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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107화 (107/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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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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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 Do It Yourself - 8

차민영은 우선 길게 심호흡부터 한번 했다.

머리에 순간적으로 열이 확 솟기는 했지만, 이내 차갑게 식혀 버렸다.

정말 안 좋은 소식이기는 한데, 그 정도로 이성을 잃기에는 그녀의 인생이 전반적으로 너무 엉망이었다. 이 정도는 사실 그녀가 기본적으로 대응 방법을 고민하던 일상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들은 직후 나온 그녀의 말도 고주희의 예상과는 꽤 달랐다.

“흠. 혹시 수연이 년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 알아요? 항공사에 정상 근무 중이기는 해요?”

고주희는 살짝 감탄했다. 그녀는 차민영이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누가 자신을 노리고 있는 것인지부터 확인할 줄 알았다.

“항공사에는 이미 사표 냈더군요. 아마 이 일이 아니어도 슬슬 항공사 승무원 일은 정리할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확한 위치까지는 애매하지만, 한국 내에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출입국 관리소를 통해 출국 여부를 확인한 결과였다. 통신 위치 추적까지 하면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성화 통신이 아무리 계열사라고 해도 개인 정보 사찰은 함부로 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차민영에 대해서는 사실 상시 감시 중이었지만, 그건 로열패밀리 관련 경호 대상이라서 회장님 수준에서 허락받아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고주희가 사소한 일로 함부로 그런 걸 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일단 한국이라는 확정받은 차민영은 다시 한번 차수연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여전히 ‘전화기가 꺼져있어’로 시작되는 안내 소리가 들려왔다. 차민영은 그냥 이게 진짜로 전화기가 꺼져있다고 이해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자기 전화를 차단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면 협박받고 있다고 하니 원래 쓰고 있던 이 번호 자체를 안 쓰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

“혹시 내가 거는 번호 말고 다른 번호 알아요?”

통신 내용 추적과 달리 명의 확인 자체는 불법의 소지가 매우 적어서 확인이 쉬웠다.

고주희가 곧바로 대답했다.

“010-XXXX-XXXX 번은 통화가 될 겁니다.”

차민영은 자신의 통신 내용 정도는 당연하다시피 확인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려는 연기도 없이, 원래 어떤 번호로 연락하고 있었는지는 아예 묻지도 않는 고주희의 태도에 혀를 찼다.

사실 핸드폰 통신사로 성화 통신을 쓰는 상황이니 이 정도는 예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기분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성화의 힘이라면 다른 통신사 이용한다고 별로 다를 것 같지도 않았다.

또 그녀의 회사가 성화 통신에서 발주받아 처리하는 매출만 일 년에 20억 이상이고, 그걸 포트폴리오 삼아서 따내는 관련 매출도 30억은 되는데, 50억이나 되는 매출과 관련된 관계 회사 두고서 다른 통신사 쓸 상황은 아니었다.

이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지금 당장 중요한 일도 아니고.

차민영은 고주희가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반응이 조금 달랐다.

신호가 가자마자 곧바로 ‘전화기가 꺼져있어’로 시작되는 문구가 나오던 이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신호가 좀 가다가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로 시작되는 문구가 나왔다. 이건 상대가 번호를 확인하고 통화를 거절한 것이었다.

차민영은 일단 차수연이 전화를 확인한다는 것 자체는 알았으니, 문자를 보냈다.

- 개한테 물렸다고 들었다. 당장 전화 안 하면 너의 어머니에게 연락하겠어.

차민영의 핸드폰에 방금 그녀가 문자를 보낸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오는 것에는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 선배!

차수연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차수연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차민영이 그 부분을 건드린 것에 대해서 그녀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하지만 차민영은 그런 그녀를 차갑게 압도했다.

“닥쳐. 너를 문 그 개새끼가 너만 노리고 있는 거 아니야. 지금 당장 짐 싸서 우리 집으로 와. 출발하면서 도착 예정 시간 찍어서 보내고. 연락 제때 없으면 진짜 네 어머니에게 연락할 거야. 이건 공갈 아니야, 끊어.”

자기 용건만 말하고 차민영은 칼같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내 벨이 다시 울렸지만, 차수연의 번호를 확인하고 통화 거절을 눌렀다. 차수연은 몇 번 더 통화를 시도하다가 안 되자 이번에는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는데, 차민영은 그것도 씹었다. 대신 답장으로 차수연 어머니의 핸드폰 번호를 보내서 침묵시켰다.

고주희는 그 광경을 감탄을 담아 바라보았다.

사실 고주희는 오랫동안 차민영을 지켜봐 오면서도 차민영에 대해서는 그냥 남자 보는 눈 지지리도 없는 병신같은 창녀라는 이미지만을 가지고 있었다. 업무적으로 제법 유능하기는 해도 그 정도는 그녀 주변에 있는 수많은 엘리트에 비하면 별거 아니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벌어진 일로 차민영의 주변에 대해 훨씬 더 세밀하고 정밀하게 확인하는 과정에서, 차민영이 감춰두고 있던 진면목에 대해서 어느 정도 눈치채게 되었다.

고주희가 자기 손에 장악되고 있다고 생각하던 차민영의 회사도 언제든지 차민영이 원하면 곧바로 알맹이만 빼서 새로운 회사로 변신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IT 관련 회사의 진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주요 직원들이 차민영에게 완벽하게 장악되어 있었다.

고주희가 비밀리에 연결해 준 성화 그룹 계열사들과의 거래도 이제는 차민영이 실력으로 인정받는 상태였다. 고주희가 마음먹고 자르려면 자를 수야 있겠지만, 별로 좋은 소리는 들을 수 없을 터였고, 차민영은 성화 쪽 일거리가 없어도 다른 곳에서 얼마든지 일을 따낼 수 있을 정도의 명성을 쌓은 상태였다.

과거에 대한 편견을 거두고 보니, 정말 새삼스럽게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남자 보는 눈도 남자관계도 정말 최악이라는 점에서 닮고 싶지는 않았다.

통화를 끝내자 가방을 정리하고 몸을 일으키는 차민영의 행동에 고주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안 들을 건가요?”

이어진 차민영의 대답은 최악이었다.

“그건 집에 가서 같이 듣기로 하죠. 그이랑.”

차민영이 비릿하게 웃으면서 덧붙였다.

“같이 갈 거죠?”

가능하면 유진을 피하자는 마음으로 차민영을 찾아왔던 고주희의 마음속에서는 욕설부터 튀어나왔다.

‘이 씨발년이!’

하지만 비틀리는 얼굴 근육을 최대한 진정하려고 노력하면서 입으로는 다른 대답을 해야만 했다.

“물론이죠.”

서로 웃고 있는 표정이었지만, 마주 보고 있는 여자 둘 다 완전히 썩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표정들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예전과 같은 방식을 썼다.

차민영의 차에 고주희가 동승 했고, 고주희의 차는 그녀의 수행원들이 끌고 따라왔다.

차민영은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부드럽고 유연하게 운전했고, 둘은 가는 길 내내 침묵했다.

사실 고주희는 궁금한 부분이 있었다.

이 일은 차민영의 과거를 그녀를 쫓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거는 같은 여자 처지에서 보건대, 정말 비참하고 참혹하며 더럽게 혐오스럽고 끔찍한 것이었다.

고주희는 차민영이 이 일에 대해서 유진에게 어떻게 이야기할지 궁금했다. 그리고 유진이 차민영의 과거를 알게 된 후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했다.

유진의 성향은 앞으로의 고주희의 일에도 중요한 부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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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먼저 도착한 것은 의외로 차민영과 고주희가 아니라 차수연이었다.

서울의 강남에서도 역삼동에 사무실이 있는 차민영에 비해, 차수연은 서울을 피해서 송도에 머물고 있었다. 덜 복잡해서 눈에 띄기 좋기는 하지만, 여러 유명 기업들이 입주해 있는 최첨단 시설을 갖춘 부유한 지역인지라 치안 상태가 서울보다 훨씬 좋기 때문이었다.

송도는 강남에 비해 차민영의 집인 김포에 훨씬 가까웠다.

차수연은 이번 사태의 원흉이 된 주다혜와 함께 도착했다.

유진이 지하 주차장에 그녀들을 마중했다.

“오랜만이에요, 유진.”

차수연은 마지막 유진과의 만남을 생각하며 어색하게 인사를 했고, 주다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젊은 남자의 모습에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진은 차수연을 보고는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냥 놀러 온 거 아니군. 좋은 일로 온 것도 아니고. 저건 문제의 원흉인가?”

유진이 차민영에게 받은 연락은 그냥 차수연이 오늘 방문 예정이니 지하 주차장 문 좀 열어주라는 것이 전부였지만, 유진은 차민영의 목소리와 차수연의 표정 그리고 함께 딸려온 여자의 모습만을 보고도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여자 심리에 대해서는 전혀 반응도 하지 않는 그의 눈치와 본능은, 이런 트러블 계열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예지 가깝게 발휘되고 있었다.

당연히 유진은 기분이 상했다.

아직 수영장 놀이 시간이 끝나지 않아서 아이들도 한참이었고, 놀러 온 엄마들도 한참 수다 중이었다. 그들이 말썽에 엮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일찍 돌려보내야 했다.

소진이와 아이들과의 물놀이와 간식 타임은 유진의 즐거움이었다.

차수연에게 별로 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녀도 아니고 그녀가 데려온 다른 사고뭉치로 인해 그 즐거움이 방해받았는데 기분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목소리가 아주 쌀쌀하고 위압적이었다.

“집에 손님들이 있어서 그 사람들 돌려보내고 데리러 오지. 시간이 좀 걸릴 거다. 그때까지 다른 곳으로 움직일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있도록.”

유진이 매정하게 말하고는 위로 올라가자 그때까지 유진의 분위기에 눌려 꼼짝도 못 하고 있던 주다혜가 뒤늦게 짜증을 냈다.

“저건 뭐예요, 언니? 큰언니가 고용한 경호원이라도 되는 거예요? 자기가 뭐라고 손님에게 저렇게 고압적이에요?”

물론 진짜 경호원일 거로 생각하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경호원이 반바지만 입은 상의 탈의 차림으로 근육 자랑하면서 돌아다니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차마 차민영이 샛서방이라도 들인 거냐고 말할 수는 없어서 말을 돌린 것뿐이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짜증을 내는 진짜 이유는 젊은 남자가 자신을 보고 아무런 반응도 없다는 점이었다. 현직 모델로 미모와 몸매로는 어디서 다른 사람에게 밀려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자신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되려 짜증을 내는 유진의 태도에 자존심이 좀 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수연은 조금 많이 당황하고 있었다.

차수연이 기억하는 유진은 어딘가 좀 맹한 구석이 있고, 사회 경험 부족해 보이며, 먹을 것 좋아하고, 장난치는 거 좋아하는 조금 특이한 남자일 뿐이었다.

차민영이 위험한 남자라고 하기는 했지만, 그건 그의 육체적, 성적 능력을 표현하는 일종의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치 없고 생각 없는 주다혜와 달리 차수연은 지금 유진에게서 진짜 위험한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국제선 항공기 승무원으로 10년 이상 근무하면서 쌓아온 안목이 위험 신호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어진 주다혜의 철없는 소리도 칼같이 잘라 내었다.

“언니, 저 남자가 저렇게 말했다고 지하 주차장에 계속 있을 수는 없잖아요. 일단 올라가요. 올라가서 큰언니 기다리자고요.”

“닥쳐.”

“언니?”

“이따 선배 보면 뭐라고 변명할지나 고민하고 있어, 이 병신아. 선배 성격에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흥, 지금 와서 큰 언니가 그냥 넘어가지 않으면 어쩌겠다고요. 지금이 5년 전 인 줄 알아요?”

차수연은 철없는 소리 하는 주다혜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무시했다. 그리고 내렸던 자신의 자동차 뒷문을 열고 뒷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큰소리치던 주다혜도 눈치를 보다가는 슬그머니 보조석 쪽으로 들어와 앉아서는 입을 다물었다. 입술 쭈뼛거리는 것이 불만이 있는 듯 보였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곧 도착한 차민영과 그녀의 동행이 유진이 손님 보내고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는 말에 지하 주차장에 그냥 대기하는 것을 보면서 표정을 굳히고 입을 다물었다.

집주인인 차민영이 눈치를 보는 남자라는 존재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유진이 그녀들을 데리러 내려왔고, 같이 1층으로 향한 4명의 여성은 어째서인지 모두 유진이 앉아 있는 소파를 중심으로, 아래쪽 카펫에 반쯤 무릎을 꿇는 듯한 자세로 둘러앉아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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