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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112화 (112/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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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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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 Do It Yourself - 13

주다혜는 마음이 꽤 풀어져 있었다.

원래는 숨어다니면서 심하게 마음고생하고 있었고, 어제 일의 심각성을 알게 되고 유진에게 직접적인 압박까지 받는 상황에서는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다.

끝내 주게 맛있는 저녁을 배불리 먹으며 몸과 마음이 풀어졌고, 차민영과 차수연과 소소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마음의 안정도 가질 수 있었다. 편한 잠자리에서 편하게 잠을 잤고, 아침에 끝내 주게 시설 좋은 욕실에서 편하게 몸도 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 식사!

따뜻하게 구운 햄토스트와 과일과 채소를 섞어서 달콤새큼한 소스를 뿌린 샐러드와 달걀프라이 그리고 막 갈아서 만든 사과주스 혹은 막 내린 커피의 조합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어젯밤 저녁 식사같이 무한 리필이 아니라 각자 양이 정해진 식사였지만,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맛과 양 이었다.

‘이게 진짜 행복이지. 큰언니 졸라 부럽네.’

주다혜는 차민영을 힐끔거렸다. 차민영은 네글리제 위에 가운 하나 걸치고는 우아한 모습으로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막 자고 일어난 모습이었다.

이 아침식사도 차민영이 준비한 것이 아니라, 유진이 차민영 자는 동안 준비해서 일어나서 씻기만 하면 먹을 수 있도록 다 준비한 것이라는 뜻이었다.

또 이 와중에 아직 어린 소진이가 편하게 밥을 먹도록 신경 쓰고 돕고 있는 것조차 차민영이 아니라 유진이었다.

차민영은 그냥 우아하게 먹는 것에 열중하기만 하고 있었다.

주다혜는 아침 식사 내내 감탄과 함께 차민영에게 대한 질투를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걸 질투하지 않는다면,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위해 아침을 준비해본 적이 없는 여자일 것이다.

강준화가 죽고 유진이 첫 남자인 차민영이나, 두어 번 연애 시도하다가 포기한 차수연과 달리 그사이에 짧은 기간이지만 남자친구 사귀면서 반쯤 동거를 해 본 경험이 있었다.

꽤 사랑해서 시작한 동거였는데, 결국 동거 기간 중의 집안일과 가사 노동 등의 문제 때문에 남자친구와 헤어진 경험이 있는 주다혜는 이 상황에 도저히 부러움과 질투를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맛있게 먹고, 푹 쉬고, 눈치 주는 사람도 없는 환경에서 주다혜는 그런 쓸데없는 질투까지 할 정도로 푹 마음이 풀어져 있었다.

유진과 단둘이 남겨지기 전까지는.

차민영이 원격 재택근무를 위해 빈방 하나 정리해서 자리를 잡고, 유치원 안 가도 되는 소진이가 아침부터 일찌감치 수영장으로 향하고, 차민영 대신 소진이를 챙길 책임을 지게 된 차수연이 어째서 챙겨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수영복을 입고 소진이 따라 수영장으로 향한 후, 부엌에는 유진과 주다혜만 남았다.

주다혜는 이 상황에 처음에는 별로 그렇게 긴장하지 않았다. 맛있는 것 많이 먹여주고, 어린 소진이에게 계속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던 유진에게 내적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둘이 되는 순간 그게 자신의 엄청난 착각이라는 것을 순식간에 깨달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유진의 눈에서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라, 유리 조각같이 무감각하고 차가운 눈빛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다혜는 슬프게도 이런 눈빛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이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고 있었다.

이건 사람을 사람이 아닌 어떤 것으로 보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자신과 동등하지 않은 사람을 넘어서, 살아있는 인격체가 아닌 사물이나 물건 심하게는 그냥 고기덩어리 정도로 여길 때의 그런 눈빛 말이다.

약간 들떴던 주다혜의 마음은 싸늘하게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렸고, 그녀는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그런 주다혜에게 유진이 차갑게 말했다.

“수연씨에 키 받았지? 운전은 네가 한다. 가자.”

주다혜는 그렇게 기가 팍 죽은 상태에서 유진과 함께 차수연을 차를 몰고 약속 장소를 향해 출발했다.

어젯밤 차수연이 그녀 대신 최명선 실장과 약속을 잡은 장소를 향해서.

** ** **

최명선은 자신의 애마인 벤츠를 몰고 주다혜와의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녀는 백미러로 자신의 차 뒷좌석에 앉은 두 젊은 남자를 힐끔 바라보며 짜증을 냈다.

“이걸로 정말 끝이야. 너희들 이번에도 일 제대로 못 하면 난 그냥 손을 뗄 거야. 너희들 형님에게도 내 말 똑바로 전해. 알아들었어?”

그녀의 차 뒷좌석에 앉아 있던 두 젊은 남자들은 그녀의 그런 말투에 화가 났지만, 그냥 못 들은 척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교적 멀쩡한 외모와 달리 그 둘은 깡패였다.

최명선의 부하는 아니고, 이번 일에 관련하여 최명선과 거래한 인물이 고용한 어떤 깡패의 부하들에 불과했다. 그들은 그냥 최명선을 따라가서 최명선이 지목한 여자 데리고 오라고 명령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

최명선이 왜 짜증을 내는지도 몰라고, 끽해야 늙은 포주 아줌마 따위에 불과한 최명선에게 반말을 듣는 것도 가오가 상해서 짜증이 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최명선이 자신들 같은 말단이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아서 조심하기는 했다. 하지만 앞으로 다시 볼 일 없을 것이 분명한 아줌마에게 굳이 예의를 차릴 생각도 없었다.

“씨발 새끼들.”

최명선은 이 모든 상황에 짜증이 나 다시 한번 욕설을 내뱉었지만,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최명선은 많이 초조했다.

최명선이 원래 알고 있던 계획대로라면 그녀가 이런 식으로 주다혜와 다시 접촉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었다.

워낙 큰 대가가 주어져서 고민 끝에 주다혜를 팔아먹었지만, 그건 그녀에게도 목숨을 건 결정이었다. 주다혜는 겁나지 않았지만, 이게 알려지면 동종업계의 종사자들은 아가씨와 고객들에 대한 신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최명선을 산산이 조각낼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계통에서 완벽한 비밀은 없었다. 언젠가는 이 일도 알려질 것이었다. 그때를 위해서 이 모든 일은 의뢰자가 최명선 모르게 주다혜를 납치했고, 의뢰자가 주다혜를 협박해서 가짜 이야기를 전하게 함으로써, 최명선은 주다혜가 그냥 이 생활에 환멸을 느껴서 떠났다고 알게 되는 것으로 시나리오가 만들어졌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최명선은 다시 한번 최고급 텐프로 술집을 운영할 자금과 인맥을 지원받기로 했다.

그 정도가 되니까 최명선도 이 위험한 일에 끼어든 것이었다.

원래 그 병신같은 의뢰인이 납치 감금했던 주다혜를 놓치지만 않았다면 아무 문제 없이 그렇게 될 일이었고,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의뢰인이 노리는 바가 있어서 일부로 주다혜를 풀어주고 미끼로 사용했다는 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가고 있는 지역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왜 굳이 밑바닥의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깡패 새끼들이 자신과 동행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약속 장소로 향하면서, 주다혜가 보낸 메시지를 보고는 아무 생각 없이 짜증을 냈다.

- 저 몇 분 늦을 것 같아요. 먼저 도착하면 연락해주세요.

“제가 먼저 약속을 정하고 늦는다고? 하여튼 제대로 하는 것이 없어. 시간을 지키는 것이 사회생활에서 신뢰를 형성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그렇게 구구절절 말해줬는데 제대로 하는 일이 없네. 내가 진짜 이런 것들 때문에 짜증이 나서.”

사람 팔아먹은 주제에 신뢰에 대해서 떠드는 그녀의 태도에, 약간 사정을 아는 뒷자리의 깡패들조차도 혀를 내둘렀다.

그러는 사이 네비게이션은 최명선의 차를 주요 도로에서 벗어난 좁은 2차선 도로로 안내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도로라고 하기도 뭐한 비포장 흙길로 안내하고 있었다.

최명선은 자신의 커다란 벤츠에 비해 너무 아슬아슬한 폭의 그 흙길에 더욱 짜증을 내면서도 조심스럽게 운전을 계속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옅은 언덕 비슷한 곳에 어설픈 숲과 나무들 사이로 난 막다른 길의 끝으로, 어떤 문 닫은 가든 음식점 앞 주차장이었다.

일단 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펴본 최명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도착한 장소는 꽤 황량한 곳이었고, 주변에 사람들의 이목도 없어 보였다. 오는 길에 본 작은 카페 등이 걸리기는 했지만, 어지간해서 여기서의 소란이 거기까지 들릴 것 같지는 않았다.

주다혜는 본인을 쫒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고른 장소겠지만, 최명선 입장에서는 그래서 눈에 띄지 않게 주다혜를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야, 너희는 주변에 일단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있어.”

그녀의 명령조 말에 기분은 나빴지만, 깡패 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주차장 한쪽의 창고로 보이는 녹슨 컨테이너 건물 뒤쪽으로 이동했다.

최명선은 주다혜를 기다리며 담배 한 대를 꺼내 물고 생각에 잠겼다.

주다혜에 대한 고민은 아니었다. 그런 건 이미 그녀의 뇌리에 없었다. 지금 그녀의 뇌리에 떠오른 생각은 우연히 알게 된 이 땅에 대한 것이었다.

‘서울에서 오는 길이 그렇게 멀지도 않았고, 한 10분 거리에 아파트 단지도 있지. 진입로 주변에 있는 카페들도 손님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았고, 여기 땅값이 얼마나 되려나? 제대로 개발하면 제법 쓸만할 것 같은데?’

자신을 믿고 따르는 주다혜가 오늘 자신의 배신으로 겪을 일 따위 보다는 땅 투자에 더 관심이 많은 그녀였다.

그리고 그렇게 주변 땅들을 둘러보던 그녀의 눈에,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보지 못한 젊은 남자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이 망한 음식점의 관계자일 거라는 생각에 최명선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일의 목격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 그 남자에게 변명하듯 말을 했다.

“아, 여기 관계자야? 허락 없이 들어와서 미안해. 아는 사람이랑 여기서 보기로 해서 주차했어. 약속한 사람만 오면 금방 나갈게.”

이 와중에도 상대가 젊다고 아무 고민도 없이 반말을 던지는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쨌든 최명선은 말을 하면서 주다혜가 도착했을 때 이 남자가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고민했을 뿐, 이 남자 자체를 위험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살게 되면 이런 경우를 그렇게 위험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상대방에게서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온 그 남자가 갑자기 몸을 비틀며 주먹으로 자신의 배를 후려치는 순간에도 그녀는 아무것도 몰랐다.

눈앞에 불꽃이 번쩍이고, 온몸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고, 숨조차 쉬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더러운 흙바닥을 뒹굴고, 평소 그렇게 아끼는 수백만 원짜리 명품 정장이 오물로 더럽혀지는 와중에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꺄아아악! 갑자기 무슨 짓이에요.”

아직 도착하지 않았어야 할 주다혜의 비명이 귓가에 들려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의 억센 손길이 자기 목을 죄어 오고, 숨이 막히는 가운데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는 자기 상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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