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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147화 (147/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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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여자들의 상관관계 – 22

차민영이 유진에게 붙일 여자로 차수연을 가장 먼저 생각한 이유는 명확했다.

차수연은 강한 위압감으로 자신을 압도하는 남자가 취향이었다. 강준화는 병신이었지만, 멋진 외모와 광기가 어우러지면서 사람을 압도하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차수연은 그렇게 쉽게 강준화에게 넘어갔었다.

그리고 유진은 사람으로 가질 수 없는 것까지 함께 어우러지면서 사람의 영혼까지 위압하는 힘이 있었다. 차수연은 그녀가 있는 곳에서 유진이 보여주었던 몇 번의 카리스마와 어젯밤의 경험이 합쳐지면서 그런 유진에게 완전히 넘어간 상태였다.

유진도 그녀가 자신을 대하는 눈빛이나 분위기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의 본능에 가까운 직감으로 그걸 느끼고 있었다.

차수연은 오늘 온종일 유진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다리 사이가 젖어 들고,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었다. 지금도 사실 그녀의 다리 사이에는 그냥 욕조의 물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주다혜가 완전히 뻑이 간걸로 보였지만, 사실 주다혜보다 차수연이 더 미쳐있는 상태였다.

유진이 차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차수연은 그 손이 스쳐 지나갈 때 애정이 아닌 두려움을 느꼈다.

“난 너희의 그 강준화와 달라. 난 매춘 따위는 시키지 않을 거다. 오히려 반대지. 내 것이 된 이상 너희에게 다른 사람 손길이 닿는 것은 용납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강준화와 비슷한 부분도 있지. 난 독점욕과 소유욕의 화신이다. 아무거나 가지지 않지만 한번 내 것이 된 이상 놓치지 않는다. 너희가 이제 싫다고 해도 늦었어. 한번 내 것이 된 이상 난 너희를 놓아주지 않을 거다. 죽어서 시체가 되어도 놔주지 않을 거야.”

진지하게 보이는 소리였지만, 사실 내용은 참 유치하고 어린아이 같은 소리였다. 유진의 나이와 사회 경험 수준을 생각하면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차수연에게는 잘 먹혔다. 애초에 그 강준화에게 반했던 여자였다. 차민영만큼 아니 차민영보다 훨씬 더 남자 보는 눈과 취향이 나쁜 차수연은 이런 유진에게 홀딱 넘어가 버렸다.

“응, 난 니 거야.”

“그래, 그러니까 내 말 들어. 부숴버리기 전에.”

“응, 그럴게.”

차수연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물에서 몸을 일으켰다. 붉게 변한 몸과 얼굴은 물의 열기 때문만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저것도 같이 데리고 가서 오늘 밤은 그 여자 방에서 자. 여기서는 따로 일이 있을 거니까.”

유진은 어느새 욕실에서 들어와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주다혜를 가리켰다.

“응, 그럴게.”

차수연은 이 말에는 실망했지만,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 생각도 못 한 주다혜가 입을 열었다.

“질문 하나만 해도 돼요?”

“뭐지?”

“당신 몇 살이라고 했었죠?”

유진은 별생각 없이 그냥 답해줬다. 주다혜가 그렇게 맘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귀찮아도 자기 것이 되었으니 최소한의 대우는 해준 것이었다.

“21살.”

주다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뭔가 납득했다는 표정이 떠올랐지만, 유진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차수연도.

하지만 사실 그녀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그렇게 태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씨발, 중2병 환자인 것도 당연한 건가? 저 정도면 저건 젊은 애가 아니라 어린애잖아, 저거! 아, 씨발. 강준화 새끼에 이어 명지훈 같은 것이 걸리더니 이번에는 저런 애야. 난 남자 운이 왜 이따위지?’

주다혜는 젊고 세상 유행에 민감한 인플루언서였고, 차수연이 멋지다고 생각한 유진의 발언이 그녀에게는 소름 돋는 중2병 환자 애새끼의 겉멋 찬 개소리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문제는 그걸 보면서도 유진에 대한 콩깍지는 벗지 못했고, 유진을 벗어날 생각도 눈곱만큼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대신 차수연에게 끌려 방을 나서며 결심했다.

‘자리 잘 잡고, 조금 더 친해지면, 교육 좀 시켜야겠다.’

기왕이면 내 남자가 누가 보기에도 멋진 요즘 남자로 보이기를 바라는 주다혜의 작은 욕심이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 ** **

먼저 욕실에 올라온 것은 차민영이었다. 그녀는 가벼운 잠옷 차림이었는데, 유진이 뭐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순식간에 알몸이 되어 욕조로 들어왔다. 함께 생활한 지 이제 두어 달쯤 되면서 이런 건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었다.

“소진이는 잘 잠들었어. 자기 전에는 조금 그랬는데, 잠드니까 괜찮아졌어. 자면서 웃더라.”

“알아. 벌써 신나게 굴러다니더군.”

둘은 습관적으로 소진이에 대한 이야기부터 나눴다.

차민영은 유진이 보지도 않고 그런 걸 어떻게 아는지 묻지 않았다. 그녀는 유진이 보이는 특별함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받아들일 뿐.

이야기는 거기서 멈추었다.

차민영은 조금 우울한 기분이었고, 유진도 좀 껄끄러운 이야기를 들은 터라 잠시 분위기가 서먹했다.

차민영은 조심스럽게 유진의 옆에 앉아서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너무 조심스러워서 평상시의 그녀답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사실 차민영은 유진이 좀 적극적으로 당겨 주기를 기대했지만, 유진은 그 정도까지의 눈치는 없었다. 그래도 거부감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차민영은 어느새 유진의 팔 하나를 거의 끌어안듯이 바싹 붙어 앉았다.

따뜻한 물과 따뜻한 체온,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어둠에 잠긴 산자락과 밤하늘의 모습이 그녀의 마음속 작은 우울함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 유미향이 도착했다.

가운 차림이었던 그녀는 욕조 안의 남녀의 어딘가 몽실거리는 분위기에 잠시 질색이라는 표정을 짓더니, 가운을 벗었다. 안에는 욕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속옷 차림이었다.

“할 이야기가 있겠지? 당신도 일단 다 벗고 들어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자신은 바라보지도 않고 말하는 유진의 이야기에 유미향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름 노리는 바가 있어서 화려하면서도 유용하고 비싼 놈들로 잔뜩 무장하고 온 것인데 다 해제하려니 짜증이 났다. 바로 직전에 차수연과 주다혜의 끝내주는 몸매를 보고 질투를 불태우던 참이라서 더 그랬다.

그래도 지금 유진이 절대 우위의 갑이고, 자기는 그런 그에게 내줄 것이 마땅치 않은 을이니 이런 사소한 것에까지 싫은 티를 낼 수는 없어서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알몸이 되어 욕조에 들어와 차민영과 유진의 맞은편에 앉은 후 짜증은 2배 아니 3배가 되었다. 금수저 차수연이나 모델인 주다혜는 그렇다 치고, 자신과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회사원 아줌마 차민영의 몸매가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완벽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여자의 생명이라는 피부가 자기는 고사하고 차수연이나 젊은 주다혜보다도 더 압도적으로 보였다. 자기 딸인 어린 아기 소진이와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싶은 정도였다.

굳이 남자 앞에 자기 몸매 드러내면서 미모를 자랑하는 성격은 아니어도, 그래도 비슷한 수준이라고 생각하던 여자와 비교해서 갑자기 할머니라도 된듯한 느낌을 받으면 어떤 여자라도 질투에 미쳐버리는 것은 당연한 법이었다.

낮에 있었던 유미향에 지적에 깨닫는 바가 있어서 많이 주눅들고 우울해 있던 차민영도 그런 유미향의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는 다른 여자가 자기에게 보내는 질투의 눈빛은 그냥 본능으로 아는 법이니까.

차민영도 자연스럽게 유미향의 몸을 살폈다.

차민영이 보기에 유미향도 여전히 아름다웠고, 나이에 비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운동에 신경을 많이 썼는지 배에 살짝 11자 복근도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피부 상태나 자잘한 군살 같은 부분까지 전체적인 수준을 고려해서 보면 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수준의 벽이 있었다.

무엇보다 자연 가슴인 차민영에 본인과 비교하면 수술해서 만든 것임에도 유미향이 가슴이 더 처져 보였다!

바닥을 치고 있던 차민영의 자존감이 확 회복세로 올라섰고, 유미향은 그런 차민영의 변화를 느끼고 더 짜증을 느꼈다.

아주 잠깐 사이에 여자들 사이에서 어떤 살벌한 전투가 있었는지 전혀 눈치를 못 챈 유진은 두 여자가 모두 자리를 잡자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일단, 낮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말해봐.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기에 저녁 식사 분위기를 그렇게 개판으로 만든 건지.”

유진의 이야기는 두 여자를 특히나 유미향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여자들 사이의 신경전은 어느 정도 일상적이고, 남자들은 거기에 이런 식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자기 여자 기분을 따로 달래주는 것이라면 몰라도 삼자대면으로 잘잘못을 가리시겠다는 이런 식은 절대로 아니었다.

‘아니, 강준화도 이런 건 모른 척했는데, 얘는 뭐야, 이거?’

유미향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유미향은 차민영이 강준화에게 너무 얽매인다고 지적하고는 했지만, 사실 그녀도 남자 평가할 때 강준화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비슷했다. 그가 그녀들의 마지막 남자이기도 했고, 그만큼 강렬한 경험이었던 때문이었다.

유미향에 비해서 차민영은 조금 더 눈치가 빨랐다. 당연한 것이 그녀는 유진이 요리와 식사를 얼마나 특별하게 생각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저녁 식사 자리가 그렇게 개 박살 난 다음에 실수했다고 생각도 하고 있었고.

그래서 얼른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미안. 교수님이랑 이야기하다가 내가 당신에게 실수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조금 우울했어.”

“실수?”

“내가 당신에게 너무 집착해서 당신을 준화씨처럼.”

강준화의 이름이 나오자 유진이 손을 들면서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만.”

“응?”

“그 쓰레기 이름은 이제 언급 금지. 아무것도 안 남기고 뒈진 지 5년이나 지난 인간에 왜 이렇게 다들 질척거려? 죽은 쓰레기는 이제 좀 버려.”

짜증까지 느껴지는 유진의 말투에 차민영과 유미향 모두 약간 당황했다.

남자가 자기 여자의 옛 남자를 거론하는 일에 질투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두 여자 모두 유진이 지금 표현하는 감정이 질투가 아니라 짜증과 경멸 그리고 혐오 같은 것들이 섞인 복합적인 거부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취급을 받을만한 인간이기는 하지만, 오늘 낮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아 해서 오히려 어색하던 일에 이런 반응을 보이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민영의 이야기가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어, 그게 그러니까 교수님은 내가 당신을 대하는 모습이 가족이나 남자친구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VIP 고객 상대하는 포주 같다고 말했어. 그러면 안 된다고. 당신은 명백하게 나와 소진이를 더 가깝게 대하고 있다고.”

유미향은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심하게 말하지 않았다!

유미향은 차민영의 확대 해석에 혀를 찼지만, 문맥상 그렇게 생각할 소지가 있기도 했고, 자기가 지금 끼어들 분위기가 아니라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나도 외면하고 있는 것이 있었어. 우리 계속 함께 하자고 한 것 아니었잖아. 당신이 한국에 적응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겠다고 한 거였지. 그리고 당신도 계속 나하고 소진이에게 얽매여 있을 수는 없잖아. 당신 나이 또래의 진짜 여자친구도 사귀어봐야 하겠지. 우리처럼 과거가 더러운 여자 말고, 깨끗한 여자로.”

차민영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졌고, 차오르던 자존감도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약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새삼 병신 같은 이야기를 듣자 유진의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이런 이야기가 나온 원흉인 유미향을 향했고, 유미향은 빠르게 유진의 기분을 눈치채고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요! 난 저런 소리 안 했어요! 그냥 당신에게 여자를 그것도 과거에 연관된 여자를 붙여서 관리질할 생각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생활에 집중하라고 한 것이 전부야!”

그래도 유진의 눈빛이 별로 풀어지지 않자 유미향이 발끈했다. 나름 신경 쓰던 예의 차린 존칭도 어느새 사라졌다.

“아니 내가 뭐 잘못 말했어? 어차피 당신 여자나 섹스에 별로 관심도 없잖아! 억지로 여자 붙여줘 봐야 역효과 난다고 조언해 준 것이 뭐가 잘못인데? 이건 차 이사에게 적절하고도 바람직한 조언이었다고! 차 이사가 확대해석해서 자기 혼자 땅굴 파고 들어간 것까지 내 잘못은 아니지!”

존댓말까지 때려치운 그녀의 주장에 차민영은 어리둥절했고, 유진은 조금 감탄했다.

유미향이 생각보다 더 정확하게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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