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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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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 Do It Yourself – 26 & 27
최명선은 심란한 마음을 복잡한 표정으로 나타내며 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진을 내려주고 기다리는 동안 정말 많은 갈등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가장 큰 고민은 당연히 그녀 자신의 목숨에 관한 것이었다.
유진의 손이 닿는 범위 안에 있는 동안에는 그녀도 어느 정도 포기할 수 있었다. 유진의 무서움에 대해 더 느낀 후에는 가족을 생각해서 살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결심까지 했다. 유진의 권총에 소음기를 돌려 끼던 장면은 그녀에게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유진이 기다리라는 말만 남긴채 그녀를 두고 사라진 이후로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오른발의 엑셀을 밟으면 이대로 사라질 수 있었다.
트렁크에 실린 시체를 가지고 경찰서를 찾아가 신고하는 방법도 있었고, 지금 비슷한 위험한 일을 겪게 될 때 쓰려고 몰래 사둔 별장에 숨는 방법도 있었고, 곧장 인천 공항으로 가서 아무 비행기나 타고 외국으로 떠나는 방법도 있었다.
조카들을 생각하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어쩌면 자기가 도망간 후 유진이 굳이 조카들을 찾아서까지 보복하지는 않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있었다. 그 아이들은 모두 이런 세계와는 아무 상관 없는 평범한 시민들이니 건드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유진을 내려주고 차를 세워두었던 곳에서 인근 가게 주인의 주의를 받고 차를 움직여야 했을 때 그런 생각이 절정에 이르렀다.
차량을 움직이다 만난 작은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회전하면 블록을 크게 돌아 이 동네를 계속 맴돌게 되지만, 직진하면 이대로 그냥 도망가버릴 수 있었다.
잠시 멈춰서서 고민하는 동안 뒤차가 크락션을 울렸다.
최명선은 그 소리에 놀라 엑셀을 밟았다. 그리고 손은 자연스럽게 운전대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최명선은 도망가는 대신 유진을 기다리는 것을 선택했다.
물론 살고 싶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조카들이 위험해질 가능성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 옛날 지옥 같은 창녀촌에 탈출한 다음 그래도 만신창이 된 몸과 정신으로나마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이, 아빠가 엄마가 오빠가 그녀를 외면하지 않고 받아주고 보살펴 주었기 때문이었다. 아니었다면 그녀는 죽었을 것이다.
지금 어떻게든 혼자 살아남는다고 해도, 지금껏 이룬 모든 것을 다 버린 채 알량한 돈 몇 푼 가지고 가족까지 다 잃은 채로 살아 봐야 아무 의미가 없었다. 조카들이 화라도 입는다면 오히려 제때 죽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비참하게 죽어갈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그렇게 고민 끝에 진짜로 자기 목숨을 포기했다.
목숨이 소중할 정도로 잘 살아온 것도 아니고, 욕심부리다가 배신하면 안 되는 사람 배신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이니 억울한 마음도 가지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반대의 이유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계속 차를 주차해둘 수가 없어서 도로를 빙빙 돌고 있었다. 이러다가 유진이 돌아왔을 때 그녀와 차가 자기가 내린 자리에 없는 것을 보고는 그녀가 도망간 것으로 여길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점점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그녀를 쫓아낸 가게 주인과 싸우거나 그 가게를 이용해서라도 그 앞에 차를 대놔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였다.
원래 약속한 장소도 아닌 곳에서 갑작스럽게 잠가져 있어야 할 뒷문을 벌컥 열고 탑승한 유진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안도감을 더 크게 느낀 것은.
** ** **
홍월이 있는 건물을 나선 유진은 최명선이 그를 내려준 위치로 곧바로 가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경우 아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 주목받지 않도록은 할 수 있었다. 사람은 단지 보인다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에 따라 인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걸 조절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기억에 머무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카메라는 다르다. 카메라들은 그냥 모든 것을 보고, 그것들을 아무 감정 없이 기록으로 남긴다. 거기에 유진은 사람들의 시선은 느낄 수 있어도, 카메라는 느끼지 못한다. 자기를 찍고 있는 누군가의 카메라나 보안 카메라가 없다고 확신할 수 없으니 최대한 동선을 꼬아둘 필요가 있었다.
원래 가야 할 곳과 반대의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좁은 골목길을 이용하고, 가끔은 가정집이나 벽을 뛰어넘어서 길이 아닌 곳으로도 이동했다. 그렇게 블록을 아주 크게 돌아서 목적지로 가다가 원래 위치가 아닌 곳에서 신호등에 걸려 있는 차명선의 차를 발견한 것이었다.
유진은 차 뒷문의 잠금장치는 염동력으로 열고 자연스럽게 뒷자리에 탑승했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자기에게 약간 놀라기는 했지만 당황하지 않는 최명선에게 유진이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도망치려고 하는 중이었나?”
“아니에요!”
떠보듯이 말하는 유진에게 최명선이 화들짝 놀라서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너무 과한 반응에 그녀가 실제로 도망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어도 고민과 갈등은 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굳이 탓하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오히려 도망가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어차피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물어본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넘겼다.
“아니면 다행이고.”
최명선이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신호가 바뀌었고, 성질 급한 뒤차가 클락션을 울려댔다.
최명선이 다시 차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차가 출발하고 내부가 조용해지자 유진은 우선 이번에 한발 사용한 권총 M1911부터 확인했다.
탈출 직후 어쩌다가 자기 손에 제일 먼저 들어온 이 총은 훌륭하게 관리된 그리고 특별히 커스터마이징도 되어 있는 명품이기는 했지만, 제조된 지 수십 년쯤 된 물건이기도 했다. 세밀한 관리가 필요했다. 소음기를 제거하고, 약실에 장전된 탄환도 빼고, 탄창을 빼서 남은 탄환과 탄창 상태도 점검하고, 약실 상태 등도 살폈다.
그러는 동안 최명선은 백미러를 힐끔거리며 유진을 바라보았지만,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유진이 M1911의 점검을 끝내고 도끼도 살펴볼까 하는 찰나에 최명선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혹시 트렁크에 실려 있는 시체 어떻게 처리하실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유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생각은 해두었다.
고주희가 아쉽지만, 정동후와 그 일행들을 처리했던 방식이 있었다. 장소도 이미 한번 사용했던 곳을 쓰면 그만이었다. 그날 이후 모녀는 그 방에는 얼씬도 하지 않아서 청소조차 나중에 유진이 해야했고, 그 안에 있는 가구들도 유진이 날잡아서 다 처리해주기로 약속도 한 상태였다.
모녀가 별로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거부하지도 못할 것이었다. 그녀들에게 그런 걸 거절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곳에서 살 뿐만 아니라 뼈까지 조각조각 갈아 버린 다음에 동네 공사장에 지어지고 있는 집의 조경수 뿌리에 적당히 파묻어서 비료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 외의 옷과 잡화들은 태워도 그만이고, 헌 옷 수거함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래도 굳이 최명선이 그걸 묻는 이유가 궁금해서, 설명은 하지 않았다.
“딱히 생각해 둔 방법이 없다면 뭔가 제안이라도 하려고?”
그냥 한번 던져본 유진의 말에 최명선이 반색해서 대답했다.
“가평에 별장이 있어요. 근처 마을과 거리가 좀 되고, 주변에 다른 별장 몇 개 외에 아무것도 없어서 사람 눈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무엇보다 굉장히 넓고, 부지가 거의 숲 수준이에요. 사람 몇 명 적당히 파묻어도 표도 나지 않을 거예요. 내가 거기 샀을 때 그렇게 묻혀 있는 시체가 이미 몇 개 있다는 소문도 있었을 정도예요. 가서 보면 실망하지 않을 거예요.”
유진은 약간 벙찌는 기분이 되었다.
아무리 지금 상황이 상황이기는 하지만, 죽음의 위기에 처한 여자가 사람 시체 파묻기 좋은 장소를 자랑하는 일은 유진에게조차 황당하게 느껴졌다.
‘이게 그 스톡홀름 증후군인 건가? 아니 그러기에는 시간도 상황도 안 맞는데?’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본인도 아는 최명선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가서 마음에 들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부탁?”
“살려달라고 하지는 않을게요. 대신 가서 보시고 마음에 들면 꼭 생각해봐 주겠다고 약속해 주실 수 있을까요?”
간절한 그녀의 요청에 유진은 잠깐 생각하다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주희 손 안 타도 되고, 집 근처로 굳이 시체 가지고 가지 않아도 되면 좋은 일이었다. 거기에 오늘 여러모로 특이한 점을 보이는 이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약속하지.”
“감사합니다.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최명선은 감사 인사를 하며 곧바로 차량 네비의 도착지 목록에서 별장을 골랐다.
차는 그녀의 별장이 있는 가평으로 출발했다.
차는 서울 시내를 통과해서 동쪽 강원도 춘천을 향하는 길을 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북한강을 옆으로 끼고 391번 지방도를 타고 달렸다. 그러다가 청평호 인근 어디에서 어느 순간 포장은 되어 있지만 도로라고 하기도 뭐한 길로 들어섰다.
차 두 대가 마주치면 한 대는 앞에서 오는 차가 지나가길 기다려야 하는 수준의 도로였고, 양옆으로는 수풀이 우거지거나 공사 중임을 알 수 있는 펜스가 처져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도로에 포장도 없었고, 오직 무성한 수풀과 나무만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길 끝에서 문이 나타났다. 어딘가의 주택 같은으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숲 한가운데에 생뚱맞게 문이 있는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차가 문 앞까지 다가가자 문이 천천히 자동으로 열렸다.
“차가 등록되어 있어서 자동으로 열린 거예요.”
굳이 필요한 설명은 아니었지만, 여기까지 오는 내내 이어졌던 침묵이 그렇게 깨졌다.
유진은 대답 없이 주변만을 계속 구경했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숲이 계속 이어졌다. 사실 숲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많이 부족한 나무가 많이 모여 있는 그런 땅이었지만, 숲이라는 말 외에는 따로 표현하기 애매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무로 둘러싸인 도로를 조금 더 들어가서 한쪽으로 꺾자 자갈을 깔아 만든 주차장과 주차장을 둘러싼 작은 관상목 너머로 나름 근사한 건물이 하나 보였다.
최명선이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유진은 별다른 말 없이 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폈다.
집과 주차장을 둘러싸고 적당히 잔디와 자갈로 공간을 확보하고 있기는 했지만, 시야가 닿는 곳 대부분이 나무로 가려져 있었다. 사람이 다니기 빽빽할 정도로 그렇게 우거진 것은 아니지만, 사람 사는 곳의 느낌은 아닌 곳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중간에 마지막으로 사람이 살거나 드나드는 흔적이 보인 곳이 3~400m는 떨어진 곳이었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정말로 사람 몇 죽어 나가고, 시체 몇구 땅에 묻혀도 티도 나지 않을 그런 곳이었다.
“마음에 드시나요?”
최명선의 질문에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군.”
“그럼 제 부탁 들어주시겠어요?”
“무슨 부탁이지?”
“제 시체가 사람들에게 발견될 수 있게 해주세요. 대신 당신 손 귀찮지 않게 제가 깔끔하게 자살할게요.”
다시 한번 듣게 된 생뚱맞은 그녀의 발언에 유진의 표정은 흥미진진 해졌다.
“무슨 생각인거지?”
유진이 반응이 호의적이자 최명선은 설득을 위해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최명선이 죽음을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결심한 순간 가장 원하게 된 것은 죽은 다음에 제대로 장례식을 치르고 싶다였다.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한다면 시체라도 온전히 남기고 싶었다. 부모님과 오빠 부부 옆에 미리 준비해둔 자기 납골당에 들어갔으면 했고, 제대로 사망 처리되어서 자기 유산이 조카들에게 온전히 전해지기를 바랐다.
시체까지 깔끔하게 처리되어서 실종으로 처리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그렇게 처리된 경우를 여러 번 본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남은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받는지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조카들이 실종된 자기를 찾아서 헤매기를 바라지 않았다. 요즘 사람치고는 너무 착한 그 아이들은 분명히 그럴 것이었다. 부모님과 오빠에 이어 조카들에게까지 자기 때문에 그런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제법 큰 욕심이지만, 얌전히 죽어준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깔끔한 유서 남기고 자살한다면 상대도 굳이 손 더럽히지 않아도 되니 나쁜 일 아닐것이라고 생각했다.
최명선의 그런 설명을 들은 유진은 웃었다.
이 여자는 정말 자기가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면을 골고루 보여주는 그런 여자였다. 죽이지 않고 써먹어 보려는 자신의 결정이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물었다.
“기왕이면 살고 싶지는 않고?”
유진의 질문에 최명선이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살고 싶었다. 어찌 살고 싶지 않겠는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죽을 결심을 하기는 했지만, 살길이 보인다면 살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최명선은 잠시 유진이 자기를 죽이기 전에 놀리려는 의도로 물어본 것이 아닐까 고민했다. 하지만 곧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모습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말했다.
“살고 싶어요. 살려 주실 건가요?”
“살려주면?”
“네?”
“살려주면 어떻게 할 거지?”
최명선은 고민했다. 보통이 경우라면 입 다물고 모른 척하고 이쪽으로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살겠다고 말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눈치로 보아서 이 남자가 원하는 것인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원하시는 것이 있나요?”
“너를 원하지.”
“네?”
“최근에 일하다 보니까 내 손으로 소소한 일까지 다 하는 것이 좀 매우 귀찮더군. 소소한 심부름을 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기왕이면 세상 물정에도 밝고, 내가 죽으라면 죽는시늉도 할 수 있으며, 내가 시키면 그 어떤 일도 망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어때 할 수 있겠나?”
최명선의 눈에 진짜로 살길이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덥썩 물지는 않았다. 그녀는 눈앞에 희망이 보인다고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가 지옥에 떨어진 경험이 최소 3번은 있었다.
그래서 확인했다.
“살인도 해야 하나요?”
그녀가 보기에 유진은 명백하게 킬러였다. 그래서 이 부분이 가장 궁금했다.
“그런 종류의 일은 필요하면 내가 직접 하지. 당신 같은 여자에게 시키지는 않지.”
“내 가족들에게 해가 갈 일은 없겠죠?”
“그건 애매하지. 일하다가 당신에게 문제가 생겨서 그 원한이 당신 가족에게까지 미치는 거야 내가 막을 방법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대신 그 문제가 내 일하다가 생긴 거면 최선을 다해서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은 하지.”
최명선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약속이 지켜지기만 한다면 받아낼 수 있는 최고의 약속이었다.
최명선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지막 한가지를 확인했다.
“누군가에게 몸을 팔아야 하는 일은 없겠죠?”
이 질문은 유진을 웃게 했다.
“푸하하하. 포주 주제에 그딴 일을 걱정한다고?”
“네. 걱정해요. 미친년으로 보이겠지만, 이 나이에 이 몸으로 누군가에게 다시 몸을 팔아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차라리 죽겠어요.”
단호한 그녀의 대답에 유진은 피식 피식 웃었다. 그리고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에게 창녀 짓을 하라고 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몸을 팔기는 해야 할 거야.”
“네?”
“다른 사람에 너를 팔지는 않겠지만, 내가 일단 너를 샀잖아. 너의 미래와 육체와 정신 모두 내가 지금 샀지. 네 생명과 바꿔서. 그러니까 벗어.”
유진의 말은 매우 황당했지만, 최명선은 그의 말을 명백하게 이해했다.
그녀는 오늘 유진을 만난 이래 가장 미친놈을 바라보는 눈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008 Do It Yourself – 27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니다.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간신히 잡은 삶의 기회 앞에서 상대에게 반항하는 듯한 행동을 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최명선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벗으라고요? 옷을 벗으라는 말이 맞는 건가요? 정말?”
유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어느 정도 미친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혹시 이거 상종 못할 변태 취향이 있나? 이래도 되는 걸까?’
최명선은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다시 한번 물었다.
“당신 25살? 26살? 그 정도 되나요?”
이 물음에는 유진이 대답했다.
“21살.”
최명선은 기가 막혔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말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조카의 아이들, 그러니까 내 손자 중에 나이가 많은 아이가 올해 16살이에요. 무슨 뜻인지 알아요? 내가 당신 할머니뻘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나 같은 여자랑 섹스할 생각이 들어요?”
일단 유진이 자기 친할머니라고 확신하고 있는 유초혜 여사는 여든이 넘었다. 최명선과는 20년도 넘게 차이가 난다.
또, 섹스 상대의 나이는 유진에게 별로 큰 문제가 아니었다. 유진은 60~70대였던 마담 보른이나 마담 리샤르 등을 혐오했지만, 그건 그녀들이 늙어서가 아니라 추한 욕심으로 가득한 여자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들과의 섹스도 여자로서는 별문제 없었다.
무엇보다 유진은 그녀와 지금 섹스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자로서 자기 매력에 자신감이 있나 보지? 그런 생각을 한다니. 착각하지 마라. 당신에게 벗으라고 했지, 당신하고 섹스하겠다고 한 적 없다. 그러니 이제 결정 좀 하지. 벗을 건지 죽을 건지.”
최명선의 얼굴이 붉어졌다.
부끄럽다기보다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명백하게 그런 의미로밖에 들릴 수 없게 말했었다. 무엇보다 매춘은 안 하겠다는 그녀에게 자신에게는 몸을 팔아야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건 명백한 섹스의 의미였다. 그래 놓고 이제 와 이런 식으로 자기를 모욕하는 언행이라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화가 난 것은 난 것이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삶에 희망을 품어 버린 순간, 이런 걸로 다시 죽음을 각오할 수는 없게 되었다.
결국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확인했다.
“여기서?”
“여기서.”
집 쪽을 가리키며 간절하게 요청해 봤지만 무시당했다.
결국 최명선은 인적이 없는 곳이기는 하지만, 밝은 대낮에 사방으로 훤히 트여 있는 집 마당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재킷은 쉽게 벗었다. 벗은 재킷을 차량 보닛 위에 올려 두었다.
블라우스를 벗었다. 안에 속옷을 입고 있었기에 부담이 덜했다. 속옷 정도는 요즘 젊은 애들은 그냥도 노출할 정도의 수준에 불과하니까.
치마는 좀 망설여졌다. 스타킹을 신고 있지만, 그래도 팬티 부분을 노출하는 것은 많이 꺼려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금의 욕망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눈으로 내려보는 유진의 모습에 눌려, 떨리는 손으로나마 결국 벗었다.
그리고 속옷으로 가려져 있기는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끄러움에 몸을 움츠리며 물었다.
“되었나요?”
유진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최명선은 결국 스타킹도 벗고, 속옷도 벗어야 했다.
그중 특히 올인원 슈트 스타일로 된 속옷을 벗는 순간이 매우 수치스러웠다.
그것이 몸에 걸친 마지막 옷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어깨를 풀고 가슴 부분부터 아래쪽으로 끌어내리는 동안, 보정속옷으로 애써 단단하게 조이고 있던 그녀의 주름진 피부와 처진 가슴, 튀어나온 아랫배, 옆구리와 허벅지의 군살 등이 하나씩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허리를 숙이고 속옷의 다리 구멍에서 발을 하나씩 빼는 동안 늘어지고 축 처진 젖가슴이 흔들거리는 순간은 그냥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완전히 알몸이 된 그녀는 마지막 속옷까지 차량 보닛 위에 마저 올리고는 두 팔로 젖가슴을 가렸다. 사타구니 사이의 음모와 성기가 노출되는 것은 아예 신경 쓰지도 않았다. 거기는 별로 창피하지도 않았다.
“이제 되었나요?”
최명선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남자 앞에서 알몸을 보이는 것 따위 너무도 익숙하고도 흔한 일이었지만, 환갑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에 손자뻘밖에 되지 않는 아이 앞에서 늙고 추해진 모습을 내보여야 한다는 것이 그녀를 너무도 수치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을 여자로, 그리고 눈앞의 유진을 남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새삼 부끄러울 것도 수치스러울 필요도 없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유진은 더욱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
“두 손은 머리 뒤로 올리고, 다리는 어깨 넓이로 벌려라.”
최명선은 입을 떡 벌렸다. 그녀는 유진이 진짜로 미쳤다고, 미친놈이라고 확신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그냥 죽겠다고 말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 결국 유진이 시키는 대로 했다. 다리는 어깨 넓이로 벌리고 두 손은 머리 뒤에서 깎지를 꼈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했다면 굉장히 매력적일 자세였다. 하지만 최명선은 자기를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 유진은 최명선의 몸을 자세히 살폈다.
사실 원래 속옷까지 벌거벗길 예정은 아니었다. 옷을 벗는 것 자체에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의미를 두고 내린 명령이었지만, 속옷까지 필요하지는 않았다.
생각이 바뀐 것은 그녀가 자기가 할머니뻘이라고 말한 순간이었다.
그 말에서 유진은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존재들, 마담 보른과 마담 블루아 등을 떠올렸다. 최명선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여자들.
그녀들은 최명선의 표현대로라면 자기 손자보다도 더 어린 유진과의 섹스에 아무 거리낌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일에 매우 집착했다. 그건 그녀들이 젊은 남자와의 섹스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여자들인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유진과의 섹스가 주는 젊어지는 효과를 위한 것이었다.
최명선이 자신이 늙은 여자라는 것을 어필하는 순간 그 점이 떠올랐다.
현재 유진이 가까이하는 혹은 사용하는 여자들은 모두 젊었다. 그냥 나이만 젊은 것이 아니라 본인 나이들에 비해서도 굉장히 젊어 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숫자로 치환해서 평가하면, 외모에 관해서는 가장 낮은 숫자일 장화진조차 자기 딸인 성무연과 모녀라기 보다 자매로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그녀들에게는 유진의 정액이 가진 가장 눈에 띄는 효과인 회춘과 노화 방지의 효과가 아직 별로 표가 나지를 않았다. 가장 자주 함께 하는 차민영이 슬슬 눈에 띄는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저 좀 더 예뻐지고 있다고 평가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자기 정액에 그런 효과들이 있다는 것이, 그래서 그것 때문에 많은 착취를 당한 일들이 좋은 기억으로 남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자기에게 있는 능력이었고, 많은 사람이 간절히 탐내는 능력이었다. 미래를 위해서 정확한 효과와 알맞은 사용법 정도는 고민을 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최명선은 꽤 알맞은 시험 대상이었다. 겉으로 보고 생각했던 것보다 알몸으로 보게 된 그녀의 몸 상태가 훨씬 나쁘다는 점은 오히려 그녀의 쓸모를 더 높였다.
덤으로 최명선이 그렇게 벌거벗고 수치스러워하는 모습에서 유진은 작은 즐거움도 느꼈다. 마담 보른 등이 유진을 발가벗겨 놓고 평가하던 그때의 수치스러운 기억에 대한 복수의 감정을 살짝 느낀 것이었다. 최명선은 마담 보른 등과 나이가 많은 편인 여성이라는 것 외에 거의 공통점이 없지만 어쨌든 그랬다.
하지만 끝없이 구경만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냉정하게 그녀의 몸 전체를 살피고 머릿속에 기억한 유진은 그녀가 간절히 원하던 말을 해주었다.
“되었다. 이제 팔 내리고 마음껏 움직여도 된다.”
최명선은 얼굴에 화색을 띠고 얼른 몸을 움츠린 다음 벗어둔 속옷 쪽으로 손을 뻗었다.
뭘 원한 것인지는 몰라도 유진이 볼일 다 본 것 같으니, 옷을 입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유진이 그 손은 막았다.
“왜?”
“옷을 입으라고 허락하지는 않았다.”
최명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유진이 뭘 원하는지 정말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은 그녀가 벗어둔 옷을 모두 챙겼다.
그리고 트렁크를 열고 그 안에서 뒹굴고 있던 시체 두 구를 꺼냈다. 죽은 지 꽤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아직 부패가 시작되지는 않아서 보기 흉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시체를 챙긴 유진은 곧바로 한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따라와라.”
최명선은 잠시 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대낮에 실외에서 발가벗은 알몸이 되는 것과 그렇게 알몸이 된 다음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이건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에게도 거의 경험이 없는 매우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미 걸어가는 유진을 보고만 있을수는 없어서 팔로 애처롭게 몸을 가리며 종종걸음으로 따라가야 했다.
그 후 잠깐 평범하게 일이 진행되었다.
나무들 사이의 적당한 곳에 도착한 유진이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최명선은 그 삽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는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그건 유진이 ‘바벨의 기억’과 함께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또 다른 유물 ‘이름 없는 사슬’을 변형시킨 것이었지만 최명선이 알 리가 없었다.
유진이 놀라운 힘과 속도로 엄청나게 빠르게 땅을 파 내려가는 동안 최명선은 벌거벗은 몸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이미 시체가 된 두 깡패를 묻으려고 파는 구멍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진이 땅을 파는 내내 그 구덩이에 이대로 벌거벗겨진 채로 던져져 산채로 생매장당하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을 계속 느꼈다.
충분히 더운 날씨임에도 인근의 청평호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몸을 떨어야 하기도 했고, 벌거벗은 탓인지 더 소변이 마려운 느낌도 있었다. 나체가 되어 이 모든 일을 감당하고 있는 자신이 무척이나 초라하고 왜소하게 느껴졌다.
그건 유진이 그녀를 알몸으로 만들면서 원한 효과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상황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낮춰서 인식하고 유진을 좀 더 어렵고 무서우며 자신보다 높은 사람으로 느끼게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의복은 고대부터 사람들이 신분의 고하를 구별하기 위해 가장 상징적으로 사용한 것이었으며, 벌거벗은 몸은 노예의 상징이었다. 유진은 그걸 상징적으로 그녀에게 인식시켜려 한 것이다.
물론 이런 수치와 모욕이 심해지면 배신의 이유가 되기는 하지만, 당장 오늘 죽음의 공포 앞에 굴복했던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는 못하리라 여겼다.
오늘의 이 경험이 앞으로 유진이 그녀에게 시킬 일들에 대해서, 그래도 그때 당했던 일보다는 낫다는 식으로 기준이 될 터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정말 깊네요? 이렇게까지 파야 하는 건가요?”
최명순은 유진이 판 땅의 깊이를 보고 감탄했다.
고작 2~30분 정도 걸렸을 뿐인데, 유진은 사람 두 명이 누울 수 있을 정도의 크기에 본인 키가 훌쩍 넘을 정도의 깊이로 땅을 팠다.
그녀가 땅을 파는 일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다면 그게 인력으로 가능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겠지만, 그녀는 그냥 힘과 요령이 있으면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싶어서 감탄할 뿐이었다.
유진이 대답했다.
“식스 피트 언더라는 말이 있다.”
“무슨 뜻인가요?”
“사람의 죽음이나 시체가 땅에 매장되었다는 것을 돌려 말하는 영어의 표현이다. 땅속에 매장된 시체가 썩기 시작하면 발생하는 부패한 가스나 벌레 등이 땅 위로 노출되어서 쥐나 개가 시체가 있는 땅을 파는 꼴을 보지 않으려면 최소한 그 정도 깊이는 필요하다는 의미로 붙은 관용구지.”
최명선은 유진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이 정도로 깊게 묻으면 어지간해서는 발견을 못 한다는 의미였다. 수색견이 냄새를 맡지 못할 깊이라는 말이니까.
유진이 그 구덩이에 시체를 던졌다. 두 시체는 트렁크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로 얼굴을 상대방의 다리 쪽으로 향한 채 바닥에 놓였다.
최명선은 그들이 고작 몇 시간 전에 자신의 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서 투덜거리던 아이들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새삼스럽게 오늘의 일이 그리고 눈앞의 남자가 끔찍했다.
그리고 이어서 유진이 벌인 행동은 최명선에게 더욱 더 끔찍하게 다가왔다.
“뭐, 뭐하는 짓이에요!”
최명선은 유진이 두 구의 시체 위에 자신이 벗은 옷과 속옷을 던지는 모습에 경악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 옷들이 자신이 다시 입어야 할 옷들이라는 것도 문제였지만, 살아 있는 자신의 소지품이 시체와 함께 시체 구덩이 던져진 것에 대해서 산자로서의 본능적 혐오를 느낀 것이었다.
그것이 유진이 그녀를 발가벗긴 두 번째 이유였다.
“언젠가 나를 배신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지금 일을 떠올려라. 저기에 함께 묻히는 것이 단지 너의 옷이 아니라 너 자신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텐프로 홍월에서 숱한 사람들을 몸통을 찌르고 멱을 따면서 칼에 묻은 피를 닦아낸 홍월의 마크가 붙어 있는 수건을 그 시체와 그녀의 옷 위에 추가로 던지며 말했다.
“또 기억해라. 이 시체가 발견되면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 너의 증거를 발견하고, 너를 찾게 되리라는 것을. 거기에는 이 둘의 죽음만이 아니라 신상사와 명지훈 사장 그리고 아마 당신도 알 것 같은 김호석 총경의 목숨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겠지.”
최명선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이 남자가 그냥 순간의 변덕으로 자신을 살려준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그녀가 궁금하면서도 차마 묻지 못했던 일, 홍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도 확실하게 이해했다.
깡패 두목인 신상사는 그렇다 쳐도, 말석이기는 해도 당당한 30대 재벌 그룹 중 하나인 대정 그룹의 사람인 명지훈과 그녀가 선 한번 대보려고 그리도 노력하던 경찰의 거물 김호석 총경의 이름은 눈앞의 시체 두 구 따위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무거운 이름이었다.
그녀는 자기 목에 벗길 수 없는 목줄이 채워졌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했다.
유진이 파낸 흙으로 구덩이를 다시 메우기 시작하자, 최명선은 자기도 모르게 맨손으로 흙을 나르며 그걸 도왔다. 유진에게 완벽하게 굴복된 마음이 몸으로 드러난 것임과 더불어 이 시체 구덩이 속에 묻히고 있는 것들을 세상에서 감추고 싶은 절박함이 드러나는 것이기도 했다.
매장이 완전히 끝나자 유진은 그걸로 그녀와의 오늘 일정을 끝냈다.
“내일 연락하지. 전화 주의하도록.”
유진은 그녀와 그녀의 차를 놔두고 혼자 떠났다.
최명선은 마을버스 하나 다니지 않는 이 오지에서 유진이 맨몸으로 어떻게 돌아갈 생각인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혼자가 된 최명선은 흙투성이가 된 알몸으로, 별장 건물을 향해 힘없이 걸었다.
별장은 지금 사람이 머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차에는 갈아입을 옷이 있었지만, 그녀는 지금 그런걸 생각할 수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저 당장 어딘가에 쓰러져서 자고 일어나면, 이 모든 일들이 그냥 재수 없는 악몽처럼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쉬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와 달리 유진은 나름 기분 좋게 산길을 달리며 생각했다.
‘역시 내 일은 내가 스스로 처리하고, 내가 필요한 사람은 내가 직접 만드는 것이 좋군. 고주희는 앞으로 좀 고민해봐야겠어.’
시체를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던 것과 앞으로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사람과 장소를 손쉽게 확보한 것에 나름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면 어떤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동안의 헛된 생각이었지만.
#008 Do It Yourself –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