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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89화 (89/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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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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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피가 흐른다 – 09

불청객 겸 덫에 걸린 사냥감 고주희가 목숨 부지해서 도망간 이후에도 유진의 분위기는 별로 풀어지지 않았다.

유진은 고주희가 떠난 이후에도 여전히 차민영을 압박하고 있었다.

차민영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유진의 인간미 없는 모습에 굉장히 심하게 주눅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차민영이 고주희처럼 실수로 속옷을 적신 것은 차라리 그녀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녀의 상태를 눈치챈 유진이 여유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아. 당신 씻고 싶겠군. 이 이야기는 씻고 나서 다시 하지.”

한숨과 함께 나온 유진의 말에 차민영은 유진이 자신의 실금을 알아챘다는 것에 약간 창피함을 느꼈지만, 그보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사실 생리혈을 흘리며 항문으로 섹스를 하고, 오르가즘에 경련하며 소변도 뿜어냈던 처지에 유진 앞에서 새삼 창피를 느끼지도 않았다.

차민영은 얼른 2층 욕실로 도망쳤다.

차민영이 가까운 1층이 아닌 2층으로 향한 것은 갈아입을 옷이나 욕실의 크기 등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유진에게서 좀 떨어지고 싶은 본능이 가장 컸다.

그런 이유로 급히 씻고 얼른 다시 내려갈 마음도 들지 않았다.

차민영은 욕조에 들어가 물을 받았다.

천천히 차오르기 시작한 따뜻한 물이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몸을 조금씩 녹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후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억울해, 씨이.”

차민영은 몸을 무릎을 세운 후 다리를 껴안은 자세로 몸을 한껏 웅크리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은 알지만, 위험했던 것도 진짜였다.

그럼 화만 내는 것이 아니라 걱정도 해주고 안심도 시켜주고 달래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집에다 학원 간다고 거짓말하고 노래방에 놀러 갔다가, 동네 질 나쁜 언니들에게 걸려서 뺨도 맞고 돈도 뜯기고 울면서 집에 들어간 고등학생 시절에도 거짓말한 것은 잘못했지만 그래도 우리 딸 괜찮아라면서 달래주던 엄마, 아빠가 생각나서 더 서러웠다.

“엄마, 아빠.”

차민영은 이제는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그 대성통곡에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9할에, 자신이 이렇게 대성통곡까지 하면 유진이 올라와서 달래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 1할 정도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유진이 아무 반응이 없자 서러움만 커져서 더 크게 울게 되었다.

그녀는 유진이 그녀가 철없이 사고 치던 시절의 비슷한 나이인 올해 고작 스무 살짜리라는 것은, 거기에 우는 여자 달래줘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상한 성격이 절대 아니라는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도 울음이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렇게 납치 미수와 유진의 압박이 만든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으니까.

유진과는 다르게.

2층에 들려오는 차민영의 움을 소리를 듣고 있던 유진의 기분은 점점 더 나락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차민영이 달래주러 오지 않는 유진에게 실망하고 있다면, 유진은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이 자신이 그녀를 지켜줘야 할 자신이 오히려 그녀를 위험하게 만들었다는 것 때문이라는 생각에 몹시 매우 많이 심란한 상태였다.

사실 언젠가 차민영이나 소진이가 자신 때문에 위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예상했던 일이었다.

차민영이 가족이 되고, 사랑스러운 소진이와 함께 하는 행복한 시간이 시작될 무렵부터 유진은 이 행복이 영원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비록 강하고 초월적인 존재라고는 해도, 모든 것을 포기할 마음까지 먹는다면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라고 해도, 세상과 싸워 세상을 부수지 않고 이길 수는 없으며, 더더구나 혼자 몸으로 세상 전부와 싸우면서 가족까지 지킬 방법이 없다는 것은 모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유진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이 그것일지도 몰랐다.

인체 실험이 일상인 비밀 조직의 불법 연구소에 갇혀서 매일 매일 주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보면서 자랐다. 첫사랑에게 도구로 이용당하고,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반항했다가 가축처럼 도축이나 당하는 동료들을 겪으면서 가장 먼저 포기하는 법부터 배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중한 것일수록 가장 먼저 잃게 되고, 지키려고 해봐야 남는 것은 상처뿐이라는 잔혹한 진실과 함께 말이다.

그래서 유진은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만약의 경우 누군가 차민영과 소진이를 이용해서 자신을 이용하거나 협박하려 하는 때가 오면 둘을 지키기 위해 굴복하는 대신, 둘이 희생되더라도 대신 복수하겠다고.

그리고 자신은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오늘 이전까지는 말이다.

“씨발, 씨발, 씨발.”

유진은 계속해서 욕설을 중얼거리며, 차민영이 비록 최악의 경우를 피해서 안전하게 돌아왔다고 해도 싸움 자체는 멈출 수 없고, 멈춰서도 안 된다고 결심했다.

이제 이게 반격인지, 선제공격인지, 예방전쟁인지, 침략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성화가 정동후를 통해서 자신을 먼저 공격한 것인가, 자신이 정동후를 그 꼴로 만들어서 성화를 먼저 공격한 것인가도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성화에게 가지고 있고, 가질 수 밖에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와 감정조차도 지금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유진에게 중요한 것은 차민영과 소진이에 대한 위험이 실제 상황이 되었다는 것과 처음 생각과 달리 자신이 그 두 사람의 위험을 도저히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제 싸워야 했다.

유진은 어떻게 싸울지에 대해서 고민을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유진이 그것에 대해서 정확히 인식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진에 대한 교육은 굉장히 상반된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사회화라는 이름의 노예화 내지는 가축화에 중점을 둔 교육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지배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제왕학이었다.

덕분에 유진은 노예나 다를 바 없는 실험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원래대로라면 노예에게 절대로 가르치지 않을 인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철학은 물론이고 전쟁을 위한 전략과 전술, 개인 전투를 위한 여러 가지 전투법 같은 것도 교육받을 수 있었다.

이 교육에는 나름 UE나 연구소의 역사와 정체성과 파벌 갈등 등 많은 복잡한 이야기가 숨어 있지만 유진에게 그런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유진에게 중요한 것은 그때 받은 교육 중에 지금 같은 상황에서 자신의 판단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는가였다.

그리고 전략과 전술 그리고 사회나 경제, 국가나 정치까지 고려한 다양한 지식을 검토하고 내린 결론은 결국 하나였다.

선수필승(先手必勝).

싸움이 벌어졌을 때 손해를 최소화하려면 싸움 장소를 내 땅, 내 가족 주변이 아니라 적의 땅, 적 가족 주변에서 벌이는 것이 최고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선공 그것도 기습이 필요했다.

그런데 문제는 기습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동 수단이 필요했다.

‘결국 다시 그 건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기동력은 전쟁사에서 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고, 현대 사회 그중에서도 대한민국에서 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기동력의 정점은 결국 차량 혹은 바이크였다.

유진은 운전면허 아니 운전 기술 자체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했고, 굳이 연구소가 자신에게 운전을 안 가르친 이유도 새삼 되새겼다.

차민영이 한참을 울면서 속에 쌓여 있는 설움과 슬픔, 분노와 공포 등을 정리하고 1층으로 내려온 것은 거의 두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 사이 낮잠 자던 소진이가 깨어났기 때문에 유진과 차민영은 이 일과 관련해서 더 대화를 나누거나 하지는 못했다.

“엄마!”

“오빠!”

차민영이나 유진이 따로 움직이기라도 하려고 하면 소진이가 기를 쓰고 붙잡고 같이 있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소진이는 그냥 유치원 끝나기 전에 조퇴한 것과 유진이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어서 겁을 먹은 것이 전부일 뿐인데, 유진뿐만 아니라 엄마인 차민영에게도 지나치게 집착하고 매달리고 있었다.

마치 엄마가 무슨 나쁜 일을 당할 뻔한 것인지 알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유진은 사실 소진이가 겁을 먹었다는 것 그 자체에만 신경 쓸 뿐 원인은 별로 생각하지 않았고, 차민영은 소진이가 유진에게 겁을 먹어서 그렇다고 착각해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유진에게 겁을 먹었으면, 유진을 멀리해야 하는데 유진에게도 착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부분은 생각하지 못했다.

차민영은 오랜만에 어리광 부리는 딸보다 더 신경 쓰이는 일을 겪고 있는 탓이기도 했다.

엄마인 차민영과 유진을 양손에 꼭 붙잡고 온갖 TV 프로그램을 같이 보게 만든 소진이가 잘 시간이 되었을 때, 차민영은 유진에게 은근슬쩍 신호를 보냈다.

꽤 크게 성욕을 느끼고 유진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목욕과 휴식, 식사 그리고 소진이와 함께 한 TV 시청 등으로 설움과 두려움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가라앉자, 그 공간으로 치고 들어온 것은 성욕이었다.

딱히 그녀가 섹스를 밝히는 여자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건 심리적인 문제였다.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기는 했지만, 짧은 시간 동안 그녀가 정말 최악의 상황을 고려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거기에 유진에게 받은 압박과 두려움까지 합쳐지자 그녀의 생존본능이 자극받고 그에 대한 연쇄 반응으로 자신을 지켜줄 가장 가까운 사람인 유진에 대한 심리적 의존도가 올라갔으며, 파리에서의 첫날밤 이래 유진과의 관계는 섹스를 우선시하는 기조가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성욕이 자극받은 것이었다.

원래 부부나 연인 중에는 서로 싸우면 섹스를 통해서 화를 풀고 화해하는 사람도 많다. 그 정도로 섹스는 연인과 부부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최고의 수단 중 하나였다.

애초에 섹스를 사랑을 나눈다라도 표현하는 이유가 그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차민영의 구애를 유진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그녀가 돌려서 표현한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과 이미 장화진 성무연 모녀로 어느 정도 성욕이 충족되고 있던 탓이었다.

이 일은 차민영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함께 사는 짧은 기간 동안 두 사람의 섹스는 유진이 꽤 발정 난 분위기로 차민영을 유혹하고, 차민영이 그걸 적당히 받아주는 관계였다.

유진은 언제나 늘 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차민영이 허락만 하면 망설이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런 관계였던 둘 사이에서 차민영이 먼저 유혹까지 했는데 유진에게 거부당한 것이 이것이 처음이었다.

유진이 자신과 소진이를 진짜 가족처럼 여기는 것과 별개로, 유진이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최고의 가치는 섹스 파트너라는 부분일 것으로 생각하던 차민영으로서는 자신을 거부하는 유진의 모습에 충격받는 것이 당연했다.

혹시 유진이 이제 자신에게 매력을 못 느끼는 것인지 쓸데없는 걱정도 할 정도였다.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건가?’

유진이 계속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소진이 유치원조차 당분간 쉬게 하고, 그녀의 업무도 가능한 재택으로 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에 그렇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진이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챙겨주고, 소진이와 놀아주고, 자신과도 섹스는 아니어도 가벼운 키스나 스킨쉽을 주고받는 태도가 화가 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왜 나랑 섹스 안하냐고 물어보는 것은 아무리 그녀라도 도저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차민영은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차민영이 유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본질적으로 두 사람의 환경 차이였다.

매일 매일 누군가의 결정과 변덕으로 몸이 갈라지고, 주변에서 사람이 가축처럼 도축 당하던 유진은 안전을 위협하는 권력자라는 존재의 악의에 과하도록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 자란 차민영은 실제적인 위험을 겪어온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는 위기 상황에 대해서 불감증을 앓고 있었다.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지만, 그것은 불행한 교통사고였다.

남편도 황당하게 죽었고, 한때는 그 일에 음모가 있는 것이 아닌지 고민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그건 그냥 사고일 뿐이었다.

차민영의 안전에 대한 공포는 오히려 교통사고 쪽에 있었고, 그것이 그녀가 일반적인 그녀 나이의 여자들이 타는 것과는 전혀 다른 튼튼하고 안전 위주의 차종들을 타는 이유였다.

그에 비해 성화 그룹의 위협은 그저 위협만으로 그칠 뿐 한 번도 실제로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성화의 일에 대해서 위기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 위기와 두려움에 실제적인 대응은 거의 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리는 식으로 반응하게 되었다.

북한이 지랄해도 금방 일상으로 돌아가는 한국인들처럼 성화가 지랄해도 금방 일상으로 복귀하는 차민영과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공산 베트남 해군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지 모른다는 미친놈의 편집증 같은 망상에 빠져 베트남에서 전쟁에 참여한 그 옛날 미국처럼 편집증적인 유진 중에서 누가 옳고 그른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였다.

자동차 운전면허와 대형 오토바이 운전면허 취득을 위한 초단기 교육과정 등록과 그에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던 유진에게 어느 날 갑자기 방문자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유진 헤이즈 맞습니까? 살인 사건 수사를 위해 경찰서로 동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찰 신분증을 내밀고는 영장도 미란다 고지도 상황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유진을 임의 동행하려는 형사 두 명을 보며 유진은 씨익 웃었다.

기왕 벌어질 전쟁이라면 기습선공으로 시작된 전쟁보다, 기습선공에 당해서 반격을 시작한 전쟁이 더 정당해 보이고 더 악랄한 수단 방법을 동원해도 되는 명분을 갖는 법이니까.

마치 진주만 공습의 보복으로 군인과 민간인 구별하지 않고 도쿄 채로 태워버린 미국이나 런던 공습의 보복으로 역시 군인과 민간인 구별하지 않고 드레스덴을 무차별 폭격해버린 영국처럼 말이다.

유진은 누구 먼저 불태워버릴까를 고민하며 거절하지 않고 그들을 따라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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