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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87화 (87/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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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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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피가 흐른다 – 07

유진이 차민영이 취소하는 것을 깜박 잊은 문자를 받은 것은 오전 11시 무렵이었다.

소진이는 이미 유치원에 등교한 지 오래였고 유진은 식당에서 요리를 끝내고 영업 준비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생각지 못한 문자를 받은 유진은 곧바로 차민영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통화는 사서함으로 넘어갈 뿐이었다.

유진은 어쩐지 차민영이 위험하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그는 자신의 예감 중 본인에게 유리하게 느껴지는 예감은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끔찍한 실패로 끝난 첫 번째 탈출 시도에서도 좋은 일이 있을거라는 예감을 느꼈었던 때문이었다.

유진은 우선 고영은에게 부탁해서 그녀의 차로 소진이의 유치원으로 향했다.

차민영과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이 무척 기분 나쁘고 화가 나며 짜증도 났지만, 세계 최고의 메가시티 중 하나인 서울 한복판 어딘가에서 연락이 끊긴 차민영을 당장 어찌할 방법이 없으니 우선 챙길 수 있는 소진이부터 챙겨야 했다.

유진은 이 과정에서 처음으로 운전면허의 필요성을 아니 그전에 운전을 배울 필요성을 느꼈다.

유럽에서 차량 운전 교육은 청소년만 되어도 남녀 누구나 받는 것이지만 연구소에서는 고의로 유진과 실험체 들에 대한 교육에서 배제한 것 중의 하나였다.

지금까지는 대중교통이나 남이 운전해주는 편안함에 필요성을 못 느꼈는데, 이런 상황을 겪어 보니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본인이야 급하면 뛰면 그만인데, 보호할 사람이 있을 때 치명적이었다.

소진이를 안아 들고 차량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로 뛴다고 생각하면, 소진이가 그걸 감당해 낼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유치원의 소진이에게는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유치원에서는 유진이 소진이를 데리러 온 것에 의아해했고, 부모인 차민영과 연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진이를 내어주지 않으려 했다.

다행히 함께 가준 고영은이 소진이의 차순위 보호자로 유치원에 정식 등록되어 있어서 소진이를 조퇴시킬 수 있었다.

소진이는 유진이 풍기는 분위기에서 상황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왜 자신을 데리러 왔는지 묻지 않았다.

그냥 유진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고영은은 둘을 집으로 보냈다.

유진이 빠지면 식당 일이 좀 곤란하기는 하지만 유진 없다고 일이 안 될 정도는 아닌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유진이 식당 일에 신경을 전혀 쓰지 않는 태도를 보인 것이 두 번째 이유였으며, 유진의 표정과 분위기가 너무 흉흉해서 가까이에 두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든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평상시에 그렇게 까불거리고 맹랑한 소진이조차 입을 꾹 다물고 유진의 손만 꼭 잡고 있을 정도로 유진의 모습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유진은 집에서 소진이와 단둘이 되고 나서야 소진이가 겁먹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여전히 차민영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유진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에 전혀 익숙하지 못했다.

유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기름지고 달콤한 것 위주로 요리해서 소진이를 배불리 먹이고 낮잠을 재우는 것이었다.

소진이는 많이 불안한지 잠드는 순간까지도 유진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유진은 그것까지 짜증이 났다.

소진이가 불안해서 자기에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소진이가 자기에 집착할 정도로 불안하게 만든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그런 짜증과 분노는 차민영이 말한 책에서 찾은 그녀의 메시지를 보면서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까지 갔다.

한 여자의 사진과 그 여자의 이름과 직책, 그리고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면 소진이를 가장 먼저 챙기고 이 여자를 확인하는 것이 메시지의 전부였다.

사진은 고주희였다.

“성화, 성화, 성화.”

유진은 짜증나는 이 이름을 되뇌며 이를 갈았다.

정동후를 처리한 것은 도발이기는 했지만, 장화진과 성무연에게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또, 차민영이 미리 상황을 이야기 하기는 했지만, 갑자기 이렇게 차민영에게 공격이 들어오리라고도 생각 못했다.

사실 좀 더 명확하게 처리했어야 했는데, 여러 가지 걸리는 것이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외면하고 있었다.

성화를 외면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피.

유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의 시작은 유진이 연구소에 팔려 실험체가 되었던 부분이 아니었다.

유진은 연구소에서의 실험으로 초인이 된 것이 아니었다. 유진은 연구소에 팔려 가기 전부터 이미 초인이었다.

지금의 유진을 상징하는 불로불사의 재생력이나 괴력 그 외의 여러 능력은 물론 연구소에서의 실험으로 얻은 능력들이기는 하다. 하지만 유진은 애초에 역사상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그 실험들이 성공한 것 자체가 자신이 이미 초인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일의 시작은 연구소가 아니라 유진의 존재 그 자체였다.

유진은 생모의 자궁 안에 있었던 시절부터 이미 의식이 있었고, 그 시절의 기억은 자라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냥 지식이 습득되었다. 그리고 그 지식에는 그렇게 지식을 얻는 것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유진 자신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의식의 깊은 곳, 자기가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소유가 아니고 제어 또한 할 수 없는 의식의 깊은 곳에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유진에게 속삭이고는 했다.

속삭임 대부분은 알아들을 수 없는 무엇 인가였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인간의 언어에 가까운 것이었고, 그중에는 유진에게 특별히 다가오는 것들도 있었다.

- 넌 특별하다.

- 넌 고귀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별했던 그 말.

- 넌 인간이 아니다.

물론 그 속삭임을 모두 신뢰하지는 않았다. 지식은 속삭임과 같이 심연의 그 곳에서 나온 것이지만 분명히 알려주었다. 속삭임은 교활한 거짓말쟁이이며 유진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부분이 있었다.

심연도 속삭임도 그것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이해하지도 이해할수도 이해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심연과 그곳에 연결된 속삭임과 지식 모두 유진의 몸에 흐르는 피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는 것을.

이 피는 분명 생부와 생모에게서 물려 받은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면에서 유진은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하지는 않아도 상식의 범주 내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는 생모에 비해, 누가 봐도 특별해 보이는 생부의 혈통을.

그래서 피는 유진에게 증오의 대상이지만, 한편으로는 미지의 공포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래서 성화를 대하는 유진의 행동은 모순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건드리고 싶고, 도발하고 싶고, 보복하고 싶지만, 가능하면 깊이 연관되는 것은 최대한 늦추고 싶다라는 것이 유진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유진은 후회하고 있었다.

유진은 생각했다.

그 심연은 어차피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것이고, 아마도 영원히 자신과 함께 할 것이었다. 어차피 그 심연을 이해할 생각도 없었다.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지금 그건 그냥 우주 어딘가의 블랙홀 같은 것일 뿐이었다. 언젠가 이 우주의 종말을 가져올지도 모르지만, 지금 자신에게는 그냥 신기한 구경거리일뿐인 것이다.

이제 그걸 두려워하거나 꺼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 피 또한 마찬가지.

유진은 더 이상 미적거리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처음은 그냥 필요할 때 쉽게 상대할 섹스 상대와 그런 그녀에게 딸린 피보호자에 불과했을지 몰라도, 지금 유진에게 그녀들은 가족이었다.

이것이 세상을 불태워버릴 전쟁의 시작이 될지라도, 가만히 앉아서 차민영과 소진이를 버리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유진은 움직일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고민을 시작했다.

유진이 배운 전략 전술에 이 부분에 대해서 아주 명백한 구절이 있었다.

약한 군대가 자신의 거점을 굳건히 지키면 강한 적의 사격 표적이 되어 죽거나 생포되어 포로가 될 뿐이며, 그러지 않기 위해 게릴라전이 고안되었다는 구절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못 해보고 뒤지지 않으려면 이제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고주희의 사진을 보면서 고민하는 중이었다.

차민영이 말한 대로 이 여자부터 조져서 차민영의 상태를 확인할 것인가, 아니면 혼자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수인 금적금왕(擒賊擒)을 시도해서 성화의 진짜 지배자를 노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잘못되었을 것으로 걱정하던 차민영이, 그 본인이 지목한 위험 대상인 고주희를 데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집에 도착했다.

온갖 고뇌와 후회로 세상 전부를 불태워버리는 일조차 감당하겠다고 독하게 결심하고 움직일 결심을 했는데, 그 이유가 되는 존재가 목표가 되어야 할 존재와 장난처럼 투닥거리며 함께 돌아온 것이다.

그 꼴을 보며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분노와 결심은 뜨거운 태양 앞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고, 그 자리를 안도감도 허무함과 짜증이 채우기 시작했고, 그 감정들은 다시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분노로 변해갔다.

유진이 차민영을 만난 이래 그녀에게 가장 빡쳐 버린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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