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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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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여자들의 상관관계 – 23
유미향이 차민영에게 유진을 강준화로 만들 생각이냐고 타박하면서 그녀가 옛 성노예들을 유진에게 붙이는 것을 비난했을 때, 차민영은 그걸 여자를 늘리려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의미로 생각하지 않았다.
차민영은 그 말을 유진이 밖에 나가서 더 많은 여자를 직접 만들도록 내버려 두라는 의미로 생각했다. 자기들처럼 더러운 여자 말고 더 나은 여자를 고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였다. 너에게 그런 일을 막을 자격이 없다는 의미는 덤이었다.
본능적으로 새겨진 자격지심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 유진이 여자나 섹스에 관심이 없다는 지금 유미향의 주장도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면 그녀가 아는 유진은 섹스에 매우 관심이 많았고, 자기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여자도 만들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평생 동성애자도 아닌데 여자에게 관심 없는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본 남자는 노소를 불문하고 다 여자에 미쳐있었다.
하지만 유미향은 달랐다.
그녀는 예전에 유진과 같은 남자를 본 적이 있었다. 그와 사귀어 본 적도 있었다. 그건 꽤 비참하면서도 달콤한 경험이었고, 그녀에게 진짜 부자와 진짜 권력자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해준 경험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래서 유진이 이렇게 물었을 때 되물었다.
“당신 여자를 원해서 그 여자를 쟁취해 본 적 있어? 너무 너무 어떤 여자를 가지고 싶은데, 그 여자가 당신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그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해 본 기억 말이야. 없지?”
그녀의 말이 맞았다. 유진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었다.
유진에게 여자란 강제로 자기 정액을 갈취해가기 위해 달려드는 귀찮은 존재들이었다. 섹스가 유진에게도 나름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다면, 여자라는 생물 자체를 증오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진에게 여자란 최소한 전립선 전기고문하는 자위기구 보다는 낫다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존재일 뿐이었다.
전부는 아니어도 대부분 여자는 그랬다.
유진은 신기했다. 자기에 대한 자료를 쌓아놓고 있을 UE나 CIA의 사람도 아니고, 함께 지낸 지 꽤 된 차민영도 아닌 고작 두어 번 본 것이 전부인 그녀가 자기를 꿰뚫어 본 것은 꽤 놀라운 일이었다.
유진이 침묵으로 긍정을 표현하자 오히려 기겁한 것은 차민영이었다.
“당신 설마 여자 별로야? 그럼 설마 나도 별로인 거야? 그래서 요즘 나하고도 뜸했던 거였어? 그럼 설마 당신 나 조만간 버릴 생각이야?”
약한 자존감이 다시 한번 박살 났던 차민영이 거기서 더 바닥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최근 로맨틱하고 자기 취향이었던 유진과의 섹스가 어쩌면 유진이 귀찮아서 대충 한 것일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하면서 지레 겁먹고 위축되어 사고가 망상 단계로 진행해 버렸다. 살짝만 제정신이면 본인도 지금의 자기 말이, 전혀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 텐데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유진은 지금은 유미향과의 대화 쪽에 더 흥미가 있었지만, 차민영을 이대로 두면 더 짜증이 나는 상황이 발생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딸과 관련된 일에는 처절할 정도로 강인한 이 여자가 본인 일에는 이렇게 자신감 없이 헛짓하는 모습을 보면 속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자기 것이었다.
이번 일을 하던 중에 현장에서 주운 신형 베레타는 가차 없이 버리고 왔지만, 원래부터 쓰던 골동품 M1911은 따로 신경 써서 관리했던 것처럼, 그녀도 대충 주워 쓰고 버릴 수 있는 전리품이 아니라 자기 소유의 것이니 관리해줘야 했다.
그리고 사실 총이나 칼 같은 것보다는 매우 소중했다. 총이나 칼은 언젠가 더 낡아서 쓸 수 없게 되면 버리고 새로운 물건을 고를 수 있을 것 같지만, 차민영은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차민영이 사다 준 빵으로 허기를 채웠던 첫 식사 이래, 유진이 가진 행복한 기억은 전부 그녀와 소진이와 함께 하는 것들이었다. 그 이전에는 행복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차민영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아니라 가족으로. 그녀가 어떤 여자인가는 이제 별로 의미가 없었다.
“멍청한 소리 좀 그만해. 넌 그냥 여자가 아니라 내 것이다. 그것도 첫 번째. 구해주면, 소진이에게 돌아갈 수 있게 해준다면 뭐든지 다 하겠다고, 평생 내 것이 되겠다고 약속했던 것 좀 기억하고 정신 차려. 앞으로 무슨 일이 어떻게 있더라도 우리 중 누가 죽을 때까지 넌 내 소유니까.”
유진의 말은 주다혜가 들으면 중2병스러움에 다시 한번 닭살이 돋을 소리였지만, 차민영과 유미향은 각자 다르게 받아들였다.
차민영은 앞으로 계속 함께라는 말에만 집중하면서 안도하고 있었고, 유미향은 자기가 파악한 유진에 관한 생각에 좀 더 확신하게 되었다.
유미향은 유진이 차민영을 한 명의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자기 소유의 물건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대화에서 느꼈다. 사실 느끼고 자시고 할 것이 아니라 유진이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으니, 차민영처럼 맛인 간 상태가 아니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그건 유미향이 생각하고 있던 남자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어쨌든 차민영이 다시 살아나는 기미를 보이며 표정을 풀고 유진에게 달라붙자, 유미향은 다시 본론을 진행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 파악한 유진을 분석하듯이 평가하지는 않았다. 유진이 그녀가 생각하는 그런 남자라면 그건 몹시 위험한 짓이니까. 그래서 그녀는 자기 과거를 이야기했다.
“내가 파리에서 유학할 때 만났던 남자 중에 이런 남자가 있었어. 그는 족히 천 년 이상은 된 명문 귀족 가의 후계자였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지만,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자이기도 했지. 거기에 외모와 능력도 출중했어. 여자들이 정말 환장하는 그런 완벽한 남자였지. 그런데 웃기는 것이 그 남자는 여자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어. 딱히 동성애자도 아닌데 오히려 남자를 더 좋아했지. 이유가 뭔지 알아?”
유진은 그녀가 말하는 조건에서 전형적인 누군가가 떠올랐지만, 일단 그녀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이며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뭔데?”
“여자가 너무 쉬워서 별로 가치를 못 느낀 거야. 돈과 권력과 외모와 능력을 모두 갖춘 그 사람을 탐내는 여자가 너무 많았던 거지. 클럽이나 학교에서 만나는 동년배들은 물론이고 학교 교사, 회사 직원, 집안일 돕는 하우스 메이드, 경호원 등등 주변의 어떤 여자도 그가 손을 내밀면 거절하지 않은 거야. 나중에 들은 바로는 자기 이모나 사촌들조차 기꺼이 다리를 벌렸다더군. 그러다 보니 여자란 그냥 자기가 손 내밀면 다리를 벌리는 그런 존재가 되어 버린 거야. 따로 매력과 애정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라 필요할 때 사용하고 싫증 나면 버리는 자위기구 같은 걸로 여기게 되었어. 아니 차라리 자위기구 낫지. 자위기구는 섹스 한번 했다고 자기가 특별한 존재라도 된 것처럼 귀찮게 굴지 않으니까.”
유진은 이 이야기의 존재가 자신과 결이 꽤 다르기는 하지만 본질 자체는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자가 따로 매력과 애정을 느낄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 비슷했다. 차민영에게 느끼는 매력과 애정은 그녀가 여자라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자기 소유물이라서 느끼는 것이니까.
“그러다가 나를 만났어. 그리고 꽤 많이 변화했지. 여자의 매력을 알게 되고, 여자를 소유하는 재미도 알게 되고, 나중에는 단지 여자와 섹스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여자 그 자체를 즐기는 삶을 살더라고. 그걸 굉장히 즐거워했어. 나한테는 이제야 자기 돈과 자기 권력의 가치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고 꽤 고마워도 했지.”
유진은 그녀의 말에 많은 흥미를 느꼈다.
사실 유진은 음식을 만들고, 소진이를 돌보고,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고, 식당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현재 충분히 재미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래서 유미향이 지금 생각하고 지나칠 정도의 부자 혹은 권력자가 가지게 되는 권태감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좀 궁금했다.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것 같아서였다.
“재미있는 기억이었나 보군.”
“어느 정도는?”
유미향은 태연하게 대답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때의 일은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그때의 경험이 유미향이 강준화의 조교를 버텨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정도였고, 자유롭다 못해 파괴적이기까지 하던 예술가 특유의 자유분방한 성격이던 그녀가 권력 지향적 여자가 된 이유이며, 유럽에서 나름대로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 도망쳐 한국까지 돌아온 이유이기도 했으니까.
그걸 굳이 설명하지 않은 이유는, 지금 말하지 않은 그 남자의 가장 큰 특징 하나를 이제 거래를 위해 유진에게 실험해볼 차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나를 사주지 않겠어? 당신에게 당신이 지금까지 잘 모르고 있던 세상을 안내해줄게. 나는 차 이사나 수연이 같은 애들이랑은 꽤 분야가 달라. 당신이 꽤 쓸만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야. 당신 알고 싶지 않아? 다른 남자들이 왜 그렇게 여자에게 열광하는지? 그걸 아는 것은 꽤 재미있는 일이 될 거야. 어때?”
유미향은 승부를 걸었다.
권위적이고 지배적이며 여자와 섹스에 권태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겨운 일상을 오히려 즐겁게 여긴다는 점에서 유미향은 유진이 권태감에 물든 전형적인 권력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권력자들에게 효과적인 새로운 유희 거리와 소유욕을 자극해 보았다.
유진이 관심을 보였다.
“대가는?”
사실 유진은 애초에 여러 가지 이유로 그녀를 손에 넣으려고 하던 중이었지만, 유미향은 이걸 자신의 노림수가 먹혀들어 갔다고 생각했다.
원할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실종된 내 친구들의 안전. 모두 완벽하게 구해달라고 하지는 않을게. 지금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는데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야. 당신의 확답. 내 친구들을 구하는 일에 당신의 최선을 다하겠다는 확답을 원해. 설마 당신이 노리던 그 개 같은 민영후를 놓치게 되더라도 내 친구들을 우선하겠다는 확답. 그것이면 족해.”
“그게 전부인가?”
“그래 그게 전부야.”
유미향은 단호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유진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망설임의 기세는 없었다.
의외였다.
“내가 당신에 대해서 듣고 본 평가와는 매우 다르군. 내가 아는 당신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사람이지, 그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이 아닌데.”
유미향은 발끈하지 않았다. 더 깊어진 눈빛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대충 알겠군. 그럼, 그 이야기에 내가 다른 여자들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이 내가 그 지옥을 2달이나 버텨내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들었나? 들었나 보군. 그럼 내가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지금 행방불명된 내 친구들이 나를 도와줬기 때문이라는 것도?”
“그보다는 당신이 그녀들을 회유했다고 들었지.”
“회유? 지랄. 납치돼서 벌거벗겨진 채로 거꾸로 매달린 여자가 이미 성노예가 된 여자들을 무슨 재주로 회유해?”
“그럼?”
“정확하게는 나도 몰라. 난 그냥 그 지옥에서 버티기 위해 최대한 많이 떠들었을 뿐이야. 그 지옥이 아닌 곳을 계속 생각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잊지 않아야 그 지옥을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 그러다가 어느 순간 걔들이 내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면서 조금씩 나를 도와주기 시작한 거지. 참고로 그건 그냥 동정이 아니었어. 그때 걔들은 정말 목숨을 건 거였다고! 들켰으면 걔들은 죽던가 차라리 죽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을걸. 내 말 틀려?”
마지막 질문은 차민영을 향하고 있었다.
차민영은 굉장히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본보기로 한 두어 달 어딘가에 갔다 온 애가 있었어. 굉장히 강한 아이였는데, 돌아와서 우리에게 처음 한 말이 ‘제발 죽여줘’ 였지. 자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자살했어. 행복한 표정으로. 우리가 살아서 겪은 지옥을 생각할 때 걔가 어디서 뭘 어떻게 겪은 건지 모두 생각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지. 그 이후로 다들 차라리 몰래 자살하면 자살했지, 반항하지는 않게 되었어.”
“들었지? 걔들은 그렇게 될 수 있는 줄 알면서 나를 도운 거야. 걔들이 그 지옥 속에서 나를 위해 목숨 아니 목숨보다 더한 것을 걸었는데, 나는 걔들을 위해 못 할 것이 있을 것 같아? 내 전 재산, 내 목숨도 걔들을 위해서 다 내 줄 수 있어.”
유미향의 눈빛을 신념으로 불타고 있었다.
차민영은 자신이 잘 몰랐던 유미향의 일면에 감탄했다.
하지만 유진은 속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