 것도 아니니 할 수 있는 것은 말로라도 지르는 것밖에 없었다.
그는 선을 좀 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동후 도련님이 이 모습으로 발견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핸드폰이 연결되었던 지점이 파주의 모 전원주택단지 부근이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동후 도련님을 그곳으로 납치하거나 혹은 동후 도련님이 직접 그곳을 방문한 이유를 찾기 위해 조사하다가 차민영 씨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드리기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저희 생각에 동후 도련님이 성준 도련님의 아이를 낳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룹에서 그 여자에게 붙인 경호 인력이 동후 도련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 일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아시겠지만, 두 분 관계가 좀 그렇지 않습니까?”
최지용 과장은 진지하게 이번 사태가 차민영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건 유진이 생각하지 못한 또 하나의 실수였다.
유진은 정동후의 행적을 쫓는 사람들이 있다면 당연히 장화진, 성무연 모녀를 찾지 차민영이 연관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차민영에게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 정동후가 필요 이상으로 완벽하게 장화진과 성무연에 대한 방문도 숨긴 탓에 생긴 일이었다.
하지만 진실과 상관없이 최지용 과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측에서는 어이가 없는 이야기였다.
“풋.”
고주희 과장 입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같이 듣고 있던 성문후 차장도 헛웃음을 지었다.
최지용 과장의 이야기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정동후가 본인의 사이코패스 미치광이 성격에 어울리는 패륜 짓을 해보려고 했다가,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유성준 이사의 라인에 속하는 그룹 직원에게 테러당한 것 아니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 애초에 그 둘의 관계가 박살난 것도 정동후가 유성준에게 저지른 잘못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걸 또 정동후가 비슷한 짓을 저지르려 했다는 것은, 그런 꼴을 당했다고 할 말이 없을 일이었다.
그걸 최지용 과장은 정동후와 유성준 모두에게 도련님이라고 호칭을 붙여서 그들이 모두 회장의 손자라는 것을 강조하고, 너희들이 회장 손자에게 손을 댄 것 아니냐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고주희의 생각에 이건 죽고 싶어서 자기가 들어갈 무덤을 직접 파는 수준의 자살 시도였다.
고령이시기는 하지만 신체 강건하시고 아직 후계 구도조차 고려하지 않고 계시는 회장님이 계시는데, 2대도 아니고 3대에서 후계 싸움으로 상대를 공격했다고 주장한다?
이건 단지 유성준 이사를 관리하는 고주희 자신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제2부속실 아니 전략기획실 전체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고주희는 전략기획실장인 이준혁 전무의 귀에 이 이야기가 들어가면, 이 전무가 이 병신 같은 과장은 물론이고, 유민영 여사와 정문철 사장,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계파 전부를 갈아 마시려고 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맡은 업무 탓에 공식 직책만 전무일 뿐, 회장님 은퇴하실 때 같이 은퇴해야 할 나이인 이준혁 전무의 나이는 사장단 평균보다 높았고, 실제 위상도 어지간한 계열사 사장이 허리를 숙일 정도였다.
당장 옆에서 듣고 있던 성문후 차장조차 유성준 이사의 모친인 유인영 재단 이사장과 경쟁 관계인 다른 계파 소속인데도 표정이 슬슬 바뀌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점을 유민영 여사나 정문철 사장, 그리고 그들 계파의 핵심 인원들이 병신도 아닌데 이런 점을 모를 리가 없었다.
즉, 이건 계파의 의견이 아니라 최지용 과장 개인의 의견이라는 것이었다.
‘이 새끼 미친 건가?’
고주희는 하도 황당해서 대답도 없이 최지용 과장을 바라보다가, 그가 차분한 표정과 달리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직 완연한 여름도 아닌데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고 있는 회의실이 더워서 그런 것은 아닐 터였다.
그 꼬락서니에 갑자기 든 생각이 있었고, 그래서 물었다.
“그 전에 하나 묻죠.”
“말씀하십시오.”
“제가 알기로 정동후 님에게는 유민영 여사님이 직접 붙인 경호 인원이 24시간 상시로 붙어 있다고 알고 있는데, 문제가 발생한 시간에 그 인원들은 뭘 하고 있었나요?”
아니꼽지만 그래도 회장님 외손주이니 이름에 님자 붙여서 던진 고주희의 질문에, 최지용 과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고주희는 그를 압박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최지용은 잠시 성문후 차장을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하는 눈짓을 보냈지만, 이미 잔뜩 화가 나 있는 성문후 차장은 오히려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룹 후계 경쟁 라인에서 유민영 여사나 유인영 재단 이사장이 아닌 다른 라인에 서 있는 성문후는 그래도 회장님 딸인 유민영 여사의 체면과 그룹 법조, 정치 라인 인맥 관리의 핵심인 정문철 사장의 안면을 봐서 협조해 주고 있었지만, 그런 배려심도 최지용의 헛소리에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최지용 과장은 갈등했지만 결국 털어놓았다.
거짓말을 하거나 얼버무리지 않았다.
법원이나 의회에서 위증하면 가볍게 처벌받고 말지만, 회사에서 업무 중에 거짓말하다가 들키면, 그것도 그룹의 어두운 일을 하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다 걸리면 본인 하나만이 아니라 가족과 일가친척 전부가 패가망신 당하는 수가 있었다.
“경호원들은 동후 도련님의 지시로 부산에 내려가 이었습니다. 동후 도련님에게 자신이 부산에 있었던 것으로 위장하라고 명령받았다고 자백했습니다.”
고주희는 원래 감시역도 겸하는 경호원들이 왜 정동후의 명령에 따랐는지는 묻지 않았다.
정동후의 개망나니 짓을 옆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던, 그리고 종종 그 뒤처리도 맡아야 했던 주변 인물들이 정동후의 협박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말 안 들으면 자신들도 그런 꼴을 당할 수 있는데 어떻게 감히 거역하겠는가?
그리고 왜 최지용 과장이 여기에 와서 이런 무리수를 두고 있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동후의 개 막장 짓을 커버 쳐주고 있던, 그래서 이 일에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고, 범인을 못 잡았을 때 정문철 사장과 유민영 여사의 분노를 받아내야 할 인물이 눈앞의 이 깡패처럼 생긴 과장이라는 것은 너무 뻔했다.
그렇다고 최지용 과장에게 같은 회사원으로 동정이나 안타까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아무리 더럽고 비밀스러운 일을 하는 처지이어도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
고주희도 여자였고, 어머니에 관한 비참한 기억을 가진 고아이기도 했다.
정동후 같은 인간이나 그런 인간을 돕는 인간을 같은 인간으로 여길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실제로 해줄 말이 없기도 했다.
최근 유진의 존재 때문에 차민영에 대한 감시 및 관리 인원을 대폭 늘리기는 했지만, 그중에 무력을 행사할 정도의 인력은 없었다.
더군다나 집중 감시 중이었기 때문에 정동후가 차민영과 접촉한 적이 없다는 것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래서 깔끔하게 정리하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자신의 고민거리가 생각난 것은.
‘어, 잠깐?’
바로 직전에 있었던 회의 내용이 생각났다.
고주희는 정체불명에 위험해 보이는, 그렇지만 어떻게 찔러볼 구석이 없는 유진을 아예 그냥 물리적으로 배제해 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지만, 자신들에게 그럴만한 권한과 자원이 없고 후환이 두렵다는 부하 직원들의 의견에 생각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이 아닌 최지용 과장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설은 그 특성상 물리적인 방식으로 어두운 일을 처리하는 인원을 꽤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는 것에 거리낌도 없는 편이었다.
무엇보다 문제가 된다고 해도 치명타를 입게 되는 것은 건설과 건설의 사장인 정문철 사장 그리고 그 아내인 유민영 여사였다.
고주희의 생각에 그녀와 부하 직원들이 고민하던 방식으로 문제가 발생하면 회사 전체에 손해가 되기는 하겠지만, 그 책임이나 영향이 자신까지 내려올 것 같지는 않았다.
고주희 본인도 유진이라는 새끼 때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입장에서 이건 잘하면 일거양득 정도가 아니라 삼조 사조도 노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살짝 운을 띄웠다.
“제가 딱히 드릴 이야기가 없군요. 그쪽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차민영 씨가 집안에서 머무는 시간 외에는 거의 24시간 밀착 감시를 하고 있는데 정동후님과의 접촉은 없었습니다. 또 차민영 씨가 집에 머무는 동안 정동후님이 방문한 적도 없습니다. 이건 필요하면 공식 기록도 드릴 수 있습니다.”
고주희는 자신이 띄운 운을 눈앞의 인물이 받아먹을 수 있을까 살짝 걱정했는데, 확실히 백으로 과장을 단 것은 아닌지 놓치지 않았다.
“그건 차민영 씨가 집에 머물지 않는 동안 그 집은 감시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사건이 발생한 것이 언제쯤인가요?”
“5일 전 금요일로 추정됩니다.”
“그날 차민영 씨는 서울에서 야근했습니다.”
사실 차민영이 야근하는 것과 별개로 그녀의 집을 감시 및 경호는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그들에게 중요 인물은 차민영이 아니라 강소진이었기 때문에, 차민영에 집에 있을 때보다 없을 때 오히려 더 철저하게 관리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고주희는 고의로 그 부분은 언급하지 않았다.
최지용 과장의 오판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최근 그 집에 미국 국적에 신원 파악이 안 되는 위험인물이 있기는 하지만, 혹시 그와 접촉이 있었을지는 저희로서는 모릅니다.”
이건 좀 노골적이었다.
대화 당사자인 최지용 과장은 물론이고 옆에서 듣고 있던 성문후 과장조차 모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급한 최지용 과장은 수상쩍은 이 미끼를 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인물은 어떤 인물입니까?”
“모릅니다. 일단 미국인인 탓에 국내에서 뭔가를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미국 공공 데이터 베이스에서도 조회가 되지를 않아요. 가족도 친구도 전혀 없어 보이는 인물입니다. 미국 지사에서는 정보계통이나 군사 계통 경력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다시 한번 고의로 전직일 거라는 분위기를 풍겼다.
현재도 미국 정부에서 관리하는 현역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숨겼다. 배후의 VIP에 대해서는 아예 몰라서 언급할 수도 없었다.
“물론 이 인물이 관련이 있다는 의견은 아닙니다. 그저 차민영 씨와 달리 그 남자에 대한 부분은 확실하게 아니라고 확정해 말씀드릴 수 없다는 것뿐입니다. 제 의견을 묻는다면 감시 와중에 정동후 대리의 흔적은 전혀 없으므로 관련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정도면 거의 노골적으로 쥐약 친 치즈 수준의 이야기였다.
맛있어 보이기는 하겠지만 먹고 죽어도 우리 책임은 없다는 수준의 이야기에 최지용 과장은 속으로 잠시 이를 갈았다.
하지만 이건 현재까지 나온 것 중에 그나마 제일 쓸만한 이야기였다.
최지용은 고주희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이거라고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위험한 것이라서 나중에 후환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 살려면 방법이 없었다.
물론 대답을 그렇게 대놓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가요? 저희 생각과 달리 딱히 이번에 도련님의 사건은 그분과 관련은 없어 보이는군요. 알겠습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천만에요. 소속 회사는 달라도 한 그룹 이름 아래에서 일하는 다 같은 식구지 않습니까. 이 정도는 해 드려야죠.”
웃으며 대답하는 고주희의 태도는 딱 ‘내 얼굴에 침이라도 뱉지 않을래?’ 수준이었지만,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최지용 과장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나름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일어나서는 고주희와 성문후 차장에게 사의를 표하고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회의실을 떠났다.
고주희도 성문후 차장도 최지용 과장이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처지라는 것을 그걸로 새삼 다시 확인했다.
본사까지 회의하러 와서 용건만 간략하게 확인하고 떠나는 경우는 진짜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최지용 과장이 떠나자 성문후 차장이 입을 열었다.
“고 과장 무슨 생각이야?”
노골적으로 약을 친 미끼를 던지는 그녀의 행동이 성문후 차장으로서는 의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주희는 대답하는 대신 수첩에 빠르게 글씨를 흘려 썼다.
‘아직 녹음 중입니다.’
성문후는 그녀가 주는 수습 기회를 빠르게 잡았다.
“하긴 내가 알아야 할 일은 아니겠지. 알아서 처리하고 혹시 도움 필요하면 말하게.”
“감사합니다, 차장님.”
사실 고주희로서도 목숨을 건 일이었다.
이 녹음 내용은 2주 후 사모님에게 보고할 때 제출해야 할 내용이었고, 그녀는 자신이 벌인 일도 숨기거나 조작할 생각이 없었다.
고주희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사모님 눈에 든 이유는 그녀가 당장 죽어도 아무도 찾을 사람이 없다는 것과 설사 자신에게 불리한 것이라도 사소한 것조차 사모님에게 숨긴 적이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 일로 문제가 생기면 고주희 본인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고주희가 아무 생각 없이 지른 것은 아니었다.
유진이 진짜로 이 일과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니 건설에서 뭔가 열심히 파다가 문제가 생기면 생기는 대로 좋고, 문제가 생기지 않아도 그 과정에서 유진에 대해서 뭔가 조금이라도 더 나오겠다는 생각이었다.
고주희는 문제가 된 그날 차민영의 집에 드나들거나 방문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부하들의 보고서를 믿고 있었다.
차민영 본인이 집에 없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더 철저하게 감시했던 날이기 때문이었다.
고주희가 몰랐던 것은 들키지 않기 위해 주로 원거리에서 경호 및 감시를 진행하는 인원들이 그날 밤 유진이 몰래 빠져나간 것을 확인할 수 없었다는 것과 유진이 낮에 외출해서 이동하는 것까지 감시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웃한 다른 집을 방문하는 사람까지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고주희는 아무 생각 없이 그리고 아무 근거 없이 어쩌다가 보니 진실을 그대로 찔러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이 일이 어떻게 커질지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