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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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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여자들의 상관관계 – 20
고주희는 생각난 김에 부하직원들 시켜서 강준화에 대한 추가 자료와 고주희가 떠올린 재벌 3세 및 국회의원의 이후 상황을 확인했다.
강준화의 자료는 나오지 않았지만, 다른 두 사람의 것은 쉽게 확인되었다.
건설사는 그 후 불매운동까지 벌어지며 은행의 돈줄이 막히고 회사가 망할뻔한 위기에 처한 것을 해당 건설사가 속한 그룹에서 본사 차원의 지원을 퍼부어 간신히 살려냈다. 보통 건설사는 그룹의 비자금을 맡는 곳이기 때문에 망해서 자료라도 유출되면 그룹 전체가 난리가 나는 수가 있다. 손해를 보더라도 살렸어야 했으리라.
문제는 그사이에 그 회사가 노리고 있던 알짜배기 사업들은 성화 건설을 포함한 국내 대기업 계열 건설사들이 다 채갔다는 것이었다. 성화 건설은 당시 대한민국 최대의 재개발 이슈로 화제가 되고 있던 용산 재개발과 부산 해운대 앞 초대형 주상복합아파트 등을 차지했고, 다른 회사들은 해외 대형 건설 프로젝트들을 가져갔다.
폭로 당한 그 국회의원도 비슷했다.
한참 잘나가던 차기 대권 후보의 최측근이었던 그 국회의원 본인은 물론이고 그가 모시던 대권 후보도 정치 인생이 완전히 박살 나 버렸다. 그 후 해당 대권 후보 대신 정지운 의원이 밀던 대권 후보가 당의 후보로 결정된 후 대통령까지 당선되었다. 폭로 당한 국회의원의 지역구는 정지운 의원 계파의 비례대표의원 후보가 물려받아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벌어진 시기는 아직 성화 본사와 성화 건설 사이에 아무런 문제 없이 공조가 이루어지던 시기이기도 했으며, 그때 문제가 된 여자들은 지금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강준화의 자료와 크로스 채크 해본 결과 강준화와 무관한 사이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이 정도면 상황은 분명했다.
회장님과 부회장님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렇게 무모한 사보타주가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고주희가 지금 파고들어 가고 있는 것은 그녀가 소속된 제2부속실의 비밀이자 치부였다. 그것도 지금은 이사나 상무 실장급 같은 최고 자리에 있을 높은 분들이 한참 현역 시절이었을 시점의. 그리고 어쩌면 회장님과 부회장님까지도 관련되어 있을지 모르는 그룹 전체의 치부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고주희는 유진의 요구사항 같은 것을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 고주희가 가장 걱정해야 하는 것은 자기 목숨이었다.
자기 전임자들이나, 최근에 유진의 일에 휘말려 죽은 사람들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회사는 사람 하나 죽이고 흔적도 없이 지우는 것에 능숙한 사람은 얼마든지 많이 있었다. 그것도 고주희처럼 가족 하나 없는 사람이라면 더욱 편하게.
고주희는 전화기를 들었다.
지금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가장 무서워서 오히려 믿을 수 있는 분인 사모님뿐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회의실 문이 열렸다.
“실례하네, 고과장. 잠시 이야기 좀 할까?”
‘씨발.’
고주희는 다시 한번 욕을 입에 담았다. 다행히 입 밖으로는 나가지 않았다.
이전처럼 누군가에게 방해받지 않기 위해 보안 잠금 처리까지 한 회의실 문을 거침없이 열고 들어온 인물은 그럴만한 인물이었다.
예전에 유진이 처음 깽판을 저지를 때의 대 회의에도 부하들이 회의하는 자리에 굳이 참석하지 않고 보고만 들었던 거물 중의 거물, 그녀가 소속된 제2부속실의 수장인 전략기획2실장이었다.
회의실에서 고주희를 도와 회의 중이던 부하직원들이 다 벌떡 일어나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고주희는 그럴 수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실장님.”
고주희는 자리에 앉은 그대로 그를 맞았다.
회의실 테이블 밑으로 가린 손가락 끝에 걸려 있는 통화버튼을 누를 준비를 실장에게 그대로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실장은 그런 고주희의 태도에도 별로 불쾌한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다른 직원들을 슥 둘러보고는 한마디 했다.
“고 과장이랑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모두 잠시 자리 비켜줬으면 좋겠군.”
직원들이 움찔했다. 지금 회의실에 남아 있는 직원들은 고주희랑 함께 죽겠다고 결심한 그 여직원들이었다. 그녀들도 고주희랑 같은 서류를 같이 조사하고 있었고, 그래서 고주희 정도는 아니어도 다들 지금 자신들이 어디를 파고 있는지 느끼고 있었다.
고주희를 실장과 단둘이 둬도 될지 걱정했다.
실장이 피식 웃었다.
“부하직원 장악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니, 핵심은 잘 만들어뒀군. 걱정하지 말게. 설마 피를 보더라도 여기서 볼까.”
실장의 얼굴은 웃는 표정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누구도 같이 웃을 수 없었다.
섬뜩한 말을 참 편하게도 하는 실장의 모습에 다들 기겁했지만, 같이 웃을 수 없는 것과 상관없이 그의 말이 맞기는 했다.
고주희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부하 여직원들은 둘의 눈치를 살피며 모두 회의실을 나갔다.
둘이 되자 실장이 대충 회의실 의자 중 하나에 앉아서 말했다.
“손 좀 테이블 위로 올려주겠나? 겁이 나서 무슨 말인들 하겠나. 참고로 이 이야기는 사모님에게 해봐야 별로 안 좋아하실 거야. 회장님 일가의 역린에 해당하는 부분이기도 하거든.”
고주희는 잠시 실장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본사의 전략기획실장은 부사장급이다. 그리고 어지간한 계열사의 사장급들보다 더 핵심 인원이다. 제2부속실 실장은 전략기획실장보다는 한 단계 낮은 급이지만, 전략기획실 전체의 이인자로, 칭호조차 제2부속실장이 아니라 전략기획2실장이다. 그 정도로 급이 높고, 무엇보다 부회장님의 직속으로 회사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책임지는 실무 책임자였다.
고주희 정도는 순식간에 태어났던 기록까지 다 말살한 후에 물고기 밥이나 닭 사료로 만들 수 있을 거물이었다. 설사 고주희가 사모님 직속이라고 해도.
고주희는 순순히 손을 올렸다. 핸드폰은 그사이에 껐다.
고주희가 굳이 지금 당장 자신과 싸우겠다고 나서지 않는 것을 확인한 실장은 회의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자료들을 대충 살펴보았다. 그리고 혀를 차며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능하군. 고과장도 그리고 저 여직원들도. 확실히 남자 직원들이 여직원 평가하는 것은 100% 믿으면 안 되겠어.”
회사 남자들 모두가 그러겠냐마는 제2부속실은 특징상 깡패나 군대에 가까운 조직이었고, 그래서 여성을 어느 정도 배제하는 마초적인 성향이 강했고, 소속된 여직원들을 낮춰보는 편이었다.
딱히 거기에 불만을 제기하기도 어려운 것이 남자 직원들이 여자 직원보다 훨씬 위험한 일에 많이 동원되고, 그 와중에 죽거나 다치는 일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거나 말거나 누구나 다 인정하는 가장 위험한 자리에 앉아 승진중인 고주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죄송하지만 딱히 이 일이 아니어도 사모님에게 보고할 것이 많습니다. 그러니 빨리 본론에 들어가면 안될까요?”
고주희는 거침없이 실장을 찔렀다. 어차피 이미 버린 몸이라서 사릴 이유가 없었다.
실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고주희를 노려보았다. 몹시 싸늘하고 매서운,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그런 눈빛이었지만 고주희는 태연하게 마주 노려보았다. 유진을 시작으로 회장님 일가의 그 무시무시함에 비하면 실장의 눈빛은 그럭저럭 감당할만했다.
잠시 눈싸움을 하던 실장이 안 먹힌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을 풀었다. 그리고 물었다.
“보아하니 대충 상황은 짐작한 것 같군. 지금 뭐가 제일 궁금한가?”
고주희의 의문에 대답해 주면서 정보의 수위를 조절하고, 고주희를 설득하겠다는 의도에 고주희가 생각할 것도 없이 질문을 던졌다.
“지금 이 서류의 여자들에게 벌어지는 일들은 누가 왜 무슨 목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거죠?”
실장은 잠시 입을 살짝 벌렸다. 그리고 숨기지 않고 감탄을 보냈다.
“자네 질문하는 솜씨가 끝내주는군. 그거 전부 다 상세하게 말해 달라는 소리인 것은 알고 하는 질문이지?”
“더블M이 제게 요구한 것이 그겁니다. 이 일에 연관된 것이 틀림없는 성화에서 누가 왜 지금 이런일을 벌이고 있는 것인가. 참고로 더블M은 제가 제때 제대로 된 대답을 주지 않으면 유민영 여사를 시작으로 로얄 패밀리에 대한 직접 공격을 시작하겠다고 암시했습니다.”
유진은 딱 잘라 누굴 어떻게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고주희도 정확하게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아.”
실장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의 존재는 현재 회사의 금기였다. 회장님은 고주희 과장을 제외한 그 누구도 회사 차원에서 유진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명령했다. 뭔가 다른식으로 해석하거나 꼼수를 부리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명확하고 분명한 지침이었다. 이 회사에서 회장님이 이 정도로 명확하게 내린 지침을 왜곡하는 일은 자기 사표가 아니라 유서에 사인하는 수준으로 위험한 일이었다.
그에 비해 강준화의 존재는 회사의 예전 금기였다. 그건 그거 나름대로 입에 담기 싫은 이야기지만, 직계의 목숨이 걸린 일에서까지 비밀을 지키고 있을수는 없는 이야기였다.
실장이 입을 열었다.
“일단 이건 준화의 탄생부터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일세.”
“준화요?”
실장이 강준화를 부르는 방식에 고주희가 기겁했다.
“그래, 준화. 준화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강제로 재가한 다음에 갓난아기였던 준화를 처음 돌본 사람이 나였지.”
시작된 이야기는 더 점입가경이었다.
“준화 아버지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양반은 아니었어. 나름 한가락 하는 양반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주제를 모르고 넘보면 안 될 것에 욕심을 부린 흔해 빠진 멍청이였지. 중요한 것은 준화 어머니야. 자네도 이름 들어봤을걸세. 유순영 여사라고.”
고주희는 거론된 이름에 미칠 것 같았다. 차민영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망할 년, 그년 남자 보는 눈이 바닥이고, 남자 복은 바닥에서도 더 밑으로 파고들어 가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개판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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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희가 기겁하고 있던 시각, 같은 이름을 들은 유진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모친이 누구라고?”
“유순영 여사님. 준화씨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 재혼하셔서 지금은 중견 기업인 성주철강이라는 곳의 안주인이야.”
“아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그 여자가 누구 자식이라고?”
“부모님 말한다고 니가 알겠니? 성화 그룹 전대 회장님 외손녀야. 지금 회장님에게는 처가로의 5촌 조카가 되는 거지.”
“아, 씨발.”
차수연의 말에 유진이 욕설을 내뱉었다.
유진이 생각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놀랐다는 모습을 보이자 차수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고 있는 것 아니었어? 그 성화 그룹에서 나온 그 고주희씨 그래서 온 거 아니었어? 이모님이 그래도 소진이가 자기 손녀라고 신경 써주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모님?”
“어? 그게 우리 엄마랑 젊어서부터 아시는 사이였거든. 내가 준화 씨랑 가까이할 무렵부터 왕래가 끊겼는데, 그전에는 꽤 친했어.”
차수연은 이 부분에서 살짝 얼굴을 붉혔다. 강준화의 개짓거리와 차수연이 거기 엮인 것을 알게 된 양쪽 집안이 서로 책임을 미루고 싸우다가 갈라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차민영이 차수연은 금수저라고 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소진이 친부가 누군지 모를 차수연이 고주희에 대해서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실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맙소사.’
유진은 그들에게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건 없건 상관없이 혈통 자체는 성화 그룹의 현 회장 유명선의 손자이다. 그의 죽은 장남 유건영의 사생아니까.
차민영의 딸 소진이의 친부인 유성준은 유진의 생부 유건영의 둘째 누나인 유인영의 장남이다. 족보에도 안 올라가는 유진과 법적으로는 상관없는 인간이지만, 혈통적으로는 어쨌든 사촌 형제뻘인 인간이다.
그리고 문제의 차민영 전 남편 강준화는 유명선 회장의 아내인 유초혜 여사의 여동생의 딸의 아들인 것이다. 이쪽은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인간인 것 같으니까 공식적으로 소진이 친부 유성준의 외가로의 6촌 형제이다. 엄마의 외사촌의 아들을 굳이 형제로 여길 것 같지는 않지만, 6촌은 6촌이다. 덤으로 유진과도 혈통적으로는 6촌인 것이고.
차민영의 삶에 뭔가 중대한 영향을 주면서 그녀를 차지한 3명의 남자가, 그리고 소진이의 삶에 관련된 3명의 남자인 법적 부친과 생물학적 부친과 지금의 자신까지 전부 같은 조부 혹은 증조부를 둔 성화라는 거대한 하나의 핏줄로 엮여 있는 것이다.
‘아, 이건 안 돼. 이건 절대 비밀이다.’
이 정도면 유진조차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기는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차민영도 차민영이지만, 나중에 소진이가 이걸 알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원래도 그랬지만, 유진은 절대로 성화를 자기 혈통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새삼 결심했다. 절대로 성화 일가의 유씨 성을 쓰지 않겠다고.
‘차라리 좆같은 헤이즈나 더 좆같은 스토너가 훨씬 낫다.’
그리고 하나 더 결심했다.
‘강준화 관련 일은 최대한 빨리 처리한다. 이제 적당히는 없어. 최대한 빨리 관련된 인간 다 싹 갈아버려서 아예 다시는 거론되는 일도 없게 만든다.’
어쩐지 별거 아닌 남의 과거가 지나치게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친다 싶더니, 이유가 있었다.
‘이 망할 놈의 피.’
유진은 심연 속의 누군가가 갤갤갤갤 웃고 있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