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108화 (108/196)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재미있게 보셨나요?

재미있으셨다면 [추천]과 [즐겨찾기 등록] 부탁드립니다.

#008 Do It Yourself - 9

오늘 처음 이 집에 방문해서, 처음 유진을 보는 주다혜의 입장에서 지금의 자리 배치는 매우 이상했다.

현재 자리 배치는 명백하게 어린 남자인 유진이 4명의 여성을 상대로 주도권을 쥐고 압도하고 있는 상황을 보이고 있었다.

주다혜는 사실 유진에 대해서 별로 어려움을 느끼고 있지 않았지만, 다른 일행들이 다 조심스러워하는 태도가 노골적이다 보니 자신도 그녀들을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모습이 매우 어색했다. 그리고 의아했다.

주다혜 자신이야 처음 보는 사이에 큰 소리 낼 상황이 아니니 그렇다 쳐도, 차민영과 차수연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그녀들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상했다. 처음 보는 사이지만 차민영과 함께 온 일행으로 보이는 여자도 척 보기에도 만만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기에 더욱 그랬다.

어색하게 침묵이 오가며 여자들끼리 잠시 눈치를 보는 시간이 지나다가, 차민영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소진이는?”

“남은 간식 다 들려서 지아네 집으로 보냈어. 그 집에 게임기 있어서, 거기서 다들 모여서 게임 하기로 했어. 이따 저녁 식사 시간 전에 데리러 가야지.”

대화는 간략하게 끝나고 다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유진이 은근슬쩍 내비치는 압력에 점점 더 참기 어려워진 고주희가 자신이라도 나서서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 찰나에 차민영이 한숨을 내쉬며 본론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유진을 빼고 듣고 있던 모두를 기겁하게 했다.

“저기 처음 보는 애 이름은 주다혜. 올해 27살. 나랑 수연이처럼 죽은 그 사람 성노예 중의 하나야. 우리 중에서 제일 어린아이였고, 기간은 한 1년 정도? 수연이랑 같이 오는 줄은 몰랐는데, 여기 있는 거 보니 쟤가 오늘 문제의 원흉인 것 같아.”

어떤 문제인지보다 사람 소개부터 먼저 했고, 그 소개 내용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얼떨결에 처음 보는 남자에게 죽어서도 지켜야 할 비밀을 폭로 당한 주다혜는 눈이 찢어지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로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고, 차수연과 고주희도 설마 차민영이 유진에게 과거 이야기를 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어서 입을 떡 벌리고 놀랐다.

이어서 차민영은 주다혜에게도 유진을 소개했다.

“여기는 내 애인이자, 요즘 나랑 같이 우리 딸 키우고 있는 유진. 올해 스물 한 살.”

이 소개를 하면서 차민영은 애인이라는 소개에 유진이 혹시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서 조마조마했다.

사실 차민영이 제대로 대화를 진행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던 이유가 이거였다.

오늘 일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유진을 애인이라고 소개해도 괜찮은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굳이 소진이 이야기를 소개 뒤에 붙인 것도 유진에게 어필하려는 이유였다.

무척 다행히도 유진은 애인이라는 그녀의 소개에 아무 느낌도 없어 보였다. 그건 그 소개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차민영은 굉장한 안도감과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그다음은 알바 아니었다.

차민영은 가볍게 이후의 일을 전부 고주희에게 던져 버렸다.

“여기 고 과장이 누가 옛날 일을 약점으로 잡아서 수연이랑 나를 노리고 있다고 알려줘서 이 자리가 만들어졌어. 자세한 이야기는 고 과장이 해주기로 했어.”

차민영을 바라보고 있던 유진의 시선이 고주희 쪽으로 이동했다.

유진을 주시하고 있던 고주희는 차민영을 바라보는 중에는 그래도 인간 같아 보이던 유진의 눈빛이 자신을 향하면서 굶주린 호랑이 느낌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다시 한번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년! 씨발 새끼!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나 평소 유진 못지않게 무서운 유초혜 여사에게 단련되어 있던 고주희는 유진에 대한 두려움을 표 내지 않고 견뎌내었다. 유진이 그나마 덜 무섭게 굴고 있다는 것과 세 번쯤 만나게 되면서 눈곱만큼 익숙해진 것도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고주희도 차민영처럼 굳이 자기가 책임질 필요 없이 더 만만한 인간에게 떠밀었다.

“최근 미스터와 차 이사님 주변을 좀 조심스럽게 살피다가 불온한 움직임을 발견했어요. 누군가 차 이사님에 대해 뒷조사하면서, 차 이사님 회사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있더군요. 배후로 몇몇 의심 가는 인물들이 떠올랐는데, 그 인간 중에서 차 이사님 유부녀 시절에 인연이 있던 인간들이 있었어요. 관련해서 당시 관계자들 조사해보다가, 최근 차 이사님이 가까이하고 있던 차수연 씨가 협박받고 있다는 정황이 있어서 이게 따로 떨어진 일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어요. 그래서 안전을 위해서 차 이사님에게 알렸습니다. 이게 다입니다. 더 정확한 이야기는 저쪽 당사자들에게 들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고주희는 언어 선택에 조심성을 발휘하며 상황을 설명했다. 차민영이 과거를 다 공개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 입에서 들으면 어떤 느낌일지 알 수 없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정보도 이것보다는 더 자세히 알고 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필요한 만큼만 말했다.

세밀하고 정확한 정보는 그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출처 확인할 수 있는 법이었다. 유진에게는 상관없고, 차민영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차수연이나 주다혜라는 여자에게 공개할만한 부분이 아니었다.

유진은 더 추궁하지 않고 시선을 주다혜로 보냈다.

그리고 유진과 눈이 마주치자 주다혜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어린 남자 따위라거나, 왜 다른 여자들이 쟤를 저렇게 어려워하지, 같은 지금까지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던 의문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이야기는 그냥 비유다. 생명체는 갓 태어났을 때라도 자신을 죽이려는 존재의 노골적인 의지를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생존본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현대인이 과거에 비해 안전불감증이 좀 심하다고 해도, 그건 눈앞의 살의조차 못 느낄 정도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물며 유진은 의지로 물리 영역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초능력자였고, 그 몸에 쌓인 위압과 살기도 적지 않았다. 고주희가 유진을 보며 늘 야생 살인 호랑이를 떠올리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미리 어느 정도 경계라도 하고 있었으면 모를까, 오히려 약간 얕잡아보다가 정통으로 그것과 마주친 주다혜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다혜는 경기가 들린 사람처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그저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그나마 이전 언젠가의 차민영이나 고주희처럼 속옷에 실수까지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유진이 어느 정도 봐주고 있기 때문일 뿐이었다.

그녀가 대답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판단한 유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마지막 상대인 차수연에게로 향했다.

차수연에게는 몹시 다행스럽게도 유진은 그녀에게 약간이지만 호감이 있었다. 그래서 고주희나 주다혜에 비해서 태도가 온건한 편이었다.

그 온건한 정도로도 차수연은 기겁할 정도로 겁을 먹었지만, 생각과 말을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차수연이 주다혜를 대신해서 자기 관점으로 빠르게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게 일주일 전이었어. 갑자기 회사 직원들 메일로 일종의 폭로 사진이 돌았어. 여러 남자와 여러 여자가 함께 나오는 단체 섹스 사진이었고, 사람 얼굴은 없었지만, 그걸로 여기 나오는 사람들이 누군가 해서 난리가 났지. 직원들 간에 단체 스와핑 모임이라도 있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아무리 얼굴이 없어도 모를 수가 없더라. 거기에 있는 나랑 이년 모습을. 씨발. 미리 사직하겠다고 알리고 상담 중 아니었으면 내가 아주 웃기는 꼴이 되었을지도 몰라, 정말. 어쨌든 난 이미 퇴사 절차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그 대상으로 내가 거론되지는 않는 상황으로 회사를 빠져나왔지. 그러고 약간 시간이 지나더니 나한테 직접적으로 연락이 오더라고. 자기들 말 안 들으면 회사에 얼굴 나온 상태로 사진 퍼트리겠다고. 그래서 그 새끼들에게 웃으면서 말해줬지. 난 이미 회사 그만뒀다고. 그리고 거기 나오는 남자들이 누군지는 아냐고. 원하면 맘대로 해보라고. 너희들과 너희 가족 시체가 공구리 친 드럼통에 담겨 인천 앞바다에 수장되는데 며칠이나 걸릴지 한번 지켜봐 주겠다고. 그 병신같은 새끼들은 이게 얼마나 큰일인 줄도 모르고 손을 담근 것 같더라.”

차수연은 나름 쌓인 것이 있었는지 폭풍같이 수다를 퍼부었다.

조금 열받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폭로에 대한 걱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걱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녀의 말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 건은 너무 큰 건이었고, 폭로되면 사람 여럿 죽어 나갈 일이었으며, 폭로되어도 권력이 동원되어 묻혀 버릴 일이었다.

강준화의 사후, 그녀들은 성노예이자 매춘부로서의 상황을 정리하면서 자신들이 겪은 그 끔찍한 경험 자체에 괴로움을 느꼈을뿐, 그 일이 자신들의 미래를 위협하리라고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들이 매춘으로 상대한 남자들이 그런 걸 걱정 하기에는 너무 거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길거리에서 잡부를 상대로 몸을 팔면 창녀지만, 오직 왕을 위해 준비해서 몸을 받치면 궁녀이고 후궁이다. 그녀들도 약간 비슷했다.

그녀들의 상대가 재벌 회장이나 장차관급 관료, 정당 중진이나 당대표 같은 거물 정치인, 법원장이나 검사장, 언론사 사주 같은 누가 봐도 표가 나는 최고 거물들은 아니었다.

대신 재벌가 3~4세, 행정고시 합격한 5급이나 4급의 중견급 고위 공무원, 중견급 판사나 검사, 언론사 사주의 자식이나 손자, 중견 기업가 그리고 비교적 젊은 초선이나 재선 국회의원이나 신진 정치인 같은 티가 나지 않으면서도 나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 그녀들이 상대한 대상이었다.

그녀들의 과거를 가지고 협박 같은 것 하기에는 너무 가진 것이 많으면서도, 비밀을 지키겠다고 그녀들을 처리 같은 것 하기에는 나름 걸리는 것이 많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또한 서로 누군가 함부로 이일을 문제 삼지 못하도록 상호 견제해야 하는 사이이기도 했다.

강준화 사후에 혹시나 강준화가 남겼을 정보를 걱정해서 약간의 혼란이 일어났으면서도 공권력이나 대형 폭력 조직 같은 엄청난 뭔가가 동원되지는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강준화 본인이 그들과 같은 이너서클 내부의 일원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들은 강준화가 문제가 되지 않도록 일을 처리했으리라고 믿고 이 일을 적당히 과거로 묻어 버렸다.

생전에 강준화의 일 처리는 그 정도로 깔끔하고 믿음을 주었으며, 그 이후로 실제로 그들에게 그와 관련한 문제가 발생하지도 않았다. 강준화가 미리부터 여자들에게 철저하게 교육 시켜 둔 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반대로 이후로 여자들 쪽에도 차민영이 강준화가 남겼을지 모를 자료를 걱정해 약간 감시를 받은 것과 성화 쪽의 마크를 받은 것 외에 관련해서 과거가 문제가 된 적이 아직 없었다. 최소한 차민영이나 차수연이 아는 범위 내에서는 그랬다.

따로 설명은 없었지만, 유진과 주다혜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런 기본적인 상식이 있었기 때문에 차수연의 말을 쉽게 이해했다.

유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런 사소한 일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냥 폭로해도 문제가 안 된다고 이해하고 넘겼다.

“그런데, 이 병신 같은 것이.”

차수연이 중간에 한숨을 아주 길게 한번 쉬어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배우나 유명인을 부자들과 스폰서로 연결해주는 브로커 연락을 받고는, 그걸 옛날 준화 씨 생각해서 별로 고민도 안 하고 받아들인 거야. 그러다가 어떤 병신에게 물린 거지. 씨발. 그러다가 폰이 털려서 거기에 남겨두었던 내 정보도 같이 털리고! 이 병신 같은 년! 그런 것 남겨두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었는데!”

나름 차분하게 설명하던 차수연은 이야기하면 할수록 솟구쳐 오르는 화를 참아내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이야기를 마쳤다.

차민영과 고주희는 이 어이없는 이야기에 혀를 찼고, 당사자인 주다혜는 쥐구멍이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에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사정 이야기를 다 들은 유진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래서 그게 무슨 문제인데? 어차피 수연 씨 폭로에 걱정할 일이 없다면 상관없는 것 아닌가? 다혜 씨 문제야 다혜 씨가 해결할 일이지. 창녀가 되든 마루타가 되든 그건 그녀의 일이지 우리가 알 바는 아닌 것 같은데?”

그 세상 다 얼려 버릴 것 같은 차가운 반응에 당사자인 주다혜는 물론, 차민영도 고주희도 차수연도 모두 서로 다른 이유로 얼어 붙어 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