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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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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피가 흐른다 – 16
유명선 회장과 회의중이던 임원진들은, 갑작스럽게 난입한 유초혜 여사의 모습에 당황했다.
유초혜 여사는 단순히 회장의 아내가 아니었다.
그녀는 선대 회장의 외동딸이자, 그룹 지주회사인 주식회사 성화의 지분 35%라는 압도적인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최대 주주였다.
그런 그녀와 고작 서른 중반의 나이에 그룹 회장으로 취임해 40년 가까이 그룹을 운영한 철혈의 경영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회장님 사이에서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는 임원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회의는 일단 여기까지. 나머지는 본사 회의실로 이동해서 거기서 이어서 하기로 합시다.”
성화 엔지니어링의 CEO와 그룹 부회장을 겸하는 유준선 부회장이 상황을 정리했다.
“하지만,”
중요한 부분에서 이야기가 끊긴 전략기획실장이 이의를 제기하려 했지만 부회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2시간 후에 다시 봅시다. 그때는 지금처럼 말로 떼울 생각하지 말고 구체적인 자료들 제시하세요. 전부.”
전략기획실장 뿐만 아니라 비서실장과 몇몇 임원들이 안절부절하며 유명선 회장의 눈치를 봤지만, 유명선 회장의 눈길은 아내인 유초혜 여사만을 향하고 있을 뿐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임원진들은 혹시나 유초혜 여사가 딸과 사위를 재물로 받치자는 자기들 논의에 화가 났나 싶어서 안절부절 눈치를 보다가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는 간이 회의실로 꾸며진 도장을 나섰다.
유명선 회장은 임원들이 모두 나가는 걸 기다렸다가 일단 아내에게부터 말을 걸었다.
“여보, 미안하지만 준선이랑 먼저 이야기 좀 할게요.”
“네, 기다릴게요. 여보.”
이제 70을 넘어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보 당신이라는 호칭에 부드러운 존대말을 잊지 않는 두 부부의 모습에 유주선 부회장이 치를 떨었다.
“아우, 형도 누나도 둘 다 적당히 좀 해요. 나이 먹어도 그러고 싶어요, 진짜?”
유명선 회장의 친동생인 유준선 회장은 10대 시절부터 보아온 형과 형수의 애정행각이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것에 이제는 슬슬 치가 떨렸다.
보통의 부부도 결혼 10년이 지나면 사랑이 아니라 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보통인데, 어떻게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부와 권력을 가진 부부가 수십 년 동안 살아오면서 바람 한 번 안 피고 알콩달콩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부부의 애정행각은 이제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닭살이 돋거나 웃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공포처럼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대상이 아버지처럼 자신을 키워준 형이고, 누나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어머니 대신 자신을 키워준 형수라고 해도 말이다.
동생 놈이 그러거나 말거나 유명선 회장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헛소리 하지 말고, 윤 실장 저거 왜 저래? 이게 별거 아닌 일은 아니지만, 윤 실장 하는 말은 누가 봐도 헛소리잖아.”
유준선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과장이 좀 심하기는 한데, 완전히 헛소리는 아니에요. 이거 터진다고 회사가 망하지야 않겠지만, 한 몇 년은 꽤 타격이 될 거에요. 하지만 애들이 겁먹은 건 사실 회사 앞날이 걱정 되서가 아니라 아까 언급된 그 여자 때문이에요.”
“앤 헤이즈?”
“윤 실장이 과장한 것 처럼 그 여자가 국무부를 움직이거나 할 수 있는 건 아닌데 다른 건 의견이 비슷해요. 개인적으로 개인에게 보복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데요.”
“개인?”
“적이 생기면 적의 최고 수뇌가 아니라 일선에서 직접 부딪친 현장직과 관리직을 조지는 성향이랍니다. 대가리나 조직 자체를 노리면 적이 단합해서 싸우려 들지만, 하부 일부만 노리면 적의 분열과 두려움을 동시에 노릴 수 았다가 신조랍니다.”
“분리하고 지배한다 인가?”
“그보다는 쪼개고 쪼개서 각개격파한다는 모티 전술에 가깝겠죠.”
유명선 회장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래서 결론이 그거냐? 혹시 개인으로 보복 대상이 될지 몰라서 회사를 통째로 끌고 들어가겠다는 거야?”
“그건 아니에요. 윤실장이 큰 애 라인도 아닌데, 큰 애 책임을 지가 걱정하겠어요?”
“음. 잠깐. 그럼 설마?”
“예, 둘째 라인 탈려고 큰 애 노리는 겁니다.”
유명선 회장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이없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는데 그런 형의 모습에 유준선 부회장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뭘 새삼 어이없다는 표정이에요. 형님도 이제 낼모레 하는 나이인데 아직 명확한 후계자가 안 정해졌잖아요. 이런 줄타기가 없을 줄 알았어요?”
“왜 안 정해져! 인영이도 민영이도 안된다고 내가 이미 확정 지었는데!”
유명선 회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유준선 부회장은 여전히 시쿤둥했다.
“네. 그래서 지금 임원들이 인영이나 민영이가 아니라 동성이나 성준이 같은 애들에게 줄타기 하고 있잖아요.”
여기까지 조용히 듣고 있던 유초혜 여사가 끼어들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다들 김치국은 아주 사발로 들이키고 있구나.”
“누나가 누굴 후계자로 생각해서 지배 지분 물려주건 크게 달라질 거 없어요. 명천 그룹은 돌아가신 왕 회장님이 후계자 선정 안 해서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태성 그룹은 돌아가신 김 회장님이 후계자 선정을 안 해둬서 그룹이 두 개로 쪼개졌습니까?”
“흥, 그 양반들은 물러터져서 자기 핏줄이라고 정리 못해서 그런거고, 넌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니.”
목에 칼날이 스쳐 지나가는 듯이 차가운 유초혜 여사의 이야기에 유준선 부회장이 진저리를 쳤고, 유명선 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누나!”
“여보.”
“걱정하지 말아요. 걔들이 분수만 지키면 아무 일 없을 거예요.”
독하기 그지없는 아내의 말에 유명선 회장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수라니.
유준선은 조카인 유민영이나 유인영이 그런 걸 지킬 년들이었으면 오늘날 이 꼴이 날 리가 없다는 생각에 혀를 찼다.
그리고 그 독사 같은 년들이 누구 닮아서 그 꼴인지 새삼 혀를 차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독하다는 점 외에는 인성도 능력도 부모에 비하면 용에게서 태어난 지렁이 같은 두 조카의 수준을 생각하니 새삼 참 세상이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무시무시한 형과 누나 사이에 태어난 조카와 조카 손자들이 능력이나 성품까지 형과 누나 수준으로 물려받았으면 보통 사람들은 억울해서 살수 없을 듯 싶었다.
“전 형님이 회사에서 손 떼시면 와이프 데리고 바하마로 튀어서 안 돌아올 거니까, 그런 건 두 분이서 알아서 하시고, 어쨌든 그런 겁니다, 형님. 이 일이 결국 동성이 새끼와 민영이 그리고 정서방에 관련되어 터진 거라서 걔들 싫어하는 그룹 내 애들이 걔들 쉴드 쳐주려다가 지들이 손해 보느니, 이 기회에 걔들 다 묻어 버리겠다고 나오는 거예요.”
동생의 이야기에 유명선 회장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슬슬 삶을 정리해야 할 시기라는 생각에 회사 일에 여유를 좀 부렸더니, 대번에 발밑이 썩어 나가는 꼴에 한숨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그렇다고 이 나이에 새삼 옛날처럼 열심히 일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한번 권력을 잡은 자는 죽을 때까지 그 권력을 놓지 못한다고 하지만, 유명선 회장에게 성화 그룹 회장직은 권력이 아니라 그냥 노동일 뿐이었다.
유명선 회장이 회장으로 일한 것은 야망에 불타서가 아니라 아내와 결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선택한 것뿐이었고, 기왕 하는 일 아내를 위해 열심히 한 것뿐이었다.
회사 물려받던지 딸과 헤어지든지 양자택일하라던 장인어른 돌아가신 지 벌써 40년이 넘었고, 일하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내 딸이랑 헤어지라던 그 무서운 장모님도 이제 오늘내일하시는 상황이라서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데, 이 나이에 계속 뼈 빠지게 일할 생각은 없었다.
“있다가 회의에는 참석하겠지만, 이건 니가 좀 알아서 해라. 솔직히 이제는 이러다가 회사 망하건 말건 내 알 바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유명선 회장의 말에 유준선 부회장은 혀를 차며 형수의 눈치를 봤지만, 형수도 그런 형의 생각에 별로 타박할 생각이 없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남들은 꿈에도 소원하는 대기업 회장 자리가 이 부부에게는 사랑을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으로 책임진 자리라는 걸 남들이 알면 무슨 생각이 들지 궁금했다.
당장 그 덕에 재벌 그룹 부회장으로 평생 잘 먹고 잘살아온 유준선 부회장 본인부터 배알이 꼴리는 기분이었다.
유준선 부회장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도 누나도 회사에 별로 애정없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수십 년간 두 사람에게 충성을 다 한 임직원들은 좀 기억해줘요. 우리 회사가 급여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임직원들 대부분은 급여 받는 거 이상으로 회사에 자기 인생 갈아 넣었다고요. 회사를 자기 것처럼 생각하면서요. 걔들 인생도 좀 생각해 줍시다.”
“그러니까 그런 거 걱정하는 니가 좀 더 신경 쓰라고. 필요한 건 열심히 도와줄 테니까.”
유준선은 부회장은 다시 한번 배알이 뒤틀렸다.
어째서 하늘은 별로 필요도 없다는 이런 사람에게 이런 재능을 주었는지, 같은 부모님을 두고 태어난 형제인 자신과 어떻게 이렇게 천지 차이가 나는지 억울하고 원통했다.
널리고 널린 개발도상국의 흔해 빠진 가족 기업을 40년 만에 글로벌대기업으로 키워낸 세기의 천재 경영자가 사실은 그냥 자기 급여 받는 만큼만 일한다는 마인드를 가진 이런 사람이란걸 세상이 몰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알면 자살하고 싶은 기업가가 정말 한둘이 아닐 터였다.
자기도 이 인간이 친형이 아니라 그냥 아는 형이나 경쟁 회사 경영자였다면 울화를 참지 못하고 화병으로 죽었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더 이상 도저히 이 이야기를 계속할 수 없어서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누나는 웬일로 회사 애들 있는데 쳐들어오셨어요? 저도 비켜 드려요?”
유초혜 여사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왕이면 너도 같이 보자.”
유초혜 여사는 이렇게 말하며 손목에 차고 있는 호출벨을 눌렀다.
임직원들이 나가면서 닫혀 있던 도장의 문이 열리고 여자 한 명이 긴장한 얼굴로 서류철을 들고 들어섰다.
고주희 과장이었다.
“응? 고 과장?”
고주희는 원래대로라면 유명선 회장이나 유준선 부회장이 기억할 정도의 지위는 아니었지만, 하는 일의 특성상 두 사람도 이름과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다.
고주희는 한 번에 한 명만 만나도 수명이 줄어들기 딱 좋은 윗분 세 사람에게 동시에 보고해야 하는 지금 상황에 심장이 부서지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실수하지 않고 침착하게 앞으로 걸어나와 미리 준비하라고 지시받은 사진들을 펼쳐 놓았다.
“오늘 회의에 언급되었던 유진 헤이즈의 사진들입니다. 몇몇 사진에 함께 찍혀 있는 아이는 유성준 이사의 사생아인 강소진 양입니다.”
고주희는 유초혜 여사가 왜 이사진들을 가져오라고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사진을 펼쳐놓고 사진들을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유준선 부회장의 한마디에 입을 굳게 다물어야 했다.
“얼래? 돌아가신 어르신이랑 쌍둥이처럼 닮았네요?”
“그래,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리고 이 사진 봐라. 이건 이 사람 젊었을 때 느낌이 나지 않니?”
유초혜가 가리킨 사진은 유진이 소진이를 목말 태우고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유준선은 그 사진과 유명선 회장을 번갈아 보며 등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뚫어지라 사진들을 노려보던 유명선 회장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고주희 과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친구 몇 살인가?”
고주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마주친 유명선 회장의 눈빛이 압도당해 숨도 쉬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죽을 날 받아둔 무기력한 노인 같던 유명선 눈빛이, 이제 세상을 불태워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