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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142화 (142/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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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여자들의 상관관계 – 17

#009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여자들의 상관관계 – 17

소진이네 집에 놀러온 아이들이 가장 기대하는 시간인 간식시간.

유진이 새로 선보인 프랑스 풍의 빵에 아이들보다 엄마들이 열광했다.

그동안 여러 종류의 간식을 만들었지만, 아이들이 평소에 부모님 눈치에 먹기 힘들어했던 떡복이, 튀김, 꽈배기, 떡꼬치 등의 달달한 것 위주로 하는 간식들이었다. 엄마들도 다들 맛있게 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약간은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선보인 정통 프랑스 스타일 베이커리는 아이들은 물론 엄마들의 취향도 정통으로 저격했다. 한국인의 영혼 보충제인 아이스커피와 함께 하는 이 달콤하고 고소한 빵들은 먹으면서 죄책감이 느껴질 정도로 끝내주는 맛이었다.

“어휴, 소진이 삼촌. 우리만 이런 거 먹여도 괜찮은 거예요? 이거 소문나면 오늘 못온 여편네 중에 한숨 쉬는 여편네들이 한둘이 아닐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소진이 또래 아이가 없어서 여기 못 오는 동네 여자들의 질투가 장난이 아니에요.”

맛있게 빵을 먹고 있던 아이들 보호자 중의 한 분이 유진을 붙잡고 수다를 떠셨다. 반쯤은 농담처럼 가볍게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렇게 가벼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젊은 아이 엄마 중의 한 사람이 했다면 약간 주제 넘는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이 화제를 꺼낸 것은 태현옥 여사였다.

태현옥 여사는 올해 일흔둘의 할머니로, 두 살 어리신 남편분을 2위로 밀어내신 마을 최연장자셨다. 또한 요즘 대한민국 분위기와 다르게 동네 사람들 간의 교류가 활발한 편인 이 마을에서 모든 동네 아줌마들의 대장이자, 마을 사람들 사이의 사소한 문제를 중재하시는 자타 공인 이 마을의 가장 큰 어른이었다.

동네 사람 중에는 이웃 할머니의 오지랖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소수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은근한 왕따로 마을에서 버티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마을에는 병을 앓고 있거나, 왕따나 학교 폭력 같은 것을 겪어 본 경험이 있는 아이가 있는 가정이 유난히 많은 편이었는데, 태 여사를 중심으로 마을 여성들 거의 전부가 참여하는 커뮤니케이션이 형성되면서, 서로의 아이들을 함께 보호하고 서로 친하게 지내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예전에 소진이에게 왕따의 조짐이 느껴지자, 동네 학부모들이 다 나서서 문제를 확인했던 것도 그런 마을 분위기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상식이 있는 아줌마들은 태 여사님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엄마들을 돕기 위해서 이 커뮤니티의 중심을 잡아 주시고 계신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태 여사님의 권위를 모두 존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아빠 없이 소진이를 키우기 위해서 고생한 차민영은 물론이고, 여러모로 신경 쓸 것이 많은 고영은 같은 유진의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런 태현옥 여사가 지금 이 일을 화제로 꺼낸 것도 소진이를 위해 벌이고 있는 유진의 이 모임이 슬슬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편을 가르는 기준이 될 조짐을 보여서 꺼낸 이야기였다.

밤마다 동네 돌아다니면서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훔쳐보는 것이 취미인 유진은 요즘 할머님에게 이 일을 성토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대책도 생각해 둔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해둔 것이 있습니다.”

“그래요?”

나이에도 불구하고 태 여사님은 조심스러운 경칭으로 유진과 대화를 나누었다. 태 여사님의 교양을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했다.

“일단 지금 쓰고 있는 수영장은 어디까지나 간이 수영장이라서 오래 사용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날이 추워지면 무용지물이 될 거고요. 하지만 아이들만 아니라 어른들도 다 좋아해서 그냥 없애기는 너무 아쉽더군요.”

“그래서요?”

“성 사장님과 고 사장님과 상의를 했는데, 조만간 마을 중심의 식당 옆에 아이들 용의 실내 수영장을 만들 생각입니다.”

고 사장님은 당연히 고영은을 말하는 거고, 성 사장님은 고영은의 남편이자 이 주택 단지의 건설업자이자 관리자인 북성건설 성지호 사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유진이 설치한 수영장이 워낙에 화제가 되어서 이웃집 사람들도 모를 수가 없었다. 성지호 사장은 최근 약간 지지부진한 주택 단지 분양에 이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최근 집에 아이들 용 수영장을 설치하는 유행이 있기는 했지만, 그걸 관리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거대 규모의 아파트 커뮤니케이션 시설처럼 풀 사이즈 수영장은 설치하기 어렵겠지만, 지금 유진이 설치한 간이 수영장 2~3배 정도의 크기로 아이들이 놀기 쉽게 수심을 낮춘 수영장은 그렇게 크게 건설비가 부담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정도면 어른들도 본격적인 수영은 힘들어도, 물놀이로 놀기에는 충분한 사이즈 이기도 했다.

관심 있는 가정을 상대로 회원을 모집해서 윌회비를 책정하고, 제대로 된 수질과 시설을 관리할 인원과 안전요원도 고용할 예정이었다.

현재의 서른 가구 남짓으로는 무리이지만, 지금 100가구 수준으로 마을 확장이 진행 중이니 그것까지 감안하면 무리한 욕심은 아니었다.

관심이 생긴 다른 엄마들이 월회비의 수준이나, 아이들 안전 대책 같은 것을 물어봤다.

사실 그런 것까지 유진이 알바는 아니기는 했지만, 이 사업에는 어쨌든 유진의 입김도 있었기 때문에 적당히 설명해 주었다.

전체 회원수를 생각해서 사용 시간은 예약제로 운영하고, 안전요원이 상주하는 아이들 사용 시간에도 제한을 두고, 전체 가입 인원수 고려해서 최대 회비 및 최소 회비 같은 것도 다 준비 중이며, 그 모든 결정은 마을 커뮤이케이션에서 정식으로 상의할 예정이라는 말에 엄마들도 모두 만족했다.

사실 이건 유진이 만든 수영장을 출입하지 못하고 있는 엄마들뿐만 아니라 이 수영장을 자주 방문 중인 엄마들에게도 희소식이었다.

초기에 몇몇 엄마가 아이들 기죽을까 봐 근사하게 간식 같은 것 준비해온 것과 비슷하게, 엄마들은 자기들이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계속 공짜로 이 집에 신세를 지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중이었다.

“좋은 이야기이긴 한데, 그럼 이제 소진이 오빠가 주는 간식은 못 먹겠네요. 애들도 그렇겠지만 저도 꽤 아쉽네요. 정말 돈 주고 사서 먹기도 힘들 정도로 훌륭한 것들인데요.”

엄마 중 한 명이 뱅 오 쇼콜라의 단맛을 아이스커피로 중화시키며 중얼거렸다.

사실 마을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불화는 수영장보다는 이쪽이 더 문제였다.

끝내주는 간식에 빠진 어린아이들이 언니 오빠뻘인 애들에게 자랑하며 약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고, 엄마들 사이에서도 이걸 먹어본 사람과 안 먹어본 사람 사이에서 화제가 갈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유진은 이것도 대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이쪽이 더 메인이었다.

“조만간 마을 중심에 있는 식당 2층의 카페테리아를 본격적으로 활성화하려고 생각 중입니다. 바리스타까지는 아니어도 담당 직원 고용해서 간단한 커피나 차를 팔고, 제가 구운 여러 종류의 빵도 판매할 예정입니다. 식당도 장기적으로는 지금 진행 중인 주택 공사들 다 끝나면 도시락이랑 반찬 포장 판매랑 아이들 간식 위주 판매로 운영 방식을 바꿔가려고 합니다.”

“그건 정말 반가운 이야기네요.”

태 여사가 반색했다. 나이 먹고 몸 움직이는 것 귀찮아지다 보니, 자기 손으로 자기 먹을 것 해 먹는 일에 질려버리신 태 여사는 그렇지 않아도 부부가 함께 현재의 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시는 경우가 많았고, 비공식적인 반찬 구입도 자주 하시는 편이었다.

지금은 그래도 바깥손님들이 많아서 조금 불편을 느끼고 계시는 편인데, 본격적으로 마을 사람들 위주로 운영하며 포장 판매도 정식으로 진행한다고 하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다른 엄마들도 다들 반색했고, 어른들 이야기 훔쳐 듣던 아이들도 정식으로 간식 가게 열릴 거라는 이야기에 좋아했다.

슬쩍 정보를 풀어서 살펴본 사람들의 반응이 모두 좋아 보이자 유진도 흐뭇했다.

유진은 성화가 수작을 부리는 것이 분명한 주다혜 사태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고, 그에 연관해서 열심히 칼과 도끼를 휘둘러야 했다. 고주희를 다그치고, 최명선을 회유하고, 유미향에게도 신경을 썼다.

하지만 그런 것은 다 부가적인 일이었다. 그저 자기의 현재를 위협하는 외부의 짜증 나는 공격에 대응하는 것일 뿐이었다.

유진의 현재는 이것이었다.

문화생활을 즐기고, 집안일을 챙기고, 소진이와 놀아주고, 식당에서 요리하고, 이제는 사장님과 알바 사이라기보다는 함께 사업하는 동업자 사이가 되어 버린 고영은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가게를 확장하고 더 재미있게 운영할 것인가 등을 상의하는 것이 유진의 진짜 삶이었다.

오늘 만해도 유미향이나 행방불명된 여자들 혹은 어제 일의 여파나 최명선에 대한 것들에 대해 신경 쓴 시간은 별로 안 되었다.

그보다는 오늘 점심 메뉴에 올린 반찬들의 조리법과 분량, 내일 점심 메뉴, 테스트 삼아 구워본 각종 빵에 대한 반응과 현재 가게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오븐의 작업량 및 효율 등을 고민한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

하다 못해서 최명선에게 어제 텐프로에서 만난 손수빈에 관해서 물어본 것조차 그 일환이었다.

‘단거리 육상 선수 출신이라고 했으니 비슷한 처지의 운동 선수들과 안면이 좀 있겠지. 수영장 관리와 안전요원으로 쓸만한 사람들 추천받을 수 있을 거야. 카페 아르바이트로도 괜찮겠지.’

유진은 자기 몸이 워낙에 특별한 탓인지, 군인이나 운동선수 등 어느 정도 이상 육체가 단련된 사람에게 꽤 호의적이었고, 체력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 손수빈을 조금 특별하게 여긴 이유에 이것도 있었다.

“그런데 수영장 만들어지면 그 시설 운영도 고 여사님이 맞는 거예요?”

이 동네 만든 건설사 사장님 부인인 이유로 고영은은 여자들 사이에서도 꽤 존중받고 있었다.

“아, 그건 본인 의사를 확인해봐야겠지만, 가능하면 혜인 씨에게 부탁할 생각입니다.”

“강준이 엄마에게요?”

“네, 지금 우리 모임이 참여 인원을 생각하면 일정 조정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닌데, 혜인 씨가 아주 능숙하게 조정해 주고 있잖아요. 그 정도면 클럽 운영이나 회원들 일정 조정도 충분히 감당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일하시는 것 싫어하실 것 같지도 않고.”

“하긴 강준이 엄마가 능력이 있죠. 외부에서 사람 고용하는 것보다 훨씬 믿을 수 있고.”

“그럼 카페 직원도 미리 생각해둔 사람 있어요?”

“그건 무연씨에게 부탁해 보려고 합니다.”

“무연씨라면 그 장화진 교수님 딸 말인가요? 병이 있어서 밖에 잘 나오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마음의 병이 좀 있어서 집에서 쉬고 있는데, 카페에서 일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이 마을 카페라면 행패 부리는 진상 악질 고객이 있을 것도 아니고.”

“음. 확실히 나쁘지 않겠네요.”

유진은 기회가 된 김에 태 여사님이나 다른 엄마들에게 열심히 앞으로의 사업 비전에 대해 밝혔다. 그녀들이 이 마을의 여론을 형성하는 주축인 사람들이니, 이 사람들에게만 호의적인 반응을 얻어 두어도 나중에 편해질 수 있었다.

유진도 이제 그 정도는 생각이 가능할 정도로 약간 사회화가 진행되었다.

흔히 맘카페라고 불리는 동네 아줌마들 모임에 최적화된 사회화라는 것이 좀 웃기기는 하지만, 어차피 유진이 지금 원하는 세계는 여기가 전부이니 별문제는 아니었다.

아직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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