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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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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피가 흐른다 – 15
유진이 떠난 지하 주차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성화 건설에서 고용한 처리반이었다.
따로 상부의 연락을 받거나 해서 온 것은 아니었다.
미리 약속되어 있었고, 시간이 되어서 도착한 것이다.
시멘트 바닥에 흩뿌려진 피와 살을 나중에 청소하는 것보다, 미리 비닐을 깔고 약품을 살포해서 청소하기 쉽게 만들어 두는 것이 훨씬 손이 덜가는 법이고, 그래서 사체가 생길 예정이면 죽일 인간이 살아 있을 때 미리 처리하기 쉬운 장소를 만드는 것이 일을 편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들은 그걸 위해서 미리 도착한 것이다.
그렇게 대규모 살인이 벌어진 현장을 가장 먼저 발견한 그들은 놀랐다고 어설프게 안으로 들어가서 현장에 자신들 발자국을 추가하는 대신 라인을 긋고 현장을 보존했다.
뒤이어 도착한 성화 건설 비서실의 인원이 살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목격자이자 자신들의 상관 성조연 대리를 구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것도 만류했다.
살아 있는 사람 있다고 화를 내는 그들을 막고 팀원 중 한 명이 전신을 완벽히 가리는 방호복을 입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서 성조연을 업고 나왔을 정도였다.
범죄 현장에서 범죄 증거를 청소하는 처리반은 그냥 아무나 고용해서 빗질하고 걸레질이나 하는 그런 흔해 빠진 용역이 아니었다.
국과수의 과학수사반이 정밀 조사를 해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증거를 말살하고, 때로는 국과수나 검시관도 속을 정도로 가짜 증거를 조작하는 전문가였다.
팀원 중에는 전직 국과수 직원이나 전직 경찰, 석사 학위 가지고 있는 화학 전문가도 있을 정도였다.
이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어둡고 더러운 부분을 들여다보는 자신들조차도 평생 본 적 없는 이 끔찍한 현장이 얼마나 심각하고 중요한지 충분히 눈치챌 정도의 안목이 있었다.
그런 그들 덕분에 이어서 도착한 성화 건설과 성화 그룹 관계자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 이상입니다.”
전직 국과수 직원이었던 처리반의 대표가 유진이 움직인 동선의 설명을 끝내자 입 다물고 듣고 있던 김명준 팀장이 같이 듣고 있던 경호 업체 대표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유 이사님.”
어디 어설픈 해병대나 공수부대도 아닌 아예 이름도 없는 부대에서 근무한 전직 특수부대 지휘관인 유 이사는 김명준 팀장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현장을 설명한 처리반의 전직 국과수 팀장인 처리반 대표에게 먼저 물었다.
“이런 거 물어보면 욕먹을 줄 아는데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군요. 주 팀장님. 주 팀장님이 지금 설명하신 내용이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는 거 주 팀장님도 아시죠?”
전문가가 진지한 태도로 설명한 바로 앞에 헛소리하지 말라는 말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를 직접 들은 주 팀장은 물론 그의 팀원들조차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주 팀장은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유 이사님 이야기 언뜻 들었는데, 확실히 전문가는 맞으시군요. 네, 맞습니다. 제가 파악한 대로 설명하기는 했는데, 어디 가서 딴 놈이 저한테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면 저라도 이렇게 말하겠죠. 3류 영화 좀 작작 보고 현실에서 살라고.”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하시는군요.”
“지금 이 상황에서는 정치적인 판단으로 상식적인 이야기 같은 거 꾸며내면 나중에 사실 확인되었을 때 뒤지기 딱 좋으니까요.”
“좆같네요. 씨발.”
“동감입니다. 씨발.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연락은 받아서 씨발. 씨발. 씨발.”
두 사람의 대화를 불편한 얼굴로 보고 있던 성문후 팀장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두 분 전문가끼리 의견을 나누는 것은 좋은데, 그런 것은 두 분이 최고 책임자일 때 적당히 하시고, 지금은 다른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게 부탁합니다.”
널려 있는 피와 시체를 간이 조명이 어슴푸레 밝히고 있는 지하 주차장의 싸늘한 온도가 3-4도 정도는 더 떨어지는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 둘은 조금 더 서로 눈치를 보며 대답을 미뤘다.
그러다가 결국 성문후 팀장이 한 번 더 화를 내려는 눈치를 보이고 나서야 경호 업체 대표 유 이사가 입을 열었다.
“대충 총 맞아 죽은 사람들 빼고도 자동차 뒷자리에서 발로 차서 앞자리 운전석을 부수고 운전사를 압사시키고, 펀치로 안면을 부숴서 사람을 죽이고, 칼을 던져 사람을 얼굴을 꿰뚫고, 벽을 뚫고 들어가 안쪽에 있는 사람이 반격하기도 전에 선제 사격으로 3명을 죽였습니다. 얼핏 보면 영화에서 본 장면들 같으니까 특수훈련을 받은 최고의 인간병기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착각하기 쉬운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특수부대가 아니라 미국이나 러시아의 최고 정예라고 해도 어림없는 일입니다. 영화에서라면 몰라도 현실의 인간이라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럼 저 사람이 거짓말했다는…….”
유 이사의 이야기에 짜증을 내려던 성문후는 바로 직전 유 이사와 주 팀장이 나눈 대화를 기억했다.
거짓말 같은데 거짓말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거기에 지금 유 이사의 추가 설명을 붙이면 결론이 나온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누군가 이 일을 했다는 것은 이 일을 한 것이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지만, 성문후는 어쩐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성화는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재벌가이고, 전 세계 가문들을 다 통 털어도 100순위는 어려워도 200에서 300순위 안에는 들어갈 만한 세력이며, 성문후는 그런 성화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일을 다루는 20명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일을 다루는 전문가 십 만명 안에는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십만 명이라고 하면 참 볼품없게 느낄 수 있는 숫자이지만, 지구 인구를 60억으로만 잡아도 까마득한 소수에 속하는 인원이며, 5000만달러 이상의 재산을 가진 슈퍼리치의 숫자도 22만명은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절대로 만만하게 여길 수 있는 숫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성문후는 보통 사람은 모르는 세계의 가장 은밀한 비밀도 사실 여부 정도는 접할 수 있었다.
세계 최고의 부자들이 생명 연장과 권력 획득을 위해 벌인 끔찍한 실험들과 그 과정에서 파생된 생체 개조 인간이나 사이보그 같은 것들이 단순히 음모론이 아니라 실제라는 것 정도는 말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성문후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성문후는 핸드폰을 꺼내 상사인 제 2 부속실장에게 핵심적인 내용만을 정리해서 문자로 보내고 대답을 기다렸다.
그 시각 제 2 부속실장은 성화 그룹 회장인 유명선 회장의 자택 지하 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상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다.
유명선 회장은 꽤 전통 있는 무관 가문의 후예로 가문 대대로 이어오는 전통 무예 수련자였는데, 그래서인지 다른 회장들이 서재라는 이름으로 집무실 겸 회의실을 꾸며 두는 것과 달리 온갖 수련용 무구들이 널려 있는 지하 도장 한 구석에 간이 회의실이 있을 뿐이었다.
집안에 머무르며 일상적으로 회사 임원들을 집안으로 불러들여 보고받는 몇몇 재벌 회장들과는 달리,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을 철저하게 구별하는 유명선 회장의 성품과 사적인 거처에 회사 임직원이 드나드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부인 유초혜 여사의 성향 탓이었다.
그런 이유로 성화 그룹에는 다른 회사는 회장님이 화나면 재떨이가 날아오지만, 우리 회사는 회장님이 진짜 화나면 칼이나 창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비상 회의에 참석한 성화 그룹 최고위 임원들은 그것이 농담이 아니라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평소에는 아무리 집안에서 진행되는 회의일지라도 정장에 넥타이는 물론 커프스와 행커치프까지 빼놓지 않으시는 완고한 성격의 회장님이 수련용 도복을 입고 수련용 창을 옆에 세워두고 보고받고 계시기 때문이었고, 무엇보다 비서실장의 현재 상황 보고가 한마디 한마디 계속될 때마다 회장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점점 더 살벌해지고 있는 탓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손자로도 생각하지 않는 발정 난 개새끼 같은 손자놈과 그런 손자놈을 부추긴 병신같은 사위와 독사 같은 딸년, 그리고 그런 사위와 딸년 눈치에 범죄를 저지른 생각 없는 범죄자 직원 놈들 때문에,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근 100년에 걸쳐 키워온 회사가 통째로 날아갈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했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정말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이기는 했다.
하지만 외동 아들인 자기 장남이 아파트 건설 현장 시찰 중에 사고로 죽었는데도, 현장 안전 수칙을 어긴 아들 죄지 사장님 호통에 발만 동동 구른 현장 근로자들이 무슨 잘못이냐고 혀를 찼던 유명선은 부하 직원들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분노와 살의가 넘실거리지만 그런데도 아주 차분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물었을 뿐이었다.
“정 사장하고 민영이가 책임지는 선으로 정리할 수 있겠나? 걔들 미국으로 보내서 미국 국내에서 미국법으로 처벌받게 해도 상관없는데?”
전략기획실장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누가 처벌하고 어떻게 처벌할지에 상관없이 공식적으로 이름이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그룹이 끝장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비공식적으로 비밀리에 끝내야 합니다.”
“자네 생각에는 그게 가능할 것 같은가?”
“무조건 가능하게 해야 합니다. 안되면 그룹 망하는 것 외에 다른 결말 안 납니다.”
듣고 있던 회장 비서실장이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이게 정말 심각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닌데, 기업 임원 일부가 범죄를 저질렀다고 우리처럼 세계 200대 기업 안에 드는 거대 기업이 망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미국의 존 듀폰이나 태국의 레드불 후계자 뺑소니 사건 같은 개인 살인 사건은 고사하고 어린 고아 아이들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벌인 현대판 마루타 사건인 ‘인카네이션 어린이 센터 AIDS 생체 실험’ 에 관여한 제약 기업들도 멀쩡하게 잘 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닙니까?”
“두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정 사장님이 직접 총을 쏜 것도 아니고 어디서 킬러를 고용한 것도 아니라 회사 정직원 일부가 업무로 이 일에 동원되었다는 겁니다. 이 정도면 기업이 아니라 범죄조직으로 간주해도 변명이 어렵습니다. 생체 실험 후원한 제약 기업들처럼 우리는 몰랐다라는 말도 안 통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사건에 연루된 배후가 너무 거물입니다.”
“그 앤 헤이즈라는 전직 첩보원 말입니까?”
“미국측 인맥들이 전하는 말로는, 미국부무 직원들은 이 전직 첩보원 할머니의 원한을 사느니 기꺼이 우리 회사 정도는 산산조각 낼 거라고 하더군요. 우리 회사를 산산조각 내면 그 와중에 떡고물 먹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생기겠지만, 이 늙은 마녀의 원한을 사면 자식 손자까지 3대가 위험할 뿐이라면서요.”
“하!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사실 제일 좋은 방법은 이 전직 첩보원을 어떻게든 제어하는 건데 불가능합니다. 냉전 시절에 소련 첩보 기관들 최고 목표였고, 근래에는 중동 테러 조직들이 미국 대통령보다 더 싫어하는 최고 목표였는데도 멀쩡하게 살아남았다는 여자입니다. 우리 같은 기업이 돈으로 건드리려고 하면 지금 소속된 국무부가 아니라 CIA가 같은 첩보 조직이 움직일 겁니다.”
“그럼 다른 방법은 뭡니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 일의 당사자인 유진 헤이즈 씨를 달래서 그가 이 일을 문제 삼지 않도록 만드는 겁니다. 돈으로 입을 막을 수 있으면 최선이고, 돈만으로 안되면 정 사장님이 유 여사님이라도 책임을 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유명선 회장을 제외하고 듣고 있던 회의 참여 전원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미 공식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법적 책임은 안 된다고 했으니, 전략기획실장이 말하는 책임은 사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의 일에서 돈과 관련되지 않은 사적 책임이 무릎 꿇고 사과한다 따위일 리는 없었다.
“아니, 그게 무슨!”
임원진들을 대표해 그리고 암묵적으로 유명선 회장을 대리해 전략기획실장에게 따지고 있던 비서실장이 말을 더듬었다.
전략기획실장도 자신이 입으로 말해놓고 민망한지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잘못했더라도 그리고 회사를 위해서라도 로얄패밀리 그것도 회장의 딸과 사위의 안위를 언급하는 것은 그룹의 최고 실세 중의 한 명인 전략기획실장이라고 해도 사실 목숨을 걸고 하는 이야기였다.
회의실이 침묵으로 물들었고, 듣고 있던 유명선 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막 회장이 입을 열려는 찰나, 쾅 소리와 함께 지하 도장 문이 거칠게 열리며 노부인 한 명이 들어섰다.
그룹의 실제 소유주이자 유명선 회장의 부인 유초혜 여사였다.
유 초혜 여사는 임원진들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고는 차갑게 외쳤다.
“다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