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재미있게 보셨나요?
재미있으셨다면 [추천]과 [즐겨찾기 등록] 부탁드립니다.
#009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여자들의 상관관계 – 16
현실을 냉혹하게 후벼파는 유미향의 팩트 폭력에 차민영이 눈물을 쏟아 버리는 바람에 두 사람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유미향은 좀 뻘쭘했다.
차민영이 우는 꼴은 그 옛날 강준화가 낙태를 강요하다 못해 임신한 그녀의 배를 걷어차던 그때 말고는 본 적이 없었다.
유미향은 차민영이 유진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 자기 생각보다 훨씬 깊은 것이었다는 느꼈고, 자신이 좀 과했다고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리고 반동이 올 것도 직감했다.
차민영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몰렸다고 그냥 자기 연민에 빠져 슬퍼만 하고 있을 여자는 절대 아니니까.
유미향의 생각이 맞았다.
잠시 처연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던 차민영이 눈가를 문질러 눈물을 닦아 내었고, 눈물이 멈춘 그녀의 눈에는 독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도 스산한 한기가 서려 있었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 부부가 다 죽고 못 살 정도로 사랑해서 같이 사는 거야? 나랑 죽은 그 사람 같은 부부도 있었는데, 지금의 나랑 그이 관계 정도면 무난하지. 난 그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고, 그이도 지금 나에게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 그이가 지금의 나를 기생충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이의 문제는 남들이 알 바 아니야. 난 그이에게 계속 최선을 다할 거고 혹시 그 과정에서 우리 사이가 옛날 그 사람과의 사이처럼 변하더라도 그건 우리 문제야. 교수님이 알 바는 아니잖아?”
공격적인 차민영의 모습에 유미향이 얼른 한발 물러섰다.
유미향은 자기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자부하는 편이지만, 차민영이 진짜 독하게 마음먹고 뭔가 하려고 들면 그걸 감당할 자신은 없었다.
“진정해. 차 이사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잖아. 그냥 차 이사가 하는 행동이 너무 앞 뒤 가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충고하는 것뿐이야. 두 사람 관계에 대해서 너무 섹스에 집착하고 있잖아. 유진 씨는 척 봐도 당신과의 섹스보다 당신과 소진이 두 사람과의 관계 자체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데!”
차민영이 매서운 눈으로 유미향을 쏘아 봤다. 하지만 유미향이 계속 약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녀도 숨을 골랐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과 유진의 첫 관계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이 섹스였다.
그 후로도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진 교류는 육체가 우선이었다. 유진이 무섭거나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순간마다 섹스를 시도했고, 그게 먹혔다. 프랑스에서는 생존을 위해서 유진에게 자기가 섹스 상대로 쓸모 있다는 것을 계속 어필했었다. 한국에 막 도착했을 무렵까지만 해도 두 사람 사이에서는 확실히 유진의 성욕 처리가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하지만 지금도 그런가 생각해보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유진은 아침마다 자기 성욕 해소를 위해 최소한 오럴 섹스라도 요구하던 것을 멈추었다. 그 후로 섹스는 누군가의 요구가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분위기를 보아 합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얼마 전부터는 섹스 방식도 유진의 취향이 아니라 그녀의 취향에 맞추고 있었다.
대신 유진은 요리를 즐기고, 영화와 드라마 독서 같은 문화생활을 즐기고, 소진이와 놀아주는 것을 즐기고, 그녀와 부드럽게 감정을 교류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섹스는 여전히 중요한 이슈였지만, 그건 서로 함께하는 순간을 즐기는 거였지 유진의 성욕 해소를 위한 차민영의 봉사가 아니었다.
차민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저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는 말에 놀라서 겁을 먹고는 너무 생각 없이 움직였다는 것을 이제야 자각했다. 어차피 유진을 독점하겠다는 욕심도 생각도 없는데 말이다. 밖에 나가서 여자 몇을 만들던 여기를 유진이 돌아올 집으로 만들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건 유진이 소진이와 이 집을 꾸미는 일에 보이는 집착을 생각하면 이미 거의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차민영이 당당해졌다.
“좋은 충고 고마워. 그이랑 한번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야겠네.”
자신감 넘치는 차민영이 모습에 유미향은 약간 배알이 꼴리는 느낌을 받았지만, 나쁘게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도 자기가 노려야 할 포인트를 찾은 느낌이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들었다면 부탁 하나만 할게.”
“뭔데?”
“유진 씨랑 단둘이 대화 좀 해도 될까?”
차민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유미향을 바라보았다. 유미향이 무슨 생각하는지 훤히 들여다보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유미향은 꿀리지 않았다.
“어차피 나보고 그 사람이랑 섹스하지 않겠냐고 꼬신 것은 차 이사잖아? 지금 와서 생각 바뀐 것도 아닐 것 아냐. 틀려?”
맞았다.
사실 차민영은 유진에게 여자를 더 붙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밖에 나가서 새로 생긴 여자와 섹스하는 것에 불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여자들이 자기 사람이라면 더 마음이 편한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단지 굳이 자기가 포주라도 된 것처럼 혹은 할렘의 시녀장이라도 된 것처럼 유진에게 직접 이 여자 저 여자 권하고 붙이고 일정 조정하는 추한 짓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깨닫게 되었을 뿐이었다.
거기에 유미향이 차민영의 마지막 고민까지 해소하는 제안을 던졌다.
“절대로 차 이사 눈 바깥에서 뭔가 꾸미지 않을게. 그 사람에게 섹스 파트너나 성욕 해소용 암컷 이상의 자리도 노리지 않을 거고. 차 이사도 알잖아. 내가 선은 절대로 지킨다는 것을. 이 정도면 괜찮지 않아?”
실제로 유미향은 예전 강준화의 밑에서 차민영이 다른 성노예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그녀에게 시비를 걸 때도 엄격한 자기 기준이 있었다.
강준화와 차민영의 냉정함을 견디지 못하고 두려움에 시들어가고 있는 여자들, 그리고 조교 과정에서 자신과 가까워져 감정 교류를 시작한 몇몇 여자들에 대한 우선권을 확보하는 것이 전부였다.
절대로 차민영이 정상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여자들까지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랬다가 일어날 보복은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유미향은 차민영이 신경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쓰기는 애매한 그런 지점에서 아주 섬세한 줄타기를 했었다.
유미향은 그런 정도의 정치적 센스를 갖추고 자기 수준 파악이 되는 여자였다.
그걸 알기 때문에 차민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묵언의 승낙이었다.
** ** **
차민영과 유미향이 현재 상황을 재확인하고 유진에 대한 권리와 허용 범위 등에서 논의하고 있던 그 시간, 유진은 빵이 구워지는 상태를 확인하며 최명선과 통화하는 중이었다.
“그 정도라고?”
“네. 경찰이나 검찰 언론사 기자들은 물론이고 조직이나 화류계 관계자들까지 전부 어제 일로 난리예요. 사방으로 어제 일에 관련해서 혹시 아는 것 있는 사람 있는지 수소문하느라고 전화기들이 불이 날 지경이라고 할 정도? 살아남은 거기 종업원들은 지금 전부 경찰서에서 증인도 아니고 사건 관계자로 분류되어서 철야 조사받는 중이고, 소문으로는 오늘도 아니고 어제저녁에 이미 D 사의 J 사장님에게 수사 기관이 직접 방문해서 조사도 있었다고 해요.”
최명선은 유진과 지금 외국의 유명한 보안 메시지 앱에 딸린 음성 데이터 통화 기능을 사용해서 감청 방지 통화 중이었지만, 그래도 사람 인명이나 명칭을 직접 사용하지 않는 치밀함을 보였다.
원래부터 그런 걸 조심하는 성향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자신도 관련된 이 사건이 얼마나 끔찍할 정도로 위험하고 큰일인지 새삼 알게 된 영향이 더 컸다.
신상사나 명지훈까지는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신상사 뒤의 김호석 총경이나 명진후 배후의 명세훈 사장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거기에 어제 홍월에서 죽어 나간 사람 숫자는 더욱 더.
유진에 대한 두려움이 알면 알수록 점점 더 커져 나가서, 어제 자신의 처신과 결정에 새삼 안도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것치고는 뉴스 보도 하나 없던데?”
“소문으로는 너무 큰 일이라서 청와대가 나서서 직접 보도 제한을 걸었다고 해요. 어지간하면 이런 것 소문내는 인간이 있을 법도 한데, 너무 큰 일이라서 누구도 감히 소문낼 엄두를 못 내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 것치고 당신은 잘도 알아냈군.”
“이 나라에 화류계에 떠돌지 않는 소문은 없어요. 권력을 쥔 남자들이 여자들이 접대 및 시중드는 술자리에서 자기들 비밀 이야기 나누는 것이 거의 관습화 된 나라니까요. 자기들끼리는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접대부 내보내고 숨긴다고 숨기는데, 바보도 아니고 그걸 다 모를 수가 없죠. 이 일은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면 더 외부에 쉽게 알려져야 하는 거 아닌가?”
“화류계에는 철칙이 있어요. 연예인이 여자나 남자 끼고 논 이야기는 소문이 나도, 정치인과 재벌 같은 권력자가 여자 끼고 나눈 이야기는 화류계 안에서만 돌뿐 절대로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아요. 그건 목숨이 달린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애초에 거기서 살아남지도 못해요. 권력자들도 그걸 아니까 거기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거고.”
“그럼 당신이 그걸 여기저기 알아본 것은 문제가 안 되는 건가?”
“이건 지금 워낙에 큰 이슈이고, 화류계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라 나뿐 아니라 손과 입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아보는 중인 이야기에요. 특히 나는 JH와의 관계도 있으니까 더 확인해보는 것이 정상이죠.”
최명선이 이번에 죽은 명지훈의 이름을 약자로 언급했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있군. 그건 문제가 안 되나?”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나나 걔까지 신경 쓸 상황은 아니더군요. JH를 상대한 사람이 나랑 걔만 있는 것도 아니고, 관련자 다 조사할 생각이면 우리보다 먼저 서울 시내 텐프로 반은 조사해야 할걸요? 우리까지는 안 와요.”
주다혜도 걔라고 호칭할 뿐, 절대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유진이 질문 한 번 던질 때마다 최명선의 대답은 명쾌했다.
애초에 고주희 과장에 비하면 기대하는 깊이 자체가 전혀 다르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기대치 내에서는 고과장보다 훨씬 유능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유진은 최명선에 대한 어제의 결정에 새삼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조금 더 일을 던져봤다.
“혹시 민영후라는 이름 들어봤나? 부친이 전직 국회의원 민정기라는 인간이더군.”
“민정기는 알아요. 그 아들까지는 모르지만.”
“한번 알아봐 줘. 하지만 조심해. 이미 누가 일류급 심부름센터 동원했다가 역으로 털려서 신변이 위험해진 상황이야.”
최명선은 유진의 명령에 잠시 고민했지만,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일단 화류계에 그 인간 관련해서 어떤 소문이 있는지 정도만 알아볼게요. 이 정도로 괜찮을까요?”
“훌륭해. 역시 마음에 들어. 그리고 하나 더.”
“뭐죠?”
“혹시 수빈이라고 알아?”
최명선은 쉽게 그 이름을 떠올렸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자기는 굳이 관련해서 조직이나 사람 이름 피하려고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유진이 너무 쉽게 이름을 꺼낸 때문이었다. 그것도 하필 사이도 안 좋은 여자애 이름을!
대답이 자기도 모르게 살짝 퉁명했다.
“알아요.”
“조심스럽게 그 여자도 좀 살펴봐 둬. 당신이랑 일하게 될 것 같으니까.”
최명선은 많이 당황했다.
손수빈이 텐프로에서도 에이스급에 속하는 일류이기는 하지만, 유진이 술집 차리거나 매춘 조직 차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손수빈을 어디다 쓰려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생각이야 어쨌든 그녀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네, 알겠어요.”
시원시원한 최명선의 태도에 유진은 만족감을 느꼈다.
“일을 지금처럼 계속 잘 해주면 조만간 내가 보상을 해주지. 자신하는데 당신도 정말 만족할 거야.”
최명선은 이 남자에게 자신이 뭘 받아야 만족할 수 있을지 고민해봤지만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어중간한 돈 정도로는 절대로 어림없었다. 그래도 입은 습관적으로 바르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다음에 보지.”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통화 종료에 맞춰 오븐도 땡 소리를 내며 조리 완료를 선언했고, 유진은 빵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