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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93화 (93/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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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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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피가 흐른다 – 13

“이게 무슨 소리죠? 이거 총소리죠? 총 쏜 거예요? 총을 쓰면 뒤처리는 어떻게 해요!”

바깥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동석하고 있는 인물 중에 유일한 여성인 성조연 대리가 호들갑을 떨었다.

“닥치고 조용히 해. 씨발년아”

강민기 대리가 그런 성조연 대리에게 버럭 욕설을 질렀다.

기가 막힌 성조연은 그런 강민기의 언사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뭐라고 한마디만 하면 그냥 대가리를 후려쳐 버리겠다는 의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표정에 겁먹고 입을 다물었다.

같은 대리라고는 해도 로열패밀리의 핵심인 유민영 여사의 심복인 성조연 대리와 비서실의 흔해 빠진 대리 중의 하나인 강민기의 처지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평소 성조연은 같은 대리에 나이도 훨씬 연상인 강민기를 자기 부하처럼 부리고는 했으며, 강민기도 그런 성조연에게 불만 한번 표하지 않고 언제나 고분고분했었다.

그런 강민기가 자신에게 쌍욕을 박으며 여차하면 두들겨 패겠다는 몸짓까지 보이고 있으니 성조연은 거의 패닉상태였다.

그런 성조연에 비해 강민기는 성조연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따위는 관심 없었다.

강민기는 현역으로 군대에 입대해서 최전방 부대에서 북한과의 교전, 탈영병과 교전, 총기 사고로 동기가 사망하는 등의 좆같은 군 생활을 고루 겪어 보았다. 그건 강민기에게 현대인치고는 꽤 희귀할 정도의 생존본능을 만들어냈고, 지금 강민기의 그 생존본능이 최고조로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직장 생활의 정치질 따위 고려할 상황이 아니었다.

강민기는 오늘 업무의 실무 최고 책임자이자, 전문가인 청주 보안 차무석 실장에게 물었다.

“실장님, 이거 우리 쪽에서 쓴 거 아니죠?”

차무석이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 애들이었다면 많아야 두어 발 정도로 끝났겠죠. 그리고 지금쯤이면 당장 달려들어 와서 큰일났습니다라고 외치고 있을 겁니다.”

“씨발.”

강민기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차무석 실장은 전혀 기분 나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사실 차무석 실장도 외치고 싶었다.

- 씨발, 좆됐다! 라고.

차무석은 부하들에게 총기 몇 개 나눠주고, 본인도 총에다가 여분의 탄창까지 챙겨서 오기는 했지만, 이 물건들이 실제로 사용될 리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냥 한국 액션영화를 보면 졸라 뻥 친다고 비웃던 애들이 상대가 수상한 미국 놈이라는 이야기에, 전직 스파이나 전직 특수부대원 혹은 전직 킬러가 나와서 수백 명 썰어버리는 할리우드 영화를 떠올리면서 떨떠름해 하는 꼴을 보고는 반쯤은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또 반쯤은 사기진작 차원에서 나눠준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총이 실제로 쓰이고, 자신도 그 총에 목숨줄을 걸어야 하는 상황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씨발, 이게 얼마만이지?’

차무석은 육군 부사관으로 근무하면서 권총 사격도 나름 해본 적이 있지만 그건 이제 정말 오래전 일이었다.

설마 다시 총을 쓸 일이, 그것도 누구 겁주거나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실제 교전을 위해 쓸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당연히 최근 10여 년 동안 제대로 사격 훈련을 해본 적도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실탄 사격장이라도 좀 가는건데.’

실제로 총 좀 쏴보자는 부하들 의견을 묵살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다가 총에 맛 들여서 실제로 현장에서 쏘는 놈이 생길지도 몰라서 못 하게 막은 건데, 지금 당하는 꼴을 생각하니 후회가 되었다.

그래도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별로 쓸 일도 없을 것 같은데, 졸라게 빡세어서 열심히 욕 했던 그 훈련들이 잊히지 않고 몸에 남아 있었다.

차무석은 우선 책상을 세워 벽을 만든 다음 그 뒤에 몸을 엄폐하고, 꺼내든 총의 총구는 하나뿐인 창고 문을 향해 고정했다.

두 부하 직원에게도 총을 꺼내게 한 다음 적당한 위치를 잡아 주었다.

문으로 들어서는 상대에게 3방향에서 총을 난사할 수 있는, 그리고 상대가 한 번에 반격하기는 어려운 위치를 잡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강민기와 성조연에게 손짓했다.

“두 분은 뒤쪽에 피해 있으십시오.”

차무석의 말이 떨어지자 강민기는 성조연의 손목을 잡고 창고의 뒤쪽에 쌓여 있는 대리석 타일 박스 뒤로 움직였다.

성조연은 자기 손목을 잡는 강민기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심각한 분위기와 굳어 있는 강민기의 표정에 찍소리도 못하고 그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지금부터 숨소리도 내지마. 뒤지고 싶지 않으면.”

성조연은 강민기의 거친 모습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폭력적인 모습에 겁먹은 것과 박력 있는 모습에 반한 것이 섞여 있는 그야말로 흔들다리 효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사실 큰 의미는 없었다.

그들이 주인공이었다면 이건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의 불타는 로맨스가 시작되는 부분이었겠지만, 그들은 이 일에서 주인공이 아니라 엑스트라였다.

차무석 실장과 그 부하 두 명이 손에 토가레프를 들고 창고 문을 조준하고 있고, 강민기와 성조연이 긴장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긴장하고 있는 그 순간, 갑자기 굉음과 함께 문이 아니라 옆쪽 벽이 터져나갔다.

쾅!

놀란 그들이 본능적으로 굉음이 터져 나온 곳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보게 된 것은 먼지 구덩이에서 선명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는 한 자루 권총이었다.

그리고.

탕! 탕! 탕! 탕! 탕! 탕!

권총은 다시 한번 6번에 걸쳐 불을 뿜어 내었다.

“꺅!”

성조연은 입도 벙긋하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새된 비명을 질렀다.

강민기는 그런 성조연의 입을 틀어막을 생각도 못 했다.

강민기의 눈앞에 눈에 할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이 슬로비디오로 재생되는 것처럼 현실감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차무석 실장과 그의 두 부하 직원들의 등과 옆구리에서 똑같이 두 개씩의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셋 모두 핏줄기가 솟구치는 반대 방향으로 나동그라졌고, 둘은 권총을 쥔 상태로 쓰러졌지만, 하나는 권총을 놓쳤고 그 권총은 허공으로 던져졌다.

그리고 허공으로 던져진 총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보지 못한 사람 하나가 갑자기 나타나 총을 받아 쥐었다.

총을 쥔 상대가 슬라이드를 뒤로 젖히고 탄창을 꺼내 장탄 수를 확인하더니 탄창을 다시 끼고 재장전했다.

그리고 총구를 아래로 향한 다음 무심하게 손가락을 당겼다.

탕! 탕! 탕!

총구에서 다시 세 번의 불꽃이 뿜어져 나왔고, 차무석 실장과 그 두 부하 직원 모두의 머리에 구멍이 하나씩 추가로 생겨났다.

“어? 어? 어?”

성조연의 입에서 연달아 의문사가 튀어나왔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장면이었고, 바로 직전까지 자신과 대화를 나누던 지인이 죽었지만, 그녀는 지금의 상황을 전혀 현실로 느끼지 못했다.

상상도 못 할 상황에 인지부조화에 걸려 버린 성조연과 달리 그래도 그녀보다는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무엇보다 군대 시절에 총으로 죽어 나가는 사람 여럿 본 기억이 있는 강민기는 조금 더 제대로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상대의 시선이 자신들을 향했을 때 해야 할 말과 행동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강민기는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살려주세요, 비무장입니다!”

유진은 지금까지 자신이 쏴 죽인 인간들과는 조금 결이 다른 두 남녀를 차분하게 관찰했다.

일단 양손을 번쩍 들며 외친 남자는 설마 무장하고 있더라고 그 두 손이 공격을 위해 움직이기 전에 쏴 죽이거나 패 죽일 자신이 있었다.

그 옆에 얼이 빠져 있는 것 같은 여자는 조금 수상쩍기는 하지만 당장 쏴 죽일 필요까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유진은 총을 든 손을 까닥하는 것으로 두 사람에게 신호를 보냈다.

강민기는 그 신호를 재까닥 알아듣고 총구가 움직인 방향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서 울상을 짓기만 할뿐 실제로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 꼬라지에 유진이 살짝 인상을 찌푸린 다음에야 강민기는 허겁지겁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움직였다.

다행히 유진이 가리킨 곳은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쪽이 아니라 유진이 조금 전 뚫고 나온 벽 쪽이었기 때문에 강민기는 네발로 기면서 먼지 외에 피를 묻히는 꼴은 피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눈치를 보며 움직인 강민기에 비해 성조연은 멍하니 유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아직 인지부조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래서 뭔가를 판단하거나 행동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유진은 그런 그녀를 당장 말 안 듣는다고 쏴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사정을 헤아려 동정을 베풀거나 하지도 않았다.

유진은 그녀에게 다가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잡아 당겼다.

“꺄아악!”

성조연이 비명을 질렀다.

눈앞의 상황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도 고통은 인식되었다.

머리카락이 뜯겨 나갈 것 같은 강한 고통에 성조연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유진의 손을 움켜잡았다.

유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를 질질 끌고 나와 강민기 옆으로 집어 던졌다.

“아악!”

성조연은 다시 한번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고, 강민기가 그런 그녀를 부축해서 일으켜 앉혔다.

정신을 차린 성조연은 다시 한번 강민기의 새로운 모습에 두근거렸지만, 그녀를 동정하거나 돕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닌 강민기는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었다.

군 생활을 통해 강민기가 얻은 상식 중 하나는 옆에 있는 동기나 후임 놈이 병신 짓 하는 걸 내 일 아니라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자기 잘못이 없어도 선임에게 연대 책임으로 박살 날 수 있고, 최악으로는 그 일로 생기는 문제에 자신이 애꿎게 말려 들어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는 성조연과 달리 강민기는 아무 거리낌이나 망설임 없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사람 대가리에 확인 사살까지 하는 미친놈이 눈앞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때는, 자신이 아니라도 눈에 거슬리는 짓을 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상식적인 개념 정도는 머리에 박혀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유진이 짧게 물었다.

“이름, 소속.”

강민기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강민기, 성화건설 비서실 대리입니다. 이 여자는 성조연 씨. 저랑 같이 성화건설 비서실 대리입니다.”

유진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표는 내지 않았다.

대신 이 상황을 자기 계획대로 진행 시키기 위해 약간의 연기력을 발휘했다.

“샐러리맨이라고? 샐러리맨이 왜 킬러들과 함께 있는 거지?”

“킬러요?”

강민기는 절대로 말대꾸나 질문 같은 거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그래. 킬러.”

이어진 대답에 강민기는 자신도 모르게 죽어 나자빠진 차무석 실장을 힐끔 바라보았다.

이마에 구멍이 뚫려 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 있는 그 얼굴을 보자 심장이 떨려왔지만, 그래도 그가 킬러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가는 좀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잠시 고민해보니 킬러라는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가 속한 청주 보안은 명색이야 경호와 경비 업무를 주로 하는 보안 회사지만 그 본질은 용역 깡패이고, 실제로 청부 폭력으로 죽은 사람도 여럿 있으니 킬러가 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그렇게 강민기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사이, 어차피 그에게 대답을 기대했던 것도 아닌 유진은 시나리오의 다음 단계로 들어갔다.

“그렇지, 성화건설이라고 했지. 너희. 당연한 일이겠군.”

강민기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상대가 성화 건설 직원이라면 킬러와 같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 킬러들을 아무 감정 없이 확인 사살까지 한 인간이 자신도 똑같이 쏴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다행히 다음에 듣기 된 소리가 총소리는 아니었다.

“핸드폰.”

“네?”

“당신 핸드폰. 보안 풀고.”

말하면서 총구를 다시 까닥거리는 유진의 모습에 강민기는 벌벌 떨며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영화로 본 것은 많아서 총 든 사람 앞에서 함부로 주머니에 손 넣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움직였고,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지문을 인식시킨 다음 유진을 향해 내밀었다.

유진은 왼손으로 핸드폰을 받아서 든 다음 익숙한 손놀림으로 기억하고 있는 번호를 눌렀다.

무미건조한 리듬의 신호음이 한참 가다가 신호가 끊겨버렸다.

통화 거절이었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지만, 유진은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고, 다시 한번 통화 거절을 당했다.

유진은 조금 짜증이 나는 것을 느끼며 세 번째로 번호를 눌러야 했다.

이번에도 안 받으면 이 여자도 죽여버려야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2번이나 통화 거절을 해 놓고 3번 만에 받은 사람치고는 꽤 무난한 목소리였지만, 짜증이 난 유진은 부드럽게 통화를 할 생각이 없었다.

“고주희 과장인가? 나다. 설마 내 목소리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어? 고과장 씨발 년이 여기서 왜 나와!’

유진의 기분에 따라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강민기와 달리 아직 상황인식이 부족한, 그래서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하고 있던 성조연은 지금 자신에게 닥친 상황보다, 유진이 자신이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고주희와 통화를 하는 것에 더 기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그 놀람이 당사자인 고주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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