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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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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여자들의 상관관계 - 2
대한민국의 수사기관들과 권력자들과 재벌들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하던 시간, 유진은 지하철을 갈아타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최명선의 별장을 맨몸으로 나선 유진은 스마트폰의 지도를 이용해서 현재 위치를 찾고, 이용할만한 교통수단들도 검색해 보았다.
스마트폰은 유진이 세상과 타협한 상징적인 물건이었다.
미국 정부라면, 그리고 어쩌면 UE도 스마트폰에 달려 있을 GPS로 자신의 동선을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유진이 쓰는 스마트폰의 제조사인 A모 사가 자국의 수사기관이 합법적으로 요청하는 협조 요청조차 암호 해독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이유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회사의 정보보안이 NSA의 해킹조차 정말 막을 수 있을지, 그리고 UE의 자금과 기술에 영향을 받지 않는지는 미지수였다.
그 회사 믿고 이 스마트폰의 정보가 전혀 외부로 노출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아무래도 바보 같았다. 애초에 GPS 위성 자체가 미국 정부 소유라는 것을 생각하면, 스마트폰 해킹은 몰라도 GPS 부분에는 뭔가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다.
물론 딱히 근거는 없는 추측이었다.
IT와 관련된 기술은 심연이 지식을 제공해주지 않는 분야이고, 연구소의 교육 커리큘럼에서도 완전히 빠져 있던 것이라서 유진은 그 부분에 매우 약했다. 최근 한 달여간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본 상식적인 수준의 정보가 유진의 지식 전부였다.
어쨌든 유진은 스마트폰의 GPS로 자신의 동선이 추적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냥 이해하기로 했다.
자기를 몰래 주시하고 있을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그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어차피 집 근처를 벗어나는 일도 별로 없고, 너무 숨기려고만 하면 궁금함을 참지 못한 그들이 뭔가 위험한 방식으로 추적하려 들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필요한 최고의 순간에 폰을 몸에서 떨어뜨리거나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정보를 조작할 수 있었다. 정동후를 처리할 때는 폰을 집에 두었고, 건설 현장 학살 때나 이번에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 그 일환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택시를 부르거나, 근처 마을버스를 이용하거나 하는 등의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건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이었다. 택시도 버스에도 모두 감시 카메라가 달려 있고, 유진은 카메라로 보면 지나칠 정도로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미국 정부나 UE라면 몰라도 한국 정부나 성화에게까지 정보를 제공할 생각은 없었다.
유진은 지하철을 찾았다.
서울과 강원도를 잇는 경춘선의 가장 가까운 역이 현재 위치에서 강을 넘고 산을 지나 직선거리로 약 20km 정도의 거리였다.
유진은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를 조정해서 두 시간을 일정으로 잡았다.
10km에 한 시간이면 유진 같은 초인이 아니어도 세계 최고 수준의 특수부대가 군장을 갖춘 상태로 주파할 수 있을 만한 거리였다. 지켜보는 누군가가 아주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을 정도라는 의미였다.
또 이렇게 인적없는 산길을 달리며 약간이지만 땀도 흘리는 것에는 다른 의도도 있었다.
유진이 누군가에게 피와 죽음을 겪게 되면, 소진이는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정확하게 모르면서도 그것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이 거의 확실했다.
오늘 만든 시체의 숫자와 흘린 피의 양은 유진이 연구소를 탈출한 이후의 모든 일정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었다.
소진이에게 돌아가기 전에 그것들을 지워둘 필요가 있었다. 유진의 생각에 산은 요리 중의 주방을 빼면 그쪽으로 가장 알맞은 장소였다.
그래서 유진은 인적 없는 산길을 두어 시간 달려서 20km 이상을 주파한 후, 경춘선 지하철역 하나에 몰래 숨어들어 가서 지하철에 무임승차를 했다.
무임승차의 경우 당연히 돈 아끼겠다는 의도는 아니고, 카메라와 사람들의 관심 그리고 이용 기록이 남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약간 민망하다는 생각은 좀 했군.
‘개인 기록이 남지 않는 충전식 교통 카드 하나 사서 충전해 둬야겠다.’
너무 간단한 건데, 그동안 쓸 일이 없어서 전혀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그 후로는 편했다. 경춘선을 타고 홍대입구역까지 간 다음에 공항철도 선으로 갈아타는 것으로 환승도 끝이었다.
3시간 정도 적당히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집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유진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 사람들도 나중에까지 유진을 기억할 정도는 아니었다.
유진은 외모적으로 매우 시선을 끄는 편이었지만, 서울 지하철에는 유진보다도 더 튀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내린 다음, 역무원 몰래 개찰구를 피해서 역을 탈출했다.
그다음에는 길가의 사람들 눈을 생각해서 천천히 30분쯤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
그렇게 최명선의 별장을 떠나서 집까지 도착하는 데 총 여섯 시간쯤이 걸렸다.
이 시간은 매우 재미있게도 경찰이 홍월에서 일어난 사건을 인지하고 대통령을 거쳐 권력자들에게 관련 사항이 알려진 후, 대정 그룹과 성화 그룹에 본격적으로 난리가 나기 시작하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물론 그런 것 따위 알 리 없는 유진은 사건의 배후를 완벽하게 정리하지 못한 것과 별개로 오늘의 자기 일 처리 자체와 대중교통을 이용한 첩보원 분위기의 이동에 매우 만족하며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유진에게도 혼돈과 파괴가 찾아왔다.
“오빠아!”
유진을 본 소진이가 울면서 달려와서 유진의 다리에 매달렸다.
소진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얼마나 울었는지 눈꼬리가 짓물러져 있었다.
“소진이 너 당장 이리 안 와!”
차민영이 그런 소진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평소에는 아래쪽으로 부드럽게 내려가서 그녀의 인상을 귀여운 강아지 같은 느낌으로 만들어 주던 차민영의 눈꼬리가 지금은 하늘을 찌르기라도 할 것처럼 위쪽으로 치켜 올라가 있었고, 그 매섭게 변한 눈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의 안색과 어울려 당장이라도 불을 뿜으며 포효할 준비를 하는 드래곤 같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 처음 보는 모녀의 모습에 유진의 눈동자가 혼란으로 요동쳤다.
** ** **
혼란의 시작은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서로 다른 스타일과 내용물로 화려함을 뽐내는 수많은 종류의 김밥과 유부초밥 등을 메인으로 과일과 미역국 등이 어우러진 화려한 저녁 식사 자리였다.
차수연과 주다혜 그리고 주다혜에 이어 방문한 새로운 손님까지 3명의 여자는 유진이 만들어낸 그 화려한 식탁에 온갖 감탄을 토해내고 있었고, 차민영은 그런 그녀들에게 최대한 노골적이지 않게 유진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진이는 삐져 있었다.
오늘 늦을 것을 예상한 유진이 점심은 물론 저녁까지 미리 준비해두고 나가기는 했지만, 그리고 그 요리들 모두 끝내주게 맛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당장 만들어 주는 요리와 데워 먹는 요리의 수준이 같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저녁 식사 자리에 유진이 없다는 것과 맘에 안 드는 이모들이 오빠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오빠가 소진이를 위해 만들어 준 요리를 축내고 있다는 자체가 소진이에게 스트레스였다.
먹을 입이 늘어난 덕분에 소진이 맛보여줄 김밥이나 유부초밥을 훨씬 많은 종류로 만들어둔 유진이나, 식탁 위에 유부초밥만 백 조각에 김밥도 서른 줄이나 쌓여 있는 상황에서 끽해야 김밥 2줄에 유부초밥 3~4개면 배가 차서 나가떨어질 딸의 식사량을 아는 차민영이 알면 황당함에 웃겠지만, 소진이 마음은 어쨌든 그랬다.
이 이모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들이 매우 아깝고, 쉬지 않고 젓가락을 놀리는 그녀들의 모습이 매우 짜증 났다. 놀러 오는 친구들과 동네 아줌마들이 먹는 것과는 아주 느낌이 달랐다.
그래도 먹는 것 가지고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매우 치사하고 창피한 일이라는 것은 5살 소진이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걸 물어봤다.
“엄마, 이모들은 집에 언제 가?”
오랜만에 만난 하지만 반가울 수는 없는 새로운 손님 유미향과 최근 근황에 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던 차민영이 그런 딸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응? 우리 딸 그게 왜 궁금하지?”
“그냥.”
소진의 말과 행동에 뚱한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차민영은 큰 생각 없이 대답해 주었다.
“이모들 당분간 우리 집에서 같이 있을 거야. 언제 집에 갈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어.”
사실 차민영은 차수연이나 주다혜가 가고 싶다고 해도 못 가게 잡아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5년 만에 연락이 닿아서 방문한 유미향 조차 일단 오늘 유진에게 보여주기는 전에는 안 보낼 생각이었다.
그녀에게는 계획이 있었고, 노리는 것이 있었다.
유진이 이 마을에 자신 모르게 만들어둔 새로운 섹스 상대를 견제하기 위해서, 차수연과 주다혜 등을 유진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만들고 자신이 관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유진이 그녀들을 사용할 기회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당분간 그녀들이 이 집에 머무는 것이 유리했다.
마침 그녀들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좋은 명분도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친척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는 소진이도 싫어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차민영은 딸이 엄마인 자기까지 은근슬쩍 견제할 정도로 유진에게 집착한다는 점은 무의식으로 외면하고 있었다.
소진이가 입술을 삐죽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를 삼인칭으로 말하는 애교 혹은 삐짐의 필살기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소진이 싫어.”
“응?”
“소진이는 이모들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거 싫어. 이모들 집에 가라고 해.”
차민영이 조금 당황했다.
“우리 소진이 왜 이럴까? 이모들 더 많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었잖아. 또 수연이 이모는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이모들 어제도 우리 집에서 잤잖아.”
“어제 잤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가라고 해!”
소진이가 더 뾰족하게 말했고, 차민영도 슬슬 이마에 힘줄이 돋기 시작했다.
“우리 딸이 왜 이리 버릇없이 구는 거지? 그런 예의 없는 말 하면 안 되는 거 알아? 몰라?”
차민영이 약간 짜증을 내는 기미가 보이자 소진이가 폭발했다.
“싫어! 싫어! 이모들 가라고 해! 소진이는 이모들 자고 가는 거 싫어!”
소진이가 울면서 떼를 쓰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 차민영은 짜증이 넘어 화가 나기 시작했고, 주다혜와 유미향은 당황했다.
소진이가 유진의 주변에 엄마 외의 다른 여자들이 있는 것을 견제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아니 엄마조차도 어느 정도 견제한다는 것을 이전의 경험으로 눈치챈 차수연만이 소진이가 떼를 쓰는 이유를 짐작하고 그 귀여움에 웃을 뿐이었다.
엘렉트라 콤플렉스같이 거창한 것은 아니고, 그냥 오빠의 관심을 나눠 받을 다른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 싫은 것이었다. 마치 새로 아기 동생이 생겨서 엄마 아빠의 관심이 동생만 향하면, 거기에 질투하는 어린 언니의 마음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설마 아기도 아니고 어른들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차민영은 여러 가지 논리적이고 상식적인 이유를 들어서 소진이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5살 아기의 사고방식은 보통 인간의 논리보다는 외계인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초월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차민영이 뭐라고 논리적으로 말하든 소진이는 전혀 그걸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울고불고 떼를 쓰면서 싫다고만 말했다.
차민영도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논리적인 전개가 아닌 감정적인 방식으로 화를 내기 시작했고, 소진이는 그런 엄마의 모습에 더 울고 더 짜증을 내었으며, 그것이 서로 악순환이 되어서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더 난리가 커졌다.
자기들 때문에 모녀가 싸우는 모습에 보고 있던 주다혜와 유미향이 슬슬 부담을 느끼고 안절부절못할 지경이 되었다.
오직 차수연만이 이 와중에도 손찌검은 절대로 안 하는 차민영과 엄마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아빠에 대한 언급이나 엄마가 해준 것이 뭐야 같은 소리는 절대로 하지 않는 소진이 모녀의 귀여운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유진이 도착하고, 싸움은 차민영과 소진이가 서로 유진에게 자기편을 들어달라고 싸우는 와중에 유진이 또 나름의 자기 의견을 제기하는 3파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