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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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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피가 흐른다 – 08
‘뭐야? 이건 뭐 하는 괴물이야?’
고주희는 유진을 보며 기가 질려 있었다.
그냥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 뒷골은 서늘하고, 피부에는 닭살이 돋아오르며, 심장은 조여오고, 호흡이 어려웠다.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있을 수 없는 푸른 안광이 보이는 것 같았고, 마주 보고 있는 눈동자 외에 주변의 다른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침묵 속에서 시간이 조금 더 지나가자 머릿속에서 뭔가를 생각하기조차 어려웠다.
온몸은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덜덜 떨고 있었고, 사타구니에서는 소변이 살짝 새어 나왔다.
아마 조금만 더 그 상황이 계속되었으면 추하기 그지없을 꼴을 보이거나, 어딘가 망가져 버릴 수도 있었다.
그녀를 살린 것은 차민영의 한 마디였다.
“소진이는?”
고주희를 바라보던 유진의 눈동자가 살짝 옆으로 돌아 차민영을 향했다.
“점심 먹고 낮잠 중.”
“어떻게 데려왔어?”
“영은씨 차로. 유치원에서는 내가 소진을 데려가지 못하게 하려고 했는데, 같이 가준 영은 씨가 소진이 보호자로 등록되어서 있어서 간신히 데려올 수 있었지.”
“다행이네.”
“다행이기는 했지. 겁먹어서 입 꾹 다물고 내 손을 놓지 못하는 소진이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던 것을 빼면.”
“어, 그건.”
“그건?”
“그건 이 여자 때문이야. 이 여자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문자에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어.”
유진이 한마디 할 때마다 목소리가 줄어들던 차민영은 결국 유진의 압박에 옆에 있던 고주희를 팔아 버렸다.
차민영은 자신이 잘못한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유진의 압박이 너무 거셌고, 실제로 이 일은 고주희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나간 말이었다.
유진의 시선이 정면에서 사라진 덕에 간신히 숨 좀 돌리고 있던 고주희가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아니 지르려고 했다.
“난 이 일에 아무 상관 없!”
고주희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진의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그리고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당황하던 고주희는 서늘한 유진의 목소리에 얼른 입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주희에게는 아주 다행스럽게도 다시 마주친 유진의 눈은 조금 전보다는 견딜만했다.
그리고 더 다행스럽게도 그 눈은 금방 그녀를 떠나 다시 옆으로 향했다.
이쯤에서 고주희는 자신이 소변을 지려서 팬티를 적셨다는 것을 인식했다.
다행히 오늘 그녀는 패션이 아니라 실용성 위주의 충분히 두꺼운 면 팬티를 입고 있었고, 치마도 달라붙은 H형 스커트가 아니라 약간 길이가 있는 A형 스커트였던 덕분에 겉으로 추태를 보이는 창피는 면할 수 있었다.
물론 냄새가 좀 불안했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씨발, 산에서 호랑이랑 눈 마주치면 그것만으로도 병을 앓고 죽는 사람도 있다는 옛이야기가 이해가 가네.’
이런 생각을 할 정도의 여유까지 조금 챙길 수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 유진과 차민영은 문답을 이어갔다.
“우선 소진이 챙기고 저 여자 잡아서 족치라는 이 문자를 보낸 이유가 뭐지?”
“우선 오늘 방문한 빌딩 지하 주차장에서 나를 납치하려다가 중단한 것으로 보이는 상황이 있었어. 처음에는 그냥 의혹 정도였는데, 확인하려고 하니까 감시 카메라가 고장 났다고 거짓말을 하더라고. 내가 그걸 구축한 사람 중의 한 명이고, 조금 전까지 그거 관리하던 사람들과 회의 중이었는데.”
“그런데?”
“납치될 뻔한 건물이 성화 그룹 계열사인 성화 통신이 입주해 있는 성화 그룹 건물이었고, 그런 거짓말은 성화에서 어지간히 힘 있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데, 마침 이 여자가 얼마 전에 당신이 소진이 옆에 있는 것 가지고 시비 걸었었어. 그래서 능력도 있으며, 동기도 있는 이 여자가 당연히 범인일 것으로 생각했어. 그리고 나를 노렸으면 당연하게 소진이도 위험하고, 당신도 위험하겠지만, 당신이야 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차민영은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미루는 사람은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업무적인 면에서 부하직원이나 팀 동료의 실수를 대신 떠맡아 해결하는 사람이고, 그 인망의 힘으로 어렵고 힘들고 비참한 상황에서도 직원들이 그녀를 믿고 따르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자기 사람이 아니라 적이라면?
그것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타당한 이유도 있다면?
그녀는 흔히 말하는 정치질로 자기 적을 타격하는 일도 마다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자기의 여성으로서의 매력까지 동원하여 그것을 아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것도 능숙했으며, 그런 일에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 여자 데려왔어. 뭔가 아는 것이 분명한데 계속 모르는 척 하더라구. 그래서 당신 생각했어. 파리에서 날 죽이려던 흑인을 상대로 살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제발 죽여달라고 말하라고 하던 그 고문을.”
듣고 있던 고주희가 입을 떡 벌렸다.
고주희는 자신이 거부하는 차민영을 교묘하게 압박해서 집안에 들어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는 차민영은 남편에게 가스라이팅 당해서 주체 의식도 없이 아무에게나 다리를 벌리고 좆물을 받아내는 천박하고 의지력 없는 여자였고, 그래서 자신이 차민영을 속이는 일은 당연해도 설마 차민영이 자신을 속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사실 이 부분은 고주희의 조사 부족이었다.
고주희가 차민영을 맡을 무렵 이미 차민영의 회사가 박살이 난 다음이었기 때문에 회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최근에 차민영이 다시 일으켜 세운 회사는 고주희 본인이 알게 모르게 백업해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우습게 여겨서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다.
차민영은 개인인 여자로서는 분명 많이 문제가 있었지만, 기업가로서는 혈관에 피 대신 얼음물이 흐른다는 소리를 듣는 야망이 넘치는 철혈의 독재자였다.
부부로서는 남편의 노예나 다를 바 없는 시절에도, 반대로 사회생활에서는 부부 공동 소유의 회사에서 회사의 자금과 인사, 실무까지 모두 장악하고 사장인 남편을 외부 접대나 담당하는 허수아비 술상무 정도로 만들었던 여자였다.
물론 회사가 잘 나갔던 것 중에는 그 술상무 남편이 끝내주는 인맥으로 끝내주게 계약을 따와 주었던 것이 컸지만, 그것도 다 차민영이 그렇게 따온 계약들을 완벽한 작업으로 완료시키지 않았으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었다.
지금 회사에서도 창업 과정에서 자금을 댄 동업자인 사장이 고주희가 박아 놓은 사람이라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고, 사장이 눈치채지 못하게 회사를 장악하고 언제라도 사장을 축출하거나 나머지 인원 데리고 새 회사를 만들 수 있게 준비도 해둔 상태였다.
지금껏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것은 이런 사회적, 경제적 포위망을 뚫어 버리면 물리적 위력 행사를 할 것이 분명하고, 그건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차민영은 한국의 대기업이 두렵고 무소불위한 조직이며, 그곳에서 어두운 일 하는 사람들이 특별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유진을 감당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차민영은 고주희보다 훨씬 더 유진에게 겁을 먹고 있었고, 그런 탓에 고주희처럼 속옷도 더럽힌 상태였지만, 아주 오랫동안 별러왔던 고주희를 드디어 엿 먹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유진의 눈빛을 견뎌 내었다.
물론 유진은 그 정도로 그냥 넘어가 주지 않았다.
애초에 유진이 지금 차민영에게 화가 난 부분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전화 안 받은 이유는? 저 여자 때문이라고? 저 여자가 전화 못 받게 한 건가?”
“어, 그건.”
“그건?”
변명하려는 차민영을 바라보는 유진의 눈빛이 더 차가워졌다.
차민영은 확실하게 위기의식을 느꼈다.
물론 자신과 유진은 가족이다.
일그러지고 망가진 시작이었지만, 자신이 지금 유진을 가족으로 여기는 것은 확실하고, 유진이 자기를 아끼는 것도 확실하며, 유진이 소진이를 사랑하는 것도 분명했다.
하지만 차민영은 아직도 파리 뒷골목의 그 더러운 지하보도에서 처음 유진과 눈이 마주쳤을 때를, 호텔 방에서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을 바라보던 유진의 눈빛을 잊은 적이 없었다.
지금의 눈빛은 그때와 확실히 다르지만, 그렇다고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차민영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말투도 싹 바꿔서 싹싹 빌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여보. 용서해주세요.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유진이 약간 움찔했다.
그녀의 지금 행동이 완전히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친다기 보다는 약간의 가식이 섞여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여보라는 호칭이 그를 약간 흔들었다.
그 호칭을 처음 듣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전의 그녀가 여보라고 외쳤을 때는 섹스의 와중에 그냥 의미 없이 터져 나온 감탄성이나 신음소리 혹은 말버릇 같은 것이었다.
그때는 오히려 자신과 섹스하면서 죽은 남편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살짝 거슬리기도 했었다.
지금처럼 멀쩡한 정신으로 유진에게 직접적으로 호칭해서 사용한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 차민영의 노림수이기는 했다.
차민영은 유진이 자신과 소진이와의 이 가족 관계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언젠가는 자신이 유진에게 협박당해서 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 아내나 연인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로 여보라고 불러 주려고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걸 이 기회에 써먹은 것이었다.
유진은 완전히 넘어가지는 않았다.
“말로만 넘어가지는 않을 거지만, 이 건은 이따 이야기하기로 하지.”
그래도 살짝 넘어가서 이제 시선을 차민영이 아닌 고주희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할 말 많아 보이는 그녀를 향해 나직하게 경고했다.
“묻기 전에 말해두지. 민영 씨의 말이 좀 과하기는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야. 난 당신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 수 있는 고문 기술도 가지고 있고, 누군가 내게 거짓말을 하면 그걸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도 있지. 그러니 대답은 조심스럽게 해줬으면 좋겠군. 물론 시험해보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대가야 내가 아니라 당신이 치르는 것이니까.”
고주희는 울고 싶었다.
보통 어떤 사람이 개폼을 잡으면서 나에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건 그냥 겉멋만 든 허풍쟁이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고주희는 학문적인 분석을 통해 사람의 거짓말을 판별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런 학문을 공부한 것도 아닌데 그냥 본능으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사람을 모시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유진의 말이 전혀 허풍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사실 거짓말을 구별한다는 것은 반쯤은 사실이고, 반쯤은 거짓이다.
본능적으로 상대방의 거짓말을 잘 구별하는 편이기는 했지만, 이 분야에 특별한 능력을 각성한 것은 아니라서 전문가나 능숙한 거짓말쟁이의 교묘한 거짓까지 완벽하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남들보다 훨씬 더 예민한 것은 확실했고, 지금 고주희처럼 유진에게 압도당한 대상을 상대로는 적중률이 훨씬 높았다.
물론 고주희도 처음부터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에, 약간 반항을 시도해 보기는 했다.
“내가 여기서 잘못되면 그건 범죄예요. 우리 회사가 경찰에 압력을 가할 거고, 경찰은 물론이고 검찰과 법원까지 동원되어서 일사천리로 당신을 감옥에 처넣을 거예요. 감당할 수 있나요?”
유진은 아주 담담하게 대답했다.
“우선 경찰이 아니라 검찰이나 정보국이 나서도 여기에 당신이 있었다는 증가는 찾지 못할 거야. 둘째, 이 나라 정부가 나를 압박하면 나는 미국을 동원할 거야. 이 나라가 고작 당신 하나 때문에 미국과의 외교적 충돌을 감수할 거라고는 믿을 수 없군.”
뒷이야기는 살짝 허풍이었다.
하지만 하려고 들면 하지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어지간하면 정말 하고 싶지 않고, 해서는 안 될 일일 뿐이었다.
유진은 자신의 서류상 보호자인 앤 헤이즈를 언급한 것이었지만, 고주희는 그걸 유진이 미국 정부 소속의 첩보원이나 군인 신분이라고 생각했다.
고주희는 굴복했다.
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가 정말 그럴 것 같다고 느꼈다.
그녀는 성화라는 회사에 자기 목숨보다 충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목숨이 걸려 있으니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정말 죽기 직전의 상황에는 살기 위해 기꺼이 입을 열 수 있었다.
회사가 그런다고 자기를 죽일 것도 아닌 이야기라면 더욱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 오전 회의에서 성화건설 최지용 과장과의 일과, 왜 차민영 납치 시도를 그들이 했을지 의심하는지 모두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그 와중에 자신이 이 눈앞의 남자를 그들에게 먹이로 던졌다는 것을 숨길 수 있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삶기 위한 발악이었다.
차민영은 정동후라는 듣도 보도 못한 병신 때문에 엄하게 자신이 피해를 볼 뻔 했다는 것에 황당함을 느꼈지만, 유진은 장화진, 성무연 모녀를 미끼로 던졌더니 엄하게 차민영과 소진이가 피해를 볼 뻔했다는 것에 조금 당황했다.
고주희는 살아서 차민영의 집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유진이 이 상황에서 자신이 누군가 쳐 죽였을 때, 그 일이 정동후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성화 건설이 자신들을 먼저 공격해서 반격했다는 것을 확인할 증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현관을 나서고, 마당을 지나, 계단을 내려와 대문까지 벗어나, 기다리고 있던 부하 직원의 차에 탄 다음에야 고주희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흘러나온 소변은 기어코 팬티를 넘어 치마에까지 얼룩을 만든 다음이었고, 블라우스 상의는 그녀가 흘린 땀에 젖어 찰싹 달라붙은 상태였다.
고주희는 오늘 마침 자신의 차를 운전한 직원이 여자라는 것에 정말 정말 감사했다.
“미진 씨. 미안한데 가까운 아울렛부터 좀 가줄래요. 오다가 하나 본 것 같은데.”
“네, 과장님.”
엉망인 그녀를 보며 경호를 담당하는 부하직원은 차마 뭐라고 묻지도 못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 사이 고주희는 핸드폰을 들었다.
“기환 씨. 소진 아가씨 경호팀에 절대로 가까이 가지 말고 최대한 원거리에서 일하라고 전달해요. 지금 보다 훨씬 조심하고. 특히 그 유진이라는 새끼에게는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해. 절대로.”
고주희는 어쩐지 조만간 오늘 만났던 최지용 과장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운이 없었으면 자신은 장례식도 없이 어딘가에 암매장당했으리라는 것도.
‘미친년. 미친년. 남자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은 너무 잘 알지만, 사이코패스 변태 남편에 이어 어디서 저런 미치광이를!’
그녀는 차가 아울렛에 도착할 때까지 속으로 계속 차민영을 욕했다.
무엇보다 그녀를 가장 암담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2주 후에는 사모님에게 유진에 대해서 보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