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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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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여자들의 상관관계 – 18
유진은 저녁 식사 시간이 이런 분위기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다.
아침의 빵에 이어 오늘 저녁은 중화요리 특선이었다.
정통 중국식은 아니고 한국향 중화요리들인 짜장면, 탕수육, 볶음밥, 만두의 4종 세트였다.
손이 좀 복잡하게 가는 것에 비해 소진이에게 인기가 없는 짬뽕이 빠진 대신, 탕수육은 달달한 소스의 찹쌀 돼지고기 탕수육과 매콤한 소스의 소고기 탕수육 2종류, 만두는 군만두와 찐만두 합쳐 4종류였다.
흔해 빠진 요리들이기는 해도 그래서 오히려 유진의 요리 실력이 확연히 드러나는 그야말로 유진의 스페셜 메뉴이자, 정말 특별히 정성을 쏟은 메뉴였다.
어제에 이어 오늘 하루 신나게 놀았으면서도 여전히 삐짐이 덜 풀린 소진이를 달래기 위한 필살기였는데, 정작 문제는 소진이가 아니었다.
차민영의 분위기가 정말 심상치 않았다.
저녁 식사 내내 손님들은 물론이고 엄마에게 삐져 있던 소진이마저 차민영의 눈치를 봤다. 살짝 주눅이 든 소진이가 밥 먹는 내내 한 손으로는 유진의 셔츠를 붙잡고 놓지 않을 정도였다.
예외라면 유미향 정도였는데, 그녀도 차민영 눈치를 보는 정도는 아니어도 아침에 비해 확연히 조용하게 식사에 집중했다.
덩달아 유진도 기분이 나빠졌다.
식사 시간은 유진에게는 거의 성스럽도록 소중한 시간이었고, 차민영과 소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은 더욱 그랬다. 함께 살기 시작한 이래 이런 분위기의 식사는 처음이었다.
성화의 압박이 처음 드러나고, 차민영이 눈물 흘리면서 소진이 출생의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그때도 식사 시간에는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유진의 상한 마음이 표정과 분위기로 드러나고, 그걸 차민영이 느끼고 더 기분이 다운 되면서 식사 분위기는 정말 실시간으로 박살이 났다.
결국 소진이가 체하는 기미를 보이는 바람에 유진이 소진이 데리고 산책하러 나가는 것으로 저녁 식사 시간이 끝장나 버렸다.
저녁 식사가 엉망으로 끝난 후, 유미향이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지하의 자기 손님방으로 내려가자 차수연은 차민영을 찔러 보았다.
어젯밤 자기와 주다혜까지 한꺼번에 포장해서 유진에게 받친 이후로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다 못해 활기차게 웃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이러는데 확인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리 찌르고 저리 찌르고 닦달하고 화까지 내서 들은 이야기는 단 하나뿐이었다.
“수연아. 우리는 앞으로도 평생 그 사람의 여자였다는 원죄와 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게 될까?”
그걸로 차수연은 차민영과의 대화를 포기했다.
애초부터 그 병신 같은 새끼에게 반해서 그 병신 같은 새끼의 범죄에 능동적으로 참여한 자신도 아니고, 납치당해 강간당하고 굶겨지고 두들겨 맞다가 정신이 나가 버렸던 사람이 무슨 그 새끼의 여자란 말인가?
그 새끼가 이미 죽었고, 차마 자기들 사정을 남들에게 떠들 수 없어서 넘어가는 거지, 차수연 생각에 차민영의 사정이면 둘의 혼인 관계도 법적으로 무효였다. 사람 납치해서 두들겨 패고 강간해서 정신을 부숴버리고 맺은 혼인 관계가 합법이 되려면, 지금이 21세기가 아니거나 여기가 대한민국이 아니어야 했다.
그리고 차민영이 이러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이 씨발 년이, 또!’
차수연은 옛날부터 유미향을 싫어했다. 아니 유미향뿐만 아니라 고영은도 싫어했고, 고영은의 현재 남편의 전 아내이자, 강준화 사고 당시에 함께 죽었던 또 다른 주요 멤버 지서영도 싫어했다.
그중에서 가장 싫어했던 것은 고영은과 지서영 그중에서도 고영은이었다.
다른 여자들이 강준화에게 부서져서 성노예로 전락한 것과 달리 고영은과 지서영은 스스로 강준화에게 협력하는 동업자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고영은은 가족에게 배신당하고 자기 파괴적인 생각으로, 지서영은 사업이 위험하다 못해 온 집안을 다 끌어안고 몰락할 지경에 처한 남편을 돕겠다고 나섰다가 그 꼴이 되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각자 원하는 것이 있는 상태에서 반쯤은 자의로 선택해서 그렇게 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가장 싫어한 것과 별개로 혐오하고 증오하고 경멸한 건 유미향이었다. 고영은과 지서영은 각자의 사정이라도 있으니 억지로 납득해줄 수 있었지만, 유미향은 아니었다.
차수연은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이번에도 유미향이 유미향 했다는 것을 보지 않고 듣지 않아도 훤하게 알 수 있었다.
예전에는 이런일이 있어도 나서지 못했다. 자기 원죄가 있기 때문이었다.
차수연은 강준화의 성노예 중 가장 특별한 존재였다.
사실 그녀가 싫어하는 고영은이나 지서영은 물론이고 유미향보다도 그녀가 더 개년이고 썅년이었다. 왜냐면 스스로 원해서 다른 목적도 없이 그저 강준화를 원해서 강준화의 성노예가 된 유일한 인물이 차수연 본인이었으며, 다른 숱한 여자들을 유인해서 그렇게 만든 장본인 중의 한 명이니까.
차민영이 이제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적당히 구박이나 하는 식으로 넘길 뿐, 그 속에 자신을 향한 본능적인 분노와 증오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차수연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고, 다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 옛날 차민영을 그 꼴로 만든 것도 본인이었고, 유미향을 찍은 것도 자기였으니, 아무리 개 같아도 그녀가 입을 열 자격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최소한 차수연이 유진과 관련해서 차민영이나 유미향에게 빚진 것이 없고, 차민영이 개인적으로 유미향에게 빚진 것도 없다.
유미향은 지금 여기서 차민영이나 유진에게 뭔가를 요구할 자격이 없는 존재였다.
그러니 차수연이 이 일에 나선다고 해도 누구도 그녀를 탓할 자격은 없었다.
그래서 차수연은 그날 밤, 유진을 찾아갔다.
자기에게 물에 대한 약간의 트라우마를 만들어 버린 욕실의 욕탕에서 쉬고 있는 유진을.
** ** **
유진은 물을 좋아한다.
마시는 물도 물론 좋아하지만, 그보다 몸을 담글 수 있는 커다란 물의 덩어리들을 좋아한다.
연구소 시절 유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 중의 하나가 욕조였다.
아주 어린 시절에 가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사용한 적이 있었지만, 약간 자란 이후로는 구경도 못 했다. 씻는 것은 언제나 샤워 시설이 전부였고, 그나마도 다른 사람의 손에 들린 호스에서 뿌려진 물에, 다른 사람의 손에 들린 솔로 씻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 몸이 전부 잠길 정도의 물에 몸을 담그고, 회색빛 천장이 아니라 끝없이 펼쳐진 검거나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일은 유진에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자기가 이제 연구소를 벗어나서 자기 의지로 살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상징적 행동이다.
그래서 유진은 수영장을 좋아했다. 차민영의 눈치를 뚫고 마당에 수영장을 만든 이유였다.
그리고 유진이 이 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소가 2층의 욕탕인 이유이기도 했다.
사람 서넛이 들어가고도 남을 이 커다란 욕탕에 따뜻한 물을 가득 채우고 앉아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유진이 이 집에서 살게 되면서 찾은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차수연이 불쑥 욕실에 들어와 말을 걸었을 때, 유진의 기분은 저녁 식사 무렵보다는 꽤 괜찮아진 상태였다.
“할 말이 있어. 괜찮아?”
차수연은 슬쩍 유진의 눈치를 보았다. 첫 만남에서 이 욕실에서 있었던 일도 그렇고, 어젯밤의 섹스도 그렇고 차수연은 주다혜 정도는 아니어도, 유진이 조금 어려웠다.
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들어와.”
“응?”
“욕조로 들어오라고. 물이 따뜻하고 좋아.”
차수연은 움찔했지만, 곧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었다. 가운 안은 알몸이었다. 굳이 유진이 욕조를 쓰는 타이밍에 말을 걸었을 때부터 사실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는 바였다.
그녀에게 그리 유쾌하게만 남은 기억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 욕조는 유진과 그녀가 처음으로 단순히 아는 사이 이상의 접촉을 가진 장소이니까.
자기의 벌거벗은 알몸에 유진이 시선조차 주지 않았지만, 그것도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주다혜를 대하는 유진의 태도로, 유진이 여자를 볼 때 미모나 몸매 같은 것에 별로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실 유진에게 조금 더 반한 것이기도 했다. 자기 외모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봐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차수연이 자기 외모에 자신이 있는 여자이기에, 그리고 유진이 너무 멋진 남자였기 때문에, 차수연은 그런 점도 매력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본인이 외모에 자신이 없다면 무시당한다고 느꼈을 테고, 유진이 정말 멋진 남자가 아니었다면 꼴값 떤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말이다.
어쨌든 차수연은 유진의 옆에 붙어 앉아서 자연스럽게 유진의 몸에 자기 피부를 맞대었다.
따뜻한 물과 따뜻한 유진의 몸이 주는 감각을 몸으로 느끼면서 몸의 긴장을 풀었다.
“아, 좋다.”
“응, 좋지.”
둘은 잠시 숨길 필요 없는 감탄을 내뱉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따로 추가 대화는 없었지만, 차수연은 답답함이 많이 풀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긴장이 풀어지자 말도 조금 쉽게 할 수 있었다.
“선배가 저녁 시간 내내 기분이 안 좋았잖아. 왜 그런지 알아?”
“그 여자 때문이겠지. 유미향 교수.”
“어? 어떻게 알았어?”
차수연은 조금 당황했다. 유진이 그걸 알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유진은 세상 물정에 어둡고 눈치는 쥐뿔도 없는 남자였으니까.
유진은 그런 차수연의 태도에 오히려 어이가 없었다.
“점심 맛있게 먹고 내가 간식 준비하러 가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여자가 간식 시간 지나고 저녁 식사 준비 끝나자 기분이 개판이 되었지. 그동안 같이 있던 사람이라고는 그 교수년 밖에 없었는데, 다른 이유가 있을 수가 있나?”
“어. 그러네?”
차수연은 조금 당황하면서도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유진의 말투에서 유미향에게 호감보다는 반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침 먹을 때 둘의 분위기가 꽤 화기애애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살짝 걱정하고 있었다.
“정확한 이유까지는 모르겠지?”
“당연히.”
사실 둘이 뭔 일로 문제가 생겼을까까지는 유진의 관심 밖이었다. 단지 계속 저렇게 분위기를 망치면 한마디 한 다음에 유미향은 물론이고, 주다혜와 차수연까지 다 쫓아낼 생각이었다. 주변에 쓸데없는 사람들 없으면 기분 상할 일도 없을 테니까.
유진과 차민영의 사이가 요즘 부드럽고 친밀해졌다고 해도, 유진이 세심하게 차민영의 기분까지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아직 유진의 사회화가 차민영 기분 챙길 정도로까지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소진이 앞에서 소진이와 관계된 일이라면 엄마로서의 그녀 체면에 신경을 써 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알 바 아니었다.
차수연은 지금 여차하면 자기도 쫓겨날 상황이라는 것은 몰랐지만, 어쨌든 차민영의 기분을 풀어줄 필요가 있다고 여겼고, 그 과정에서 될 수 있는면 유미향은 쫓겨났으면 했다.
그래서 이야기를 풀었다.
“선배가 지금 기분이 엉망인 것은 유 교수 때문일 거야. 그년은 옛날부터 그랬거든. 예전부터 그걸로 선배를 자주 찌르고는 했고, 그때마다 선배 기분은 저렇게 박살 나고는 했지. 씨발년.”
“그래서 그게 뭔데?”
여기까지는 별로 어렵지 않게 말했지만, 지금부터는 미리 할 말을 준비한 상황에서도 좀 껄끄러웠다.
“진, 당신 선배에게 옛날이야기 다 들었다면서? 선배와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물어본 차수연의 질문에 대한 유진의 반응은 차수연의 예상과는 매우 달랐다.
유진은 그 질문에 한숨을 팍 내쉬더니 잠시 얼굴을 욕탕에 담갔다가 꺼내기까지 했다. 그리고 젖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뒤로 쓸어 넘기더니 폭발해 버렸다.
“또 그 강준화 이야기인가? 뒈진 후 화장해서 시체도 안 남긴 지 5년이나 지난 그 병신 새끼의 일에 왜 이렇게 다들 지랄인 거야?”
그건 차수연이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폭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