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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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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여자들의 상관관계 – 27
사실 고주희는 실무진들을 그냥 넘어가 달라는 자기 요구가 이렇게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다.
하다못해 전쟁이 나도 전범으로 처벌받는 것은 정치인과 장군들이지 사병들을 처벌하는 경우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자기들이 그냥 소총수나 전차병 같은 일반 병사라고 생각하는 고주희의 생각과 달리 유진의 눈에 비친 그들은 나치의 친위대 같은 존재들이었다.
명령이었다는 이유로 해서는 안 될 짓을 거침없이 저지르고는, 그냥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른 것뿐이었다고 주장하는 자들.
유진으로 말하자면, 그런 사고방식을 누구보다 진심으로 경멸했다.
유진의 삶에서 마리아 리페나 닥터 요하임이나 닥터 리샤르 같은 인간들은 차라리 이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유진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각자 나름의 목표와 신념 혹은 야망을 품고 움직였다. 타인의 희생을 온갖 명분으로 정당화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정당한 것일지라도 희생이라는 것은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구소의 연구원 중 상당수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걸로 돈이 되고 그걸로 이득이 되며 남들도 다 하는 일이라는 이율로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런 일들을 하고 있었다.
탈출 시도가 반란으로 이어지고 유진과 친구들의 손에 죽어가면서 그들에게서 들은 가장 많은 이야기가 이것이었다.
- 나는 아무 잘못 없어.
-
- 난 그냥 해야 하는 일을 한 것뿐이야.
-
- 난 그냥 위에서 결정하면 시키는 대로 일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유진은 물론이고 모든 실험체 동료와 친구들은 모두 그 말들이 완벽한 개 헛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면 그들의 곁에 로자 마이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리더인 그녀는 처음부터 실험체로 연구소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는 연구원이었다. 그것도 핵심 연구팀의 차기 팀장급으로 스카우트되어 온 것이었다.
그녀는 연구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게 되고, 실험체들이 당하는 대우를 알게 되자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꾸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일이 잘못되었고 촉망받는 연구원은 본보기이자 처벌로 하찮은 실험체로 전락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았고, 결국 실험체들을 이끌고 탈출을 시도했다.
결과적으로 유진 본인을 포함한 실험체 동료들의 폭주와 배신으로 인해 모든 것이 실패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녀가 보여준 것들은 유진의 기억과 영혼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유진은 자기들이 책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들이 더럽힌 손에 책임이 없다는 자들을 책임 있는 자들보다 더 증오하지는 않더라도 더 경멸했다.
이걸로 협상은 격렬이었다.
유미향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건 유진이 최선을 다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유진이 무서운 기세로 입을 열려는 순간 놀랍게도 차민영이 유진의 옆구리를 찔렀다. 고개를 돌린 유진과 눈이 마주치자 차민영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유진의 뭘 하려는 것인지 알고 말리는 모습이었다.
유진은 조금 짜증이 났다.
‘친구들이라는 그 여자들이 신경 쓰이나?’
유진은 엄마라는 존재 로서의 차민영을 인정하는 것과 달리 다른 부분들에 대해서는 차민영에 대한 평가가 요즘 꽤 내려간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마주하고 있는 차민영의 눈빛이 냉정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떠올렸다.
요즘 차민영이 보여주는 모습들이 유진의 눈에 꽤 한심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기는 했지만, 그녀를 아는 주변의 평가는 언제나 비슷했다.
절대로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적으로 돌리면 매우 껄끄럽다. 사람을 관리하는 일에 매우 능숙하다. 사적으로는 몰라도 업무적으로는 매우 유능하다.
‘지금은 어느 순간이지? 사적인 순간? 업무적 순간?’
유진은 잠시의 고민 후 차민영의 눈빛을 선택했다. 그건 절대로 엄마의 눈빛은 아니었다.
유진은 넘실거리던 살기를 가라앉히고 고주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도저히 더 대화할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동의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대화를 끝냈다.
“늦어도 내일까지는 네가 말한 여자들 데려오고, 민영후란 놈 정보 가져와라. 하지만 다음에도 비슷한 일이 생기면 지금의 변명은 안 통할 거다.”
그렇게 고주희를 쫓아내자마자 유진의 시선은 차민영을 향했다.
차민영이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주다혜나 겁먹고 입을 꾹 다문 유미향과 달리 담담하게 말했다.
“고 과장이나 직원들이 맘에 안 드는 거지?”
“물론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번에 성화 그룹 전부를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잖아. 당장 고과장을 적으로 돌리면 내부 정보를 얻기도 불편하고.”
“응?”
“사업하면서 나를 탐탁지 않아 하는 클라이언트를 설득할 때 내가 쓰는 첫 번째 방법은 언제나 상대 중에서 그나마 나에게 덜 적대적인 사람은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거였어. 그리고 그 사람부터 개인적으로 천천히 공략해서 설득하고, 그 다음 그 사람을 이용해서 주변을 하나씩 하나씩 각개격파로 설득하는 거였지. 당신 전략이나 전술 같은 것 공부한 것 아니었어? 적을 상대할 때의 원칙은 언제나 내가 상대할 적의 힘을 줄이는 것에 있잖아. 맘에 안 든다고 한꺼번에 다 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의 누구부터 처리할 것인가 순서를 정해야지. 그 와중에 고 과장처럼 비교적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정도를 넘어 내부 스파이로 써먹을 수 있는 존재를 왜 굳이 대놓고 적으로 돌려. 끝까지 잘 써먹어야지.”
차분한 목소리로 어린 동생 가르치는 누나같이 말하는 차민영의 이야기에 유진은 감탄했다. 여러모로 미덥지 않은 여자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10년 이상 사람들 거느리고 회사를 운영한 뛰어난 경영자라는 사실을 이렇게 실감하게 되었다.
차민영의 이야기는 너무 기본적인 것이었고, 지적 받자마자 유진도 알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 상황에서 반쯤 눈이 돌아간 유진을 아무렇지도 않게 제어한 것은 참 놀라운 일이었다.
“하아.”
유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한번 절감했다.
자신이 강하고 여러 가지 지식은 많을지 몰라도 확실히 똑똑한 사람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경험과 안목이 부족하다는 것을.
‘만만치 않군.’
쉽게 생각한 사람 중에서 정말 쉬운 사람이 없는 듯했다. 아직 뭔가 보여준 것이 없는 주다혜 빼고는.
** ** **
고주희는 살아서 차민영의 집 현관을 걸어서 나온 다음에 첫 마디는 이거였다.
“살았다. 씨발. 이번에는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다시 한번 온몸을 땀으로 적셔야 했고, 소변도 지렸지만, 이번에는 다행히 이런 사태를 대비해 내의도 잘 챙겨 입었고, 팬티에 패드도 대어 두어서 남에게 추한 꼴 보이는 것도 면할 수 있었다.
그래도 고주희는 많이 뿌듯했다. 결국 성공했다.
이걸로 그녀는 실장과 실장의 사위 그리고 기타 전략기획실 소속이거나, 전략기획실에 연관된 인맥 들 중에서 이번 일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원들을 보호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번 일의 핵심이었던 전략기획2실장에게 약속한 보상 뿐만 아니라, 부서 내에서 전반적인 자기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가 될 터였다.
“목숨 건 보람이 있어.”
고주희는 뿌듯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일단 현재 상황에서 자기나 부서의 책임은 벗었으니, 원흉인 유민영 여사나 정동성 실장의 일은 이제 고주희가 알 바 아니었다.
어차피 성화 건설 쪽에 대해서는 전략기획실이나 제2부속실의 업무에서 제외된 지 오래되었고, 그쪽에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사모님은 정말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았다.
남은 일은 약속대로 실장에게 넘기면 그만이었다. 실장이 약속한 4명의 여자를 확보하고 민영후에 대한 조사와 추적 자료를 정리하면, 고주희는 내일 그걸 받아서 유진에게 전달하면 되었다.
오늘의 고주희 업무는 이제 끝이었다.
‘일단 집에 가서 씻고 좀 자자.’
밤새 머리 터지라 고민하고 조금 전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렸던 탓인지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당장은 오직 수면만이 그녀의 희망 사항이었다.
하지만 실장에게서 온 전화가 그런 고주희의 희망을 부숴버렸다.
“고 과장 문제가 생겼네.”
“실장님?”
“두 명은 확보했는데, 두 명은 누가 선수를 쳤어. 거기에 마지막 한 명은 우리 쪽과 그 여자들을 노리는 걸로 보이는 다른 조직 쪽이 충돌했는데, 총격전이 발생했네. 우리 쪽에서 동원한 인원이 둘이나 총에 맞아 죽었네.”
“씨발.”
고주희는 실장이 듣거나 말거나 욕설을 내뱉었다.
평생 소문만 들었던 총기 사고를 올해만 벌써 몇 번째 듣게 된 것인지도 어이없었지만, 무엇보다 방금 자기가 나온 현관문 안으로 다시 들어가야 할지 모른다는 점이 제일 좆 같았다.
“씨발.”
현관문을 보면서 고주희는 다시 한번 욕했다. 도저히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고과장?”
고주희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실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제라도 유진에게 그를 팔아버리고 싶은 심정이 아주 절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