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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139화 (139/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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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여자들의 상관관계 – 14

유미향이 차민영의 집을 방문한 이유는 당연히 용건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용건은 안부나 친목이 될 수 없었다.

스스로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차민영은 강준화의 아내였고, 유미향이 강준화에게 납치당해 강간과 폭행 등으로 굴복을 요구하는 조교를 받던 시기에도 강준화를 도와 유미향의 건강을 관리하던 것이 차민영이었다.

그 후 유미향에 대한 조교가 부족한 시간 문제로 애매하게 실패한 후, 강준화는 유미향과 타협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원래는 차민영이 영향력 아래 있던 몇몇 여성이 유미향에게 넘겨졌다.

차민영이 자기 관리 하의 성노예 여성들에게 딱히 애정이 있다거나, 그녀들을 관리하는 일에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이었다. 그 이후로 다른 여자들에 대한 처우와 일정 통제 방식 등을 두고 유미향이 계속 차민영과 대립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차민영이 그 일을 좋아서 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년에 걸쳐서 애써 자기가 만들어둔 시스템에 간섭하려는 유미향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그 이후로 둘은 꽤 심각하게 대립하는 사이였다.

그따위 일이 이제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린 지금은 태연하게 웃으면서 부드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기는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아직 서로 껄끄러운 감정과 경쟁 심리가 남아 있었다.

그런 유미향이 여기까지 방문하고, 차민영이 그런 유미향의 방문을 받아들인 것은 그만큼 유미향이 현재 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강준화가 죽고, 차민영이 고영은과 함께 잠적해버리자 남은 성노예들도 오래지 않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중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는 몇몇은 다른 리더 급의 여성들이 챙겼다. 차수연이 주다혜를 챙긴 것도 비슷한 경우였다.

유미향은 애초부터 내부에 파벌을 만든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녀를 따르던 인물들이 여럿 있었고, 그녀가 그들을 챙겼다. 차수연과 주다혜의 경우와는 다르게 유미향은 계속 그녀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아직도 모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래서 그녀는 자신들을 향한 공격을 가장 먼저 눈치챘다.

어느 순간 하나둘 연락이 끊기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연락이 끊긴 인원이 다섯이나 되었다. 해외로 떠난 인원과 가족과 함께 사는 한 명을 뺀 전원이었다. 각자의 집을 확인해도 짐을 챙겨 떠난 흔적이 없었다. 지갑이나 핸드폰이 남겨져 있는 일도 있었다.

경찰에 신고하지는 못했다. 한둘이 실종된 거라면 개별 범죄를 의심하겠지만, 다섯이 동시에 그렇다는 것은 과거의 문제가 분명했고, 그건 경찰을 개입시켜서는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다행히 유미향은 아직 예전 시절 권력자 중 일부와 커넥션이 남아 있었다. 유미향은 그중 몇 명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들은 그녀를 도와 납치된 여성들을 찾아주는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관련해서 정보는 확인해 주었다.

거기서 나온 이름이 민영후였다.

그 후 유미향은 나름 돈을 써서 민영후의 뒷조사를 시도했다. 꽤 규모 있고 명성도 있는 심부름 센터에 의뢰했는데, 그 결과가 몹시 나빴다.

심부름센터는 민영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행방불명된 인원 중 하나의 단서를 찾은 것과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위협을 받고 이 일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유미향이 그나마 단서라도 찾아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선지급했던 보수의 반환이나 위약금을 요구하지 않자, 자신들이 타겟에게 유미향에게 대해서 실토했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차민영이 연락처가 남아 있는 여자들에게 문자라도 돌려보던 타이밍이 유미향이 자기가 상대에게 노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그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상황을 알게 된 차민영이 자기 집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고, 유미향이 그래서 이 집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리고 고주희가 도착하기 전에 마침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그래서 유미향은 유진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가 유진에게 상의한 이야기의 핵심은 결국 민영후였고, 그에 대한 단서를 고주희가 제공한 것 같은 상황에서, 유진이 그걸 하찮게 여기고 정보 제공자인 고주희를 내쫓은 현재 상황은 이상했다. 그녀가 속한 성화의 힘이라면 이 문제도 어렵지 않게 해결 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따진 것이다.

고주희를 이용해서 민영후를 처리하면 안 되냐고.

하지만 그건 그녀의 관점일 뿐이었다.

그녀의 질문에 대한 유진의 대답은 시큰둥했다.

“내가 왜?”

그건 유미향도 차민영도 정말 상상도 못한 대답이었다.

유미향은 물론이고 차민영도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유진이 이번에 행방불명된 여자들과 유미향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차민영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었다.

유진이 차수연과 주다혜와는 달리 비슷한 이유로 방문한 유미향에게 훨씬 친절하게 대해주기 때문이었다.

유미향의 경우도 비슷했다.

일단 유진은 그녀에게 친절한 편이었다. 특히나 주다혜와는 취급이 다른 것을 본인도 느낄 정도였다. 또한 유미향은 그런 주다혜조차 이미 유진이 도와주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거기에 유미향이 말하는 그녀의 최근 상황에 대해서 귀담아들어 주는 태도도 보여주었다.

또, 차민영이 유미향에게 유진과의 육체관계를 권유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래서 유미향은 유진이 자기에게 관심이 있고, 그래서 자신을 도와주려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육체관계는 아마 그 대가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건 착각이었다.

일단 유진은 유미향에게 약간 매력을 느끼고 있기는 했지만, 그녀를 딱히 자기 섹스 파트너로 삼겠다던가 그녀와 섹스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었다.

육체가 은밀히 계속 항의를 보내고 있으니, 아마 앞으로 더 많은 여자와 더 많은 섹스를 원하게 될지도 모르기는 했다. 조만간 틀림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태이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유진은 여자와 섹스보다는 요리와 미식 그리고 물놀이와 집 꾸미기 등에 빠져 있었다.

여자로서 가진 매력을 뺀다면, 유진이 차수연이나 주다혜와 달리 그녀들과 비슷한 이유로 이곳에 도착한 유미향에게 약간 덜 공격적인 이유도 별로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차수연과 주다혜가 이 집으로 오게 되면서 위험에 노출된 일은 짜증 나는 경우지만, 그 이후에 유미향이 추가된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노출된 상태라서 딱히 더 추가될 위험도 별로 없는 상황에서, 유미향을 통해서 더 넓고 자세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집안에서 보호할 거면 네 명이나 다섯 명이나 별다른 것도 없으니 부담도 없었고.

하지만 외부에 힘을 투사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이번에 아무 생각 없이 홍월에서 몸을 쓴 다음 유진도 나름 여러 가지로 느낀 바가 있었다.

뭔가 제대로 일하려면 그 전에 제대로 사전 조사와 계획 등을 세밀하게 짜둘 필요가 있었다. 중간 중간 생각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예상외의 인원들과 만나게 되면서 일이 굉장히 어설펐었다. 특히 이제 뭔가 하려면 뒤처리를 생각해 둘 필요가 있었다.

또 자기 손으로 직접 땅을 파서 시체를 묻거나, 남의 옷 입고 일하다가 시체 근처에서 샤워 따위를 하는 일은 절대 사양이었다.

어제 일 처리가 그렇게 깔끔하게 끝날 수 있었던 것은 일단 운이 좋았던 점이 컸고, 그 운 중에서도 우연히 손에 넣은 최 마담, 최명선의 역할이 지대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협조가 아니었다면 참 여러번 난감했을 상황이었다.

사실 이런 것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었고, 정보와 뒤처리에 관해서는 사실 성화 특히 고주희 과장에게 살짝 기대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요 며칠 고주희와 성화는 그렇게 쓸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설프게 이런 일에 도움받았다가 오히려 역으로 문제가 생기리라는 확신만 안겨주고 있었다. 고주희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것과 달리 성화는 아직 적에 가까운 조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성화가 들고 온 정보만 믿고, 성화의 도움을 받아서 외부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왜?’라는 대답은 그런 자세한 상황을 구구절절이 설명할 생각도 없고, 애초에 이 여자들을 자신이 꼭 구해줘야 할 필요가 있는가도 의문인 상황인 유진의 심정이 짧게 표현된 대답이었던 것이었다.

아마 유미향이 그냥 생각 없는 여자라면 이 상황에서 유진에게 화를 냈을 것이다.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하지만 유미향은 나름 냉정하고 계산적인 성정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이럴 때 해야 할 질문을 알고 있었다.

기브 앤 테이크는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다. 상대가 자기 요구에 부정적이라면 그건 그 대가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 이유일 확률이 99%이다.

유미향은 납치된 것으로 보이는 다섯 명을 구할 수 있다면 자기 전재산은 물론 자기 몸도 기꺼이 내놓은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침없이 말할 수 있었다.

“혹시, 원하는 것이 있어? 도와준다면 뭐든지 정말 뭐든지 다 할게.”

물론 정말 완벽한 진심은 아니었고, 강준화 때처럼 매춘부 일을 하라고 하면 차라리 뒤져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답은 차라리 매춘부가 되라는 것보다 나빴다.

유진이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툭하고 내뱉었다.

“글쎄? 딱히 필요한 거 없는데?”

그 사람 열받게 만드는 대답에 유미향도 이때까지 고수하던 이미지를 지켜내지 못하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한 마디 단어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씨발. 야 이 좆같은 새끼야!’

다행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가는 불상사가 일어나기 전에 차민영이 먼저 나섰다.

“그럼 그냥 두고 보기만 할 거야?”

“아니, 그건 아니지.”

“응?”

“고 과장이 주고 간 자료가 내가 고과장에서 원한 내용이 아니기는 한데, 꽤 재미있는 것이 많네. 고과장이나 성화를 끼워 넣을 생각은 없지만, 좀 알아보기는 하긴 해야 할 것 같아.”

유진의 시선이 태블릿에 적혀 있는 여러 내용을 향하고 있었다.

유진이 흥미를 느낀 부분 중 하나는 성화가 강준화의 성노예 거의 전부를 세밀하게 추적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로,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앞으로 자세히 확인해둘 필요가 있는 부분이었다.

내용도 약간 흥미로웠다.

강준화의 성노예 출신 여성은 수십 명에 달하는데 그 대다수가 이민 형식으로 외국으로 떠난 상태였다. 한국에 남아 있는 여성은 정확하게 열다섯. 그중 지금 당장 이 집과 옆집에 있는 다섯을 빼고, 남편이 있거나 가족과 살거나 유명 배우인 3명을 뺀 나머지 7명이 행방불명 상태였다.

이 자료에는 그중 2~3명 정도는 민영후에게 납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나머지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었다.

또 하나 유진의 흥미를 끈 것은 민영후의 과거 이력 중에서 찾아낸 ‘노블 애브게니 장학금’ 항목이었다.

CIA가 거기서 UE에 대한 의심 요소를 발견했던 것처럼, 유진도 그 부분에 강한 확신을 받았다. 근거는 간단했다. 유진이 알고 있는 연구원 중에 이 장학금을 받은 인간이 한둘이 아니었다. 유진에게는 이 정도면 충분한 근거였다.

“이 민영후라는 인물은 오히려 반갑군. 산 채로 잡아다가 알고 있는 모든 걸 다 말할 때까지 탈탈 털어야겠어.”

유진이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유미향은 혼란스러웠다.

“아니 그래서 결론이 뭐야? 도와주겠다는 거야? 아니면 말겠다는 거야?”

이 상황에서도 최대한 이성을 붙잡고 물어보는 그녀에게 유진이 차갑게 대답했다.

“민영후는 처리할 거다. 하지만 민영후가 당신이 말한 여자 중 몇 명이나 데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어.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난 이 민영후라는 자를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 여자들은 그 과정에서 기회가 닿으면 도와주겠지만 그 여자들을 구하기 위해 민영후를 포기하지는 않을 거다. 민영후를 처리하는 일에 방해가 되면 무시할 거고, 인질 따위가 되면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차민영도 유미향도 여기까지는 정말 상상도 못 했지만, 유진은 납치된 여자들에게 정말 조금의 동정심도 관심도 없었다.

강준후의 다른 성노예들도 다 마찬가지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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