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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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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여자들의 상관관계 – 24
행방불명된 여자들, 유미향의 표현으로 친구인 그녀들을 위해 전 재산도 목숨도 내 줄 수 있다는 유미향의 말은 진심이었지만,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다.
열정적으로 말하는 그녀의 눈빛 깊은 곳에서는 뜨거운 감정이 아니라 차가운 계산이 번뜩이고 있었다.
유미향의 모습은 유진이 자라면서 보아온 가장 흔한 사람들. 위대한 이상을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죄 없는 희생자들의 희생을 정당화하면서, 속으로는 자기의 목표를 추구하던 자들인 마리아 리페 연구소장이나 닥터 요하임, 닥터 리샤르 그 외 기타 등등의 UE와 관계자들과 닮아 있었다.
유진에게 사람 마음을 직접적으로 읽을 수 있는 독심술은 없었지만, 어쩐지 유미향의 속은 훤히 보였다.
유미향은 정말 전 재산도 목숨도 기꺼이 걸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하는 자신에게 유진이 재산을 요구하지도, 목숨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지금 자기를 유진에게 팔았더라도, 벗어날 방법이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유미향이 아주 불쾌하지는 않았다.
연구소의 미치광이들은 남의 희생을 걸었지만, 유미향은 지금 자기 목숨을 걸었다. 그건 똑같이 속에 숨은 다른 의도가 있더라도, 전혀 같은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계산에 의한 결과라도 말이다.
그 정도면 유진의 기준으로 무척 귀여운 수준이었다.
‘어차피 그녀 재산이나 목숨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벗어나는 일은 그녀 생각대로 되지 않을 테니, 자발적으로 협조하도록 속아주는 척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좋아. 내가 그녀들을 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너는 내 거다. 그리고 내가 민영 씨에게 한 말을 기억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알겠지. 동의하나?”
유미향이 반색했다. 원하는 바였다.
“동의해요.”
“좋아. 난 지금부터 그녀들을 구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겠다. 그리고 지금부터 넌 내 것이다.”
유진이 그 선언과 함께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유미향의 눈 바로 앞에 유진의 조각상 같은 멋진 몸매와 무엇보다 묵직한 그것이 적나라하게 놓이게 되었다.
유미향은 긴장으로 침을 삼켰다.
보통 이런 분위기라면 다음 일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녀는 지금까지 유진이 접했던 다른 여자들과 달리 유진의 근사하기 이를 데 없는 몸에 홀딱 반하거나, 안달을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괜찮아. 이 정도면.’
그저 불쾌한 마음 없이 기꺼이 유진과의 섹스하겠다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사실 분위기와 유진의 몸에 압도되어 자기 입으로 유진이 별로 여자나 섹스에 관심 없다고 말한 것을 잊고 있었다.
유진은 그녀의 몸에 관심 없었다.
유진의 시선은 유미향이 아닌 차민영을 향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설레는 차민영에게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말을 던졌다.
“민영 씨. 당신 곧 생리 시작할 거야. 오늘 밤은 미리 준비하고 자는 것이 좋을 거야. 내가 보기에는 양이 꽤 많을 것 같군. 아무래도 어제오늘 감정 기복이 심한 것은 호르몬 영향이었던 것 같은데, 앞으로는 그런 부분도 좀 신경 써야겠어.”
이런 상황에 나올 말이 아니었다!
유미향은 입을 떡 벌렸고, 차민영은 부끄러움에 몸을 떨었다. 자기 상태도 상태지만 유진이 유미향을 앞에 두고 이런 분위기에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그녀를 몸서리치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은 욕조를 벗어나 자기 방으로 향했다.
“소진이는 내가 데리고 잘게. 당신은 오늘은 혼자 편하게 자는 것이 좋겠어.”
그렇게 나름 진지하고 살벌했던 이날 밤 욕조의 일은 분위기 개 박살 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차민영은 그저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는 것으로 끝났지만, 유미향은 바로 직전에 주다혜가 했던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회 물 먹이기 전에 매너와 교양 교육이 필수군. 저거 어디서 뭐 하다 살다 온 거지? 이대로 정말 괜찮으려나?’
유진이 주기로 약속한 것과 자기가 유진에게 원하는 부분을 모두 충족하려면, 유진이 좀 더 많은 사람과 만나 어울리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저 상태로는 어림도 없고, 자신이 저걸 고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유미향은 앞일이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것도 다 유진이 친구들을 구해줄 거라고 믿으니까는 안심하고 하는 생각이기는 했지만.
** ** **
아침 식사 시간이 되었을 때, 소진이는 처음에는 살짝 주눅이 들어서 눈치를 보았다.
잘 때는 엄마랑 함께였는데, 일어났을 때는 오빠랑 있었고, 세수하고 옷 갈아입는 것도 엄마가 아니라 오빠가 도와주었다. 어젯밤의 엄마가 굉장히 슬프고 아파하던 것을 떠올리고 아침에도 엄마를 계속 보지 못하자 소진이도 덩달아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 소진이 잘 잤어? 배는 이제 안 아파?”
아침이 준비되자 내려온 엄마에게서는 어제의 슬픔이나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아픈 것 같기는 한데, 그 아픔은 소진이가 느낀 어제의 아픔과 다른 것이었다. 슬프지 않은 아픔이었다.
엄마가 괜찮아진 것을 확인한 소진이의 긴장이 확 풀렸다. 주눅들 일이 없으니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소진이는 이제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왔다.
그 시작은 우선 어제저녁에 못 먹은 아쉬운 음식들부터 먹어 치우는 것이었다.
“오빠, 저거!”
“소진이, 아!”
“아아!”
어제 저녁에 먹다 남긴 탕수육을 뭉쳐서 납죽 눌러버린 다음에 치즈를 얹고 오븐에 구워서 부활시킨 탕수육 피자의 한 조각이 유진의 손을 거쳐 소진이 입으로 들어갔다. 유진도 소진이 입에 작은 조각 잘라서 넣어주면서 자기도 열심히 먹어 치우고 있었다.
그 외에도 어제의 식어버린 찐만두와 남아버린 볶음밥을 합쳐서 재활용한 만두 볶음밥과 불어 터진 면은 버리고 남은 소스만 재활용한 짜장 볶음밥 등도 식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달고 느끼하고 고소한 그 음식들은 모두 소진이의 취향을 저격하고 있었고, 유진도 좋아했다. 둘은 오순도순 맛있게 아침을 즐겼다.
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여자들의 시선은 복잡했다.
손님으로 온 여자들의 입맛을 저격했던 끝내주는 빵으로 가득했던 어제의 아침 식탁과 달리, 오늘 아침의 식탁은 느끼하고 기름진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소진이나 유진은 얄미울 정도로 맛있게 먹고 있지만, 그녀들의 입에는 너무 과했다. 막상 먹으면 맛은 또 있어서 손은 가는데, 약간만 먹어도 대번에 배가 부대끼기 시작했다. 입은 즐거운데 목으로 넘기기는 또 힘든 아주 웃기는 상황이었다.
여자들은 아주 분명하게 느꼈다.
‘이거 고의지?’
남은 음식 아까운 것은 사실이니, 어제 남긴 저녁밥을 재활용한 것은 뭐라고 할 수 없지만, 그녀들의 눈에는 일부로 더 기름지고 느끼하고 달콤하게 재활용한 의도가 아주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결국 다들 무척이나 허기진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씩만 먹고는 포기해야 했다.
가장 타격이 큰 것은 그렇지 않아도 생리가 시작되어 가뜩이나 입이 껄끄러운 차민영과 여기서 가장 이런 과한 아침 식사에 약할 수밖에 없는 소화기 상태를 가진 유미향이었다.
그 점도 유진의 의도가 아주 확실하게 보였다.
‘역시 중2병. 쪼잔해.’
‘역시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어.’
주다혜와 유미향은 유진에 대한 선입견이 조금 더 확고해졌다. 차민영도 함께 살기 시작하고 처음 겪어보는 유진의 이런 쪼잔한 복수에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 항공 승무원 경험으로 이런 무거운 아침에도 부담이 적은 편인 차수연만 그럭저럭 배를 채울 수 있었을 뿐, 나머지 여자들은 눈앞의 만찬에도 허기진 배를 달래며 거의 먹방을 찍는 분위기의 유진과 소진이를 구경만 해야 했다.
의도한 것이라면 정말 완벽한 어제 저녁 식사의 복수였다.
진실은 남은 음식 버리기 싫은 것에 더불어, 여자들이 느끼하고 기름진 아침에 부담이 있는지 없는지 관심이 없던 유진의 무성의함이었지만.
식사가 끝나고, 원래는 이모들 집에 가라고 3차전을 시작할 생각이었던 소진이는 예정을 바꾸었다. 어쩐지 엊그제나 어제보다 이모들에게서 느껴지던 기분 나쁜 뭔가가 좀 약해진 느낌이었고, 아침 식사 끝나고 엄마를 포함해서 좀 삐진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 조심스러워졌다.
그리고.
“수연 씨, 오늘은 수연 씨가 소진이 좀 데리고 놀아줘.”
“나? 왜?”
“나머지는 조금 있다가 고 과장 오면 나눌 이야기가 좀 있으니까.”
“그래? 알았어.”
자기와 놀아줄 사람으로 가장 껄끄러운 수연 이모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쫓아낼 수가 없었다. 오빠가 오늘은 같이 안 놀아줄 눈치이고, 엄마도 안되는 것 같은데, 수영장에서 놀려면 어른이 필요하니까.
소진이는 그렇게 타협했다.
“이모! 얼른! 얼른!”
소진이는 평소 좀 껄끄럽던 차수연의 손을 잡아끌었다.
“잠깐 이모 수영복! 수영복 갈아입어야 해!”
소진이의 앙큼한 태도 변화는 유진 빼고 모두 훤하게 볼 수 있을 정도였지만 다들 웃어넘겼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다섯 살 아기의 그런 모습 정도는 다들 즐겁게 봐줄 수 있었다. 특히나 소진이는 유난히 이쁘고 귀여우니까.
여자들은 다들 아침은 제대로 못 먹었어도 분위기가 좀 풀어졌다.
귀여운 소진이의 앙큼한 행동도 재미있었고, 어려도 카리스마 넘치고 대하기 어려운 느낌이 강한 유진의 쪼잔한 일면을 보면서 인간적인 느낌도 받았기 때문이었다.
고주희 과장이 도착해서 그녀가 내민 태블릿을 쳐다보던 유진이 스산하게 한마디 하기 전까지만 그랬다.
“이렇게 나오겠다? 이건 선전포고지? 당장 당신부터 죽이고 시작하면 되는 건가?”
평범한 그녀들조차 확연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고주희를 바라보는 유진의 눈에는 지금 당장 피를 볼 것 같은 살의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여자들은 잠시 잊고 있었던 일, 유진이 어떤 사람이고 지금 자기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를 새삼 다시 강제로 자각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