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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90화 (90/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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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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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피가 흐른다 – 10

정동후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인간인가와 별개로, 그의 어머니인 유민영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진짜였다.

유민영은 정동후가 인체(人彘)가 되어 발견된 이래, 눈물 펑펑 쏟으며 24시간 아들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남편인 정문철이 아들이 그 꼴이 된 것을 보로 하루정도 미쳐 날뛰다가 냉정하게 회사 업무에 복귀한 것과 큰형인 정동성이 예의상 얼굴 정도만 들이밀었다가 발길을 끊어버리는 것과는 달랐다.

성화 본사가 그렇듯이 성화건설도 사장은 정문철이지만, 실제 소유주는 유민영이었다.

유명선 회장은 외손자의 친 패륜에 분노에서 큰 딸의 지위는 빼앗았어도, 이미 물려 주었던 주식이나 재산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유민영이 정동후에게 매달려 있으니, 그녀의 눈치를 봐야 하는 성화 건설 비서실은 정동후가 인류의 역사가 기록하는 최악의 꼬라지가 된 일을 해결하는 것에 전력투구해야 했다.

일부 인원은 정동후를 치료할 가능성을 찾기 위해 국내외의 저명한 의료기관의 의사들과 접촉하거나, 아직 상용화되지는 않았지만, 가능성이 보이는 실험적 의학 논문 자료들을 살피고,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다면 불법적이거나 비인도적인 사유로 금지된 방법까지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인원들이 정동후를 이렇게 만든 범인을 찾기 위해 원한이 있거나, 가능성이 있는 인원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둘 다 별로 성과가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도 할 수 없어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비서실의 직원들은 자신들이 정동후를 포기하는 순간, 그들의 지배자인 사장과 회사의 실질적인 주인인 사장의 아내가 자신들을 병신이 된 자기 아들과 비슷한 꼴로 만들어 버릴지 모른다는 공포에 젖어 있었다.

중세 시대의 어지간한 폭군도 하지 못할 정도의 일이었지만, 성화 건설 사장 정문철과 그의 아내이자 성화 그룹 회장의 장녀인 유민영은 그러고도 남을 인간들이라는 것이 사내에서 두 사람의 진짜 얼굴을 아는 직원들의 공통적인 여론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첫 번째 대상이 될 인물이 누구일지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최지용 과장이 유진이 본사 고주희 과장이 던진 매우 위험한 미끼라는 것을 알면서도 물 수밖에 없고, 윤현수 과장과 강민기 대리 같은 비서실 내 그의 팀원들도 거기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진실이건 거짓이건, 안전하건 위험하건 상관없이, 상대가 설마 회장님이 숨겨둔 서자 같은 핵폭탄 일지라도 지금 당장 살기 위해서는 그 외에 대안이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누가 봐도 함정이 분명해 보이는 위험한 미끼를 아무 생각 없이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나름 유진을 조사해봤다.

그리고 고주희와 그녀의 팀과 비슷한 결론을 훨씬 빨리 그리고 더 정확하게 내릴 수 있었다.

동원된 인원과 조사의 집중도가 고주희의 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미국 지사 등에서 고주희의 팀이 이미 조사해둔 자료를 쉽게 받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결론은 비슷하지만 다른 방향성을 그들에게 제시했다.

고주희의 팀이 유진에게서 보이는 위험성에 건드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최지용 과장과 그의 비서실 팀은 유진에게 보이는 위험성에 그가 진짜로 범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최소한 진범이 아니어도 정문철 사장이나 유민영 여사에게 범인이라고 위조하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

이후에 벌어질 국제적인 문제 따위는 그들이 지금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작전을 시작해 버렸다.

“이상하지.”

“네, 이상하네요.”

전직 경찰로 성화 건설의 위장 계열사인 청주보안 소속인 김병철은 위장 경찰 신분증을 내민 것만으로 순순히 동행에 응한 유진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해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경찰 파트너로 위장한 동료, 전직 깡패 조우식도 그의 의견에 동의하며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새끼 미국인이라면서요? 당연히 영장과 자신의 법적 권리, 변호사 같은 이야기 튀어나올 거로 생각했는데요.”

“그러게, 말이야.”

워낙 미국 드라마와 국내에서 만들어진 경찰이나 검찰 소재 드라마에서도 사골 우리듯 나온 이야기라서, 이제는 한국 내에서도 어지간한 사람들은 경찰에게 다 한번씩 하는 소리였다.

미국과 달리 미란다 고지 안 했다고 체포가 무효화 되는 일 같은 것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한국이지만 말이다.

당연히 그렇게 나올 거로 생각했기 때문에 대응 방침도 세워둔 상태였다.

대한민국 사법기관의 전가의 보도 임의동행과 긴급체포를 위장할 생각이었다.

경찰관이 수사를 위해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용의자가 경찰관의 조사에 요구에 동의하면 체포 영장이나 미란다 원칙 고지 없이 용의자를 보호실에 유치하고 조사할 수 있다는 권한이 임의동행이고, 중범죄 피의자가 증거인멸과 도주 우려가 있어서 체포 영장을 기다릴 시간이 없는 경우 검사나 사법경찰이 피의자를 48시간 동안 임의 구속할 수 있는 권한이 긴급체포이다.

둘 다 법적으로 굉장히 문제가 있는 방법이고,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정까지 받은 방법들이지만 경찰과 검찰이 여전히 관습적으로 써먹고 있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한국을 잘 모르는 외국인에게 한국의 법이라고 써먹기 정말 좋은 방법이었다.

그들은 우선 적으로 임의동행을 요청해 유진의 동의를 받아보도록 하고, 당연하게 유진이 이를 거부하면 긴급체포라는 이름으로 유진을 구속할 생각이었다.

혹시 두 사람만으로 부족할 경우를 대비해 근처의 벤에 6명의 팀원이 추가로 대기 중인 상황이었다.

혹시나 목격자가 있을 경우를 대비해 경찰 신분증은 김병철의 경찰 시절 후배 것을 위조한 것이었고, 문의가 들어가면 후배가 대응하기로 약속도 되어 있었다.

오늘은 본인이 맞는 것처럼 연기하고 추후에 문제가 되면 알리바이를 제기하고 도용되었다고 주장한다는 시나리오였다.

후배에게 약간 문제가 될 소지는 있지만, 그래봐야 감봉이나 약간의 경징계 정도일 것이고, 설혹 경찰에서 잘린다고 해도 손해가 안될 정도로 보상을 책정해서 입을 막을 대비도 되어 있었다.

그렇게 나름 철저하게 준비한 작전에서 상대가 탐색을 위해 가볍게 던진 수에 그냥 넘어온 상황이니 오히려 떨떠름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그들은 못 갈아입고 나오겠다고 들어간 유진을 조용히 기다렸다.

“진, 무슨 생각이야! 왜 그냥 따라가! 저 사람들이 아무리 경찰이어도 당신을 그렇게 데려갈 권한은 없어!”

함께 경찰로 위장한 김병철 등을 만나고, 그들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코웃음을 치던 차민영은 유진이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겠다고 말하는 바람에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

최근에 있었던 성화 그룹과의 충돌을 생각하고, 대한민국 대기업의 힘을 생각하면 경찰이라고 해도 100%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1층에는 소진이 들을까 봐 입 다물고 있다가, 2층까지 따라와서 시작한 그녀의 잔소리에 유진은 살짝 머리를 긁었다.

유진은 그녀도 눈치를 챘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어서 설명을 시작했다.

“경찰 아니야.”

“응?”

“그 사람들 경찰 아니라고.”

“어, 어떻게 그걸 알아?”

“경기도 파주에 충청북도 청주의 경찰이 왜 지랄을 떨어. 그 인간이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려고 했지만, 그걸 모를 수야 없지. 거기에 기억을 잠깐 되돌리면, 원래 경찰은 자기 소속과 직위 이름을 밝히는 것이 원칙인데 그 인간들은 그냥 경찰입니다라고만 했다는 것도 기억할 수 있을걸? 내 느낌에 전직 경찰일지도 모르기는 하지만 지금은 100% 사칭이야.”

차민영은 경악했다.

“아니 그걸 알면!”

“그걸 아니까. 경찰 사칭까지 해서 지랄하는 새끼들이 내가 안 따라가면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 당신은 모르겠지만 그 새끼 중 하나에서 화약 냄새도 나더라. 나야 어디서 어떻게 싸워도 문제없지만 여기서 싸움이 나면 당신이랑 소진이가 위험해.”

차민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유진을 믿기는 하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유진이 한국에 와서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하지만 파리에서는 그녀의 기억에 아주 선명한 흔적을 남겨주었던 물건들을 꺼내 들기 전까지는 그랬다.

“어? 여보, 그걸?”

놀라는 그녀에게 유진이 씨익 웃어 보여줬다.

“옆집에 가 있어. 혹시 부를만한 지인 있으면 부르고. 별일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 여럿이 같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겠지. 상황 바뀌면 전화 할테니까 전화기 꼭 챙기고. 전처럼 안 받으면 화낼거야.”

차민영은 어째서인지 이제 더 이상 상황이 전혀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놀리는 듯한 유진의 이야기가 더 신경 쓰였다.

“흥!”

콧바람을 일으키는 그녀의 태도에 귀여움을 느낀 유진이 살짝 키스했다.

그리고 마지막 심술을 부렸다.

“소진이에게는 당신이 설명하고.”

차민영이 진짜로 당황했다.

그녀는 거의 분리불안장애 수준으로 유진에게 집착하고 있는 딸을 달랠 생각에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유진은 차민영이 연락되지 않던 그날의 일에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였고, 그중에서 특히 겁먹은 소진이를 말없이 달래야 하던 식은땀 나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 기회에 한 번 더 차민영에게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새겨줄 생각이었다.

“어, 잠깐!”

유진은 붙잡는 차민영을 외면하고 밖으로 향했다.

당황해서 쫓아오는 차민영과 자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진이를 애써 외면하고 집을 나선 유진은 기다리고 있던 가짜 경찰들을 향해 말했다.

“준비 다 했습니다, 가시죠. 형사님들.”

김병철과 조우식은 유진을 자신들의 차 뒷좌석에 태웠다.

그리고 운전을 조우식에게 맞기고, 뒤 자석의 유진 옆에 앉은 김병철은 다리를 꼬고 느긋하게 앉은 유진을 보고는 문제점을 깨달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긴급체포로 수갑을 차고 몸수색까지 한 다음에 뒷자리에 태워졌어야 할 유진이 몸수색을 전혀 받지 않은 채로 왜라는 생각이 드는 정장을 갖춰 입고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너무 수월하게 상황이 진행되는 탓에, 원래대로라면 꼭 해야 할 절차가 건너뛰어져 버린 것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유진의 검은색 정장 겨드랑이가 약간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는 꼴이, 어쩐지 굉장히 익숙하고 위험한 느낌을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래도 혹시?’

김병철은 등에서 식은땀 흐르는 긴장감과 불길함에 고민했다.

허리 뒷 춤에 꽂아둔 토가레프 권총으로 자꾸 손을 가져가고 싶은 그런 긴장감과 불길함이었다.

무엇보다 가끔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유진이 지어 보이는 미소가 서늘하고 두렵게 느껴졌다.

‘이런 눈빛을 내가 언제 봤더라?’

김병철은 아주 예전에 동료가 체포했던 연쇄살인마와 아주 짧은 시간 마주치면서 보았던 그 눈빛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건 사람이 사람을 사람이 아닌 무엇인가로 여기는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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