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97화 (97/196)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재미있게 보셨나요?

재미있으셨다면 [추천]과 [즐겨찾기 등록] 부탁드립니다.

#007 피가 흐른다 – 17

무서운 것은 무서운 거고, 일은 일이다.

“모릅니다. 일단 확보된 정보들은 있는데, 저희 팀은 공개된 정보는 모두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고주희는 호랑이 입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기분에도 똑바로 대답했다.

사실 이미 한번 유진에게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 유명선 회장의 위압감도 어떻게 버틸 수 있었다.

유초혜 여사가 다시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보. 이 청년이 그 아이가 맞는 것 같죠?”

“당신은 이 청년이 그 아이일 거로 생각하는 건가요? 그 아이가 살아남았다고?”

“네. 전 솔직히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어요. 일단 건영이가 죽었으니까요. 그리고 며늘아기가 우리나라에서 자기 친정 동원하고도 결국 그 아이를 못 죽였는데, 민영이가 영국에 있는 그 아이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는 것부터 솔직히 믿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도 그때 나한테 그렇게 애원했군요.”

“솔직히 며늘아기 때야 제가 시켰던 거니까 당신에게 혼이 나도 할 말 없지만, 민영이가 그 아이 죽였다고 들었을 때는 억울해서요. 민영이는 제가 부추긴 것도 아닌데 제가 혼나기는 억울하잖아요. 당신 솔직히 그때 제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애원하지 않았으면 저 버리셨을 거잖아요.”

“그런가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 청년이 그 아이라고 확신하는 건 이상해요. 장인어른 닮았다고는 하지만 사실 잘생긴 미남은 다 비슷비슷한 법이잖아요. 내가 장인어른 아들이라서 장인어른 닮은 것은 아니고.”

고주희는 유명선 회장과 유초혜 여사의 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회장님이 본인 미남이시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하시는 것 정도가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전부였고, 사실 그것 외에는 들은 이야기 다 잊고 싶었다.

둘의 대화에서 언급된 이름들도 너무 무서웠고, 높은 분들의 살인 청부 이야기 따위도 정말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같이 듣고 있던 유준선 부회장이 그런 고주희를 감쌌다.

“두 분 그런 이야기는 고과장 내보내고 하시죠. 고 과장이 뭔 죄입니까?”

유준선 부회장의 말에 고준희는 감동했다.

왜 그룹 내에 다 늙은 노인인 유준선 회장을 사모하는 젊은 여직원들이 여전히 많은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준선아. 그럼 쟤 내보내고, 그 나이에 니가 직접 뛰어다닐래?”

유초혜 여사의 한 마디에 유준선 부회장은 찍소리도 못하고 고주희를 외면해 버렸다.

“고 과장.”

“네, 사모님.”

“고 과장 생각은 어때. 동후 그렇게 만든 것, 이 청년이 맞는 거 같아?”

고주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네. 증거는 없지만 전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

“제가 만나봤을 때 그러고도 남을만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사람 그냥 쳐죽이는거야 욱하면 그럴 수 있는 사람 얼마든지 있지만, 멀쩡한 사람을 그렇게 치밀하게 난도질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인데, 그 남자는 그런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제가 보기에는요.”

고주희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유초혜 여사가 시선을 유명선 회장에게 돌렸다.

“들으셨죠, 여보? 민영이가 아무리 찌꺼기 같은 년이고, 그 배에서 태어난 동후는 당신이 절연까지 했다지만, 그래도 내 피를 이어받은 손자예요. 죽지는 않았어도 죽은 것보다 더한 꼴을 당한 것이 정상은 아니잖아요.”

유명선 회장은 아내의 말에 깊게 숨을 내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쩌고 싶어요?”

“뭐 딱히 뭘 어쩌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건영이 죽었을 때 이미 끝난 일인걸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냥 확인은 해두고 싶어요. 제 생각대로 이 청년이 그때 그 아이가 맞는다면, 최소한 어디서 갑자기 재앙신이 뛰쳐나올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당신이 그렇다면,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아내와의 말을 끝낸 유명선 회장의 시선이 동생 유준선 부회장에게로 향했다.

“준선아, 들었지? 거기 고 과장 데리고 나가서 상황 설명 해줘라. 그리고 오늘 벌어진 일은 이런 저런 고민하지 말고 그냥 깨끗하게 청소해서 없던 일로 끝내자. 미국무부? 지들이 미국무부가 아니라 연방준비위원회라고 해도 말만으로 일을 저지를 수는 없을 테니, 아예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걸로 만들어둬.”

“네, 형님. 저 그런데 고 과장에게 어디까지 설명해 줘야 합니까?”

유명선 회장과 눈이 마주친 유초혜 여사가 대답했다.

“다 이야기 해줘. 우리 집안 역사부터.”

그녀의 대답에 유준선 부회장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까지 엄청 심각한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에도 능글맞은 표정을 잃지 않던 부회장의 표정 변화에 고주희가 더 겁을 먹었다.

“괜찮아. 고 과장은 믿어도 돼.”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직원입니까?”

“아니. 그보다는 내가 아는 애들중에서 가장 확인하기 쉽고, 처리하기 쉬운 아이야. 누굴 믿건 비슷하다면, 배신당했을 때 확인하기 쉽고 처리하기 쉬운 아이가 좋지.”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

고주희는 정말 울고 싶은 마음으로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유준선 부회장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유준선 부회장이 부축해주지 않았으면 거기서 쓰러져서 나오지도 못했을 지경이었다.

사모님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그걸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고, 새삼 고아에 연인 하나 없는 자기 신세가 서러웠다.

유준선 부회장은 고주희가 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입에 담배 하나 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듣고 있는 고주희를 정말 어이없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아주 오래전 유씨 가문의 누군가가 어떤 신적인 존재와 계약했다.

계약에 따라 가문에는 오직 한 대에 한 명의 여자아이만 태어나서 가문을 이었다.

이 여자아이는 계약을 맺은 신적인 존재와 교류하는 일종의 무녀였고, 신적인 존재는 자기 무녀인 역대의 딸들을 보살피고, 그녀들이 좋은 남편을 데릴사위로 얻을 수 있게 도와주며 가문을 이어가게 했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 무렵 신적인 존재와 갑자기 교류가 끊어졌고, 당시 가주이자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스러운 무당이었던 유혜선 여사는 무당일을 때려치우고는, 남편 유정웅 회장과 함께 성화 그룹의 모태인 성화 상사를 차렸다.

가문 역사상 한 번도 태어난 적이 없었던 둘째 딸을 낳은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 성화 상사는 일제강점기를 버티고 살아남아 독립한 한국에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며 성장해 나갔고, 그 와중에 큰딸 유초혜 여사가 집안에서 정한 약혼자를 거부하고, 회사 말단 직원이었던 유명선 회장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6.25로 가족을 잃고 혼자서 어린 동생을 키우던 유명선 회장은 데릴사위가 되는 조건으로 사장님 외동딸인 유초혜와의 결혼을 허락받았다.

여기까지는 조선시대 무당 집안이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건국 초의 혼란기에 상인으로 신분 세탁해서 성공하고, 그 와중에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남자 신데랄라 이야기가 섞여 있는 조금은 흔해 빠진 이야기였다.

이후에 벌어진 이상한 일들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성화의 시작이었던 유혜선 여사는 자신이 가문 역사상 처음으로 외동딸이 아니라 딸 셋을 낳은 것에 이어서, 가문을 물려받을 장녀 유초혜도 딸 둘을 연이어 낳자 가문이 무녀이자 무당이었던 옛날 과는 완벽히 이별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셋째이자 장남인 유건영이 태어나던 날, 선대 유정웅 회장과 당시까지 생존에 계셨던 유혜선 여사의 아버님이 동시에 급사했다.

아무 이유 없이 전날까지 건강하던 분들이 밤에 잠들었다가 다음날 시체로 발견된 어처구니없는 사망이었다.

거기에 옆에서 자던 남편이 죽음을 확인하고, 그 직후에 아버지마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유혜선 여사도 쓰러져 버렸는데, 죽지는 않았지만 풍을 맞아 반신불수 된 것으로 부족해 반쯤 정신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아들이 태어난 날, 온 가족이 엉망이 된 것에 놀란 유초혜 여사도 반쯤 미쳐 버렸다.

유명선 회장이 자기 아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면 유초혜 여사는 물론이고 막 태어났던 간난 아기인 장남 유건영도 죽었을지 모를 아찔한 순간이 있었을 정도였다.

유명선 회장이 상상을 초월하는 실력과 카리스마로 쓰러진 장모와 정신줄 놓은 아내와 가족의 죽음에 놀라 병까지 들어버린 자식들을 돌보는 동시에 회사를 휘어잡고는, 한 몫 뜯어 먹어보려고 덤벼든 정치인, 깡패, 경쟁회사 등을 다 때려잡고 역으로 회사를 확장하는 기회로 삼지 않았다면 성화 그룹이 역사의 뒤로 사라졌을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문제가 없었다.

유혜선 여사는 이 일이 결코 그냥 있는 일이 아니라고 겁을 먹고 있었지만, 모친에게 나름 물려받은 것이 있었던 유초혜 여사조차 선대들의 죽음이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잊어 가던 그 무렵 다시 일이 터졌다.

장남 유건영이 16살 되던 생일날, 미국 출장 중이던 유명선 회장이 갱과 경찰의 총격전에 휘말려 총에 맞았다.

유건영 회장이 총에 맞은 시각은 장남이 태어나던 정확한 바로 그 시각이었다.

유명선 회장이 그냥 단순한 기업가가 아니라 무관 가문의 후예로 평소 몸을 단련해 두지 않았다면, 총격이 일어난 장소가 총상 환자 치료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병원 인근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외국 대기업 총수가 총상을 입은 것에 놀란 미국 국무부와 상공부가 국가 차원에서 나서서 병원에 압력을 가해서 최고의 의료진이 우선적으로 수술에 임하지 않았다면 유명선 회장은 그때 거기서 죽었을 것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이어서 유건영이 결혼하던 날, 원래 신혼부부가 타고 가기로 예정되어 있던 여객기가 추락했다.

어머니 유혜선 여사의 강압으로, 유초혜 여사가 외부에 알리지 않고 하루 동안 집안에 아들 부부를 잡아둔 상태였기 때문에, 사돈댁을 포함한 외부에서는 이들 부부가 죽은 줄 알고 난리가 났었다.

그 후 유건영의 첫 딸이 태어나던 날도, 그 장손녀가 초경을 치렀던 날도 대형 사고가 터졌고, 계속해서 비슷하게 특별한 날이 되면 집안의 누군가가 죽을 뻔하고 실제로 죽은 사람도 있었다.

남들은 다 그냥 우연이라고, 운이 없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신기를 다 잃었어도 원래는 잘 나가는 무당이었던 유혜선 여사나, 그런 어머니에게 어렸을 때 조금은 배운바 있는 유초혜 여사나, 유씨 가문의 역사를 알고 있는 유명선 회장이나 유준선 부회장은 그걸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특히 유혜선 여사는 이대로 가면 장손녀가 14살이 되는 날에는 틀림없이 큰일이 일어날 거라고 믿었다.

유혜선 여사는 그것도 그냥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려 했지만, 유초혜 여사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유초예 여사는 액막이를, 집안의 악운을 대신 뒤집어쓸 산제물을 만들기로 했다.

여기까지 듣고 있던 고주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산제물이요?”

“응, 산제물. 고 과장도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는 알지? 원래 신에게 바치는 최고의 제물은 자기 혈육 그중에서 장남이 최고야. 형수님은 때마다 덮쳐 오는 액운이 과거 가문과 맺어진 신이 한눈판 사이 도망간 무녀들, 그중에서 당대의 무녀라고 할 수 있는 형수님에게 벌을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처음에는 형을 노렸는데, 형은 워낙 대단하신 양반이라 그 신도 건드리지 못했고, 그래서 대신 장남인 건영이를 노리는 것이라고. 그렇다고 애지중지하는 장남 건영이를 제물로 바칠 수는 없잖아. 그래서 형수님은 가문에서 수백 년 만에 태어난 아들인 건영이를 지키기 위해 건영이 대신 받칠 제물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

고주희는 할 말을 잃었다.

비과학적 무속에 빠져 아들 대신 다른 사람이 죽여서 아들의 액막이를 하겠다는, 그것도 자기 핏줄로 그 짓을 하겠다는 유초혜 여사의 개념이 소름 끼치도록 혐오스러웠다.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겠는데, 계속 들어봐.”

유준선 회장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