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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94화 (94/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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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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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피가 흐른다 – 14

고주희가 유진의 전화를 받은 것은 한참 과장급 이상 전체 회의 중인 상황이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인체 손상 처벌 방식 중 하나를 업그레이드해서 당한 정동후가 본인 손자가 아닌 것과는 별개로, 회사의 관련 인물 가족이 회사가 관리하는 부지에서 당한 이 끔찍한 일에 관해서 확인을 명령하신 회장님의 지시에 따라 소집된 회의였다.

여러모로 사건 관련성이 높아보이는 고주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좆같은 쓰나미의 한가운데에서 사방에서 몰려오는 질문과 추궁, 협박의 파도에 허우적거리던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화는 진동 모드로 계속 울려오고, 끊어도 끊어도 다시 계속 울리는 회의 분위기를 곱창 내 버렸다.

차단하거나 무음으로 돌려놓고 모른척하면 좋겠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지금처럼 회의 중이 아니라 수면 중이나 섹스 중에도 걸려 오는 전화는 무조건 확인해야 했다.

한 10여 년 전에 회식 자리 과음으로 뻗어있다가 회장님 전화를 놓친 비서실 과장 하나와, 술자리에서 여자 끼고 접대받다가 회장님 전화를 놓친 이사 하나가 곧바로 좆되어 버린 이래, 비서실 직원과 이사급 이상 임원은 극장을 가도 매너모드를 안 할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회의 중에 로얄 패밀리의 연락도 아닌 전화가 계속 울리는 것을 좋게 봐줄 리도 없었다.

“계속 오는 건가? 받아보지, 고과장.”

회의를 주제하고 있던 김명준 3팀장이 계속되는 진동음에 짜증을 냈다.

함께 참여 중이던 1팀장과 2팀장의 시선도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다른 과장급이나 대리급 인원들조차 고주희를 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씨발.’

고주희는 같은 과장도 아닌 대리급까지 자기를 우습게 보는 이 상황에 새삼 개밥 사이에 도토리 신세인 자신의 처지를 실감했지만, 표는 내지 않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고주희는 살짝 고개를 돌리고 전화를 받기 전 목소리를 잠시 가다듬었다.

그리고.

“여보세요?”

“고주희 과장인가? 나다. 설마 내 목소리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들려온 목소리에 기겁해 버렸다.

단지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가슴이 쿵쾅거리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날 각인되었던 죽음의 느낌이 슬금슬금 그녀의 발목을 다시 기어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방금까지만 해도 아니꼽기 그지없었던 동료들의 시선이 이제는 오히려 안전을 확인하고 용기를 낼 수 있게 만들어 주어 목소리 떨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미스터 헤이즈.”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뚱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3팀장 김명준이 눈을 크게 뜨고는 본인 앞의 서류를 들어 올려 연신 손가락질했다.

장거리에서 찍은 유진의 사진이 포함된 서류였고, 고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명준뿐만 아니라 회의실 내 전원이 입을 꾹 다물고 고주희의 폰에 시선을 집중했다.

“용건이 있으신가요?”

회사 사람들의 바뀐 시선에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고 물어보는 고주희에게 정말 엉뚱한 질문이 들려왔다.

“혹시 주변에 사람들 많나? 숨소리가 많이 들려오는군.”

고주희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네, 회의중이었습니다. 혹시 불편하시다면......”

“회의중이라는 말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당신 동료들이라는 뜻이겠지? 당신과 비슷한 일을 하는?”

“그렇습니다.”

“그럼 비밀취급인가도 비슷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가?”

굉장히 생소한 단어와 이상한 질문에 고주희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했지만, 다시 똑같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그럼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려주겠나? 가능하면 당신 혼자 통화를 듣다가 혼자 뒤집어쓰는 일은 피하고 싶군. 당신 말고 또 다른 인간이 와서 새로 관계를 설정하는 일은 귀찮아.”

원래대로라면 자신의 진행하는 업무의 핵심과 나누는 대화는 가능한 기밀을 지키는 것이 좋다.

정보의 독점과 가공을 통한 차별적 생산이야말로 그녀처럼 정보를 다루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주희는 뇌리를 스치는 불길함에 지체하지 않고 폰을 스피커 모드로 돌린 후 회의실 중앙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요청하신 스피커 모드입니다, 미스터 헤이즈.”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회의실 인원은 다들 어리둥절해했다.

이어진 말은 더욱 그랬다.

“성화건설 비서실 소속 강민기 대리와 성조연 대리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요청한다.”

“그걸 왜 저에게 물어보시는 건가요?”

“고주희씨. 우리의 규칙을 잊었나 보군. 질문은 내가 하는 거고, 당신은 대답만 하면 된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정보를 주지 않겠다면 그냥 내 자의적으로 판단하면 되니까.”

듣고 있던 사무실 내 다른 직원들이 뭘 어떻게 했길래 저따위 소리를 듣냐는 노골적인 멸시의 눈길을 고주희에게 보내왔지만, 고주희는 무시했다.

동물원이 아니라 야생 사바나에서 자란 사자의 입에 머리를 넣었다 빼는 것이 어떤 기분인가를 경험한 고주희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들의 그런 병신같은 시선은 상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하찮고 경멸스럽게 여기게 할 뿐이었다.

화약고 옆에서는 불장난하는 법이 아니라는 생각에, 고주희는 일단 자신의 알고 있는 선에서 순순히 대답했다.

“성조연 대리는 전에 당신에게 말씀드린 적 있는 정동후 씨의 어머님을 모시는 비서입니다. 강민기라는 분은 잘 모르겠군요. 알아봐 들릴 수 있는데, 약간 시간이 필요합니다. 알아봐 드릴까요?”

“아니, 그 정도면 충분하군.”

탕!

“꺄아아아아악!”

짧은 대답이 끝나고 갑자기 듣고 있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갑자기 들려왔다.

날카로운 총성과 여자의 비명.

여기 있는 남자 중에서 군미필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총성을 못 알아들은 남자는 없었다.

단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소리였기 때문에 모두 인지부조화를 일으켜 자신들이 들은 소리를 순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런 남자들에 비해 유진이 어떤 인간인지 대충 느껴보았기 때문에 조금 충격을 감당할 수 있었던 고주희는 반사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죠! 당신 무슨 짓 한 거야!”

깜짝 놀란 고주희가 벌떡 일어나 전화기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잠시 후 핸드폰에서 들려오던 여자 비명이 뚝 그쳤다.

그리고.

“여기는 파주의 성화 아파트 건설 현장 지하 주차장 가장 안쪽의 창고다. 이 성조연이라는 여자는 너희가 빨리 도착 하면 아마 죽지 않을 거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 여자에게 들을 것을 권한다. 방금 전 죽은 강민기를 포함해 사체는 15구다. 여기 공사 현장이라 드럼통하고 시멘트도 많이 굴러다니니까 사체 자체는 처리하기 어렵지 않겠지만, 피랑 박살 난 머리뼈가 좀 많이 흩어져 있으니 전문가 동원하는 것이 좋을 거다.”

이어진 대화는 고주희도 순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당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시체? 처리? 15구? 너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이 미친 새끼야!”

비명처럼 악을 지르는 고주희에게 유진은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깜박했군. 당신 한국계인 내가 왜 헤이즈라는 성을 쓰는지 확인했나?”

“뭐?”

“못했나 보군. 하긴 그러니까 나한테 이런 병신같은 허접쓰레기 3류 킬러를 동원했겠지.”

“뭐?”

“내 어머니의 이름은 앤 헤이즈다. 3년 전에는 CIA의 수석작전요원이었지. CIA의 서열 3위이자 실무를 책임지는 직위다. 지금은 CIA에서 은퇴했지만, 대신 국무부로 가끔 출근할 거다. 당신들은 그런 사람의 아들을 납치하고 살해하려고 시도한 거다. 이걸 당신들이 자체적으로 수습하지 못해서 외부로 노출되면 미국 정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나도 좀 궁금하군. 그래도 시끄러워지면 나도 귀찮으니 당신들에게 수습할 기회를 주는 거다. 그리고 확실히 말해 두는데 이번 일은 미리 경고한 당신을 봐서 주는 기회다. 두 번째는 없을 거야.”

전화가 끊어졌다.

대부분 지금 자신들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그리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받아들이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실장님. 성화 그룹 민주훈입니다. 그간 격조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굉장히 급박한 상황이라 그러는데 혹시 앤 헤이즈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전직 CIA 고위 관료라고 들었습니다. 아 그래요? 그 분야에서는 그렇게 유명한 사람입니까? 그 정도나요? 그건 좀 심하네요. 그냥 소문입니까, 아니면? 그래요. 아니 그럼 혹시 지금은 뭐 하는지 아십니까? 꽤 나이가 많을 거 같은데요. 국무부 자문위원이요?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아직도 힘 좀 씁니까? 아 그래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고위 공직지나 정치인, 법조계 인사등 과의 대관업무를 관리하는 2팀장 민주훈이었다.

그의 자리는 이런 급한 상황에서 이정도의 판단력과 순발력을 발휘해서 필요한 인맥을 연결할 수 있어야 지킬 수 있는 자리였고, 그는 자신의 유능함을 유감없이 선보였다.

그렇게 자신이 관리하는 국정원 고위 관료와의 통화로 앤 헤이즈에 대한 조사를 마친 민주훈이 자신의 입만 바라보는 동료와 부하직원들에게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설명했다.

“젊었을 때는 소련 해체와 폴란드 공산당 몰락에도 관여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최고 심복 중 하나였고, 9.11 이후로는 중동 테러리스트들 사이에서는 미국 대통령보다 현상금이 더 높을 거라는 농담을 들을 정도였음. 이 여자가 증거도 없이 잡아다가 전 세계의 비밀 안가에서 고문해서 죽여버린 중동 테러리스트 용의자가 최소 100명은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 최소 2할 많으면 5할까지 무고한 희생자였을 거라는 것이 첩보계 평가. 첩보계에서 제일 유명한 부분은 젊었을 때 작전 중 죽은 남편과 사산한 아기의 복수를 위해서 수십 년에 걸쳐 당시 관련자들을 무슨 모사드가 전직 나치 추격하듯이 추격해서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까지 아무 죄 없는 가족들까지 다 죽인 것으로 의심받는 부분임. 증거는 없지만, 이 계통에서는 사실로 진실로 간주 됨. 그 덕에 동구권에서는 식인마녀 바바야가, 서구권에서는 사람 피로 목욕하는 마녀 바토리 백작 부인이라는 별명이 붙음. 그 악명 탓에 소련 해체와 테러와의 전쟁에서 전설적인 업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CIA 국장이나 부국장 같은 최고위직에는 결국 못 올라갔음. 그리고 씨발, 그런데도 바로 작년에 미 상원 정보위원회랑 손을 잡고 CIA내의 자신의 반대 파벌을 비밀리에 반역죄로 전부 다 갈아버리고 CIA를 장악한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 정보계 실세 중의 실세란다.”

민주훈의 이야기는 바로 방금 그들이 전화로 총소리를 듣고, 시체 이야기를 들었던 것처럼 너무 황당해서 현실감이 없을 정도의 것이다.

그리고 멍하니 가만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여기 있는 인간들은 비록 어두운 곳에서 더러운 일에 손을 담그는 자들이기는 했지만, 대한민국 최고 재벌 그룹에서 고르고 골라 뽑고 키워낸 엘리트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엘리트답게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빠르게 판단하고, 행동을 시작했다.

“실장님. 접니다. 1급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지금 실장님께 가는 중입니다. 총괄 비서실장께도 연락 주시고, 비서 실장님 통해서 회장님께도 연락 부탁드립니다. 네. 실장님. 회장님입니다. 사장님도 당연히 아셔야겠지만, 회장님이 최대한 빨리 상황을 아셔야 합니다. 건설 사장님 관련해서 대량 살인이 일어났고, 미국 고위 관료가 관련되었습니다. 잘못하면 그룹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실장님, 본사 김명준입니다. 지금 인사 같은 거 나눌 시간 없고, 혹시 파주의 아파트 현장에 사람 동원해서 일 벌이셨습니까? 참고로 저 실장님 대답 곧바로 사장님이 아니라 회장님께 직통 보고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잘 생각해서 대답하십시오. 그리고 주변에 여유 인원 있으면 당장 거기로 보내십시오. 실장님이 보낸 애들 다 뒤진 것 같습니다.”

팀장 직책들은 고스톱 쳐서 오른 것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팀장급들이 급하게 전화를 돌려 상황 파악과 긴급 대처를 시작했다.

그런 상사들의 모습에 과장급들도 정신을 차리고 일을 시작했다.

“나다. 지금 당장 비상 경계 발동하고 로얄 패밀리 전원에게 1급 경호 붙여! 외출 전부 차단하고 외부에 나가 있는 분들은 전부 안전 구역으로 대피시켜. 씨발! 닥치고 하라면 해! 지금 눈치 같은 것 볼 때가 아니야, 이 새끼야!”

“처리팀 지금 어디 있지? 동원할 수 있는 인원 중에 믿을 수 있는 인원들은 지금 당장 전부 파주의 아파트 현장으로 집결시켜! 동원할 수 있는 인력과 장비 전부 다 동원해! 전부!”

“이사님. 저 본사 유과장입니다. 파주의 아파트 현장에 지금 최고 책임자가 누구입니까? 지금 거기 전면 통제 가능합니까?”

몇몇 과장들은 회의실을 뛰쳐나갔다.

상황으로 보아 일을 벌인 것은 성화 건설이었고, 성화 건설은 회장님의 묵인하에 사실상 그룹에서 분리 순서를 밟는 중이기는 해도 이 일이 터지면 날아가는 것은 성화 건설 혼자일 리가 없었다.

실무진인 그들이 지금 개별 계열사나 라인 같은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병신이었다면 성화 그룹은 이미 한참 전에 망했을 터였다.

실제 상황을 확인하고 처리하기 위해서 과장급들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을 총 동원해서 현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고주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폰을 잡고 단축번호를 눌렀다.

“실장님, 고주희 과장님입니다. 사모님과 연결 부탁드립니다.”

최고 수뇌부에게 지금 상황을 보고 하기 위해 우선 직속 상사인 제2부속실장을 향해 뛰쳐나간 성문후 팀장이나 현장으로 가기 위해 달려 나간 여타의 과장들을 제외하고 남은 인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고주희에게로 쏠렸다.

그들은 악명높은 사모님보다 회장님이 더 무서운 분이라는 것은 알지만, 회장님은 자신들이 접할 일이 없는 하늘 위의 분인 것에 비해 고주희 과장은 사모님을 직접 대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덜덜 떨며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그녀를 향하는 시선에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그렇게 성화 그룹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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