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153화 (153/196)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재미있게 보셨나요?

재미있으셨다면 [추천]과 [즐겨찾기 등록] 부탁드립니다.

#009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여자들의 상관관계 – 28

고주희는 고민 끝에 문제는 내일의 자신에게 미루자고 결정했다.

지금 당장 다시 들어가서 유진과 얼굴을 맞대기에는 자신이 너무 지쳤다는 점과 그래도 일단 100%는 아니어도 50%라도 들고 이야기하는 것이 낫다는 경험으로 터득한 처세술이 이유였다.

하지만 치명적은 아닐지라도 명백하게 실수였다.

** ** **

고주희가 떠나고 유미향은 슬슬 눈치를 보다가 지하의 자기 손님방으로 도망갔다.

유진이 마지막에 차민영의 조언을 받아들이면서 약간 진정되기는 했지만, 그 직전에 보여준 유진의 모습에 받은 충격이 꽤 컸다. 조금 전의 상황이 유미향이 유진의 살기를 정통으로 겪은 첫 경험이었다. 말로 들었던 것과 직접 겪은 것의 차이가 꽤 컸다.

주다혜는 이 정도는 처음이었지만, 익숙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무서웠다. 화도 안 내면서 사람의 목을 또각또각 꺾어 죽이던 사람이 화까지 내니까 더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수영장으로 향했다. 안목은 없어도 눈치는 빠른 그녀는 이 집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 어디인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차민영만이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유진의 곁을 지켰다. 그녀도 지금 유진이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기가 자기 자리라고 생각했다. 유진과의 관계에서 다른 여자들과는 명확하게 다른 그녀의 마음과 입장이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유진은 그런 차민영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지금 하려는 일을 그녀에게 보여도 괜찮을까 고민한 것이었는데, 성화의 핏줄에 관련된 것과 UE와 연구소에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굳이 그녀에게 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옆에서 차민영이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이 전화를 걸었다.

“최 마담? 나다. 어제 부탁한 일은 좀 알아봤나?”

차민영은 유진이 부른 이름에 의아함을 느꼈다.

마담은 차민영과 유진이 만난 프랑스에서는 여성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될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화류계의 여성에게나 쓰이는 호칭이었다.

유진이 어디 룸살롱에 드나들 시간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무슨 마담을 아는 건지 생각하던 그녀가 주다혜를 팔아먹은 브로커의 이름 최명선을 연상하는 것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설마 유진이 그녀를 살려 두었을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어?’

너무 뜻밖의 인물과의 통화에 차민영이 당황하는 사이, 유진은 최명선의 이야기에서 뜻밖의 상황을 만나고 있었다.

– 민영후가 이 동네 단골이어서 생각보다 수소문이 좀 쉬웠어요. 주로 중견급 정치인들이나 일본 기업들과 거래 관계가 있는 첨단 기업 관련자들 상대로 술자리가 잦았고, 내용으로 봐서는 일본 쪽 어느 기업에 고용된 로비스트로 보였다고 해요.

“일본?”

유진은 뜻밖의 국적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이게 자기와 차민영을 노리고 벌어진 일이기는 해도, 관련자 전부가 그걸 목적으로 끼어든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했다. 홍월에서 죽은 인간들도 뭔가 알아서 이 짓에 끼어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가 유진을 의아하게 했다.

– 그런데 이상한 이야기가 있었어요. 관계자로 보이는 일본인들과 일본어로 나누는 이야기를 알아들은 애들이 있었는데, 본국과 본토를 구별해서 말하는 걸 들었다고 하는군요.

“그게 뭔가 의미가 있는 건가?”

– 이건 일본에 대해 잘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데 혹시 탈아입구라고 들어봤어요?

“탈아입구?”

– 일본애들이 자기들은 이제 아시아의 수준이 아니라 유럽의 수준이며, 따라서 자기들은 아시아가 아닌 유럽에 속한 나라라고 주장하는 말이에요.

“그건 뭔 개소리야?”

유진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받은 교육과 터득한 상식과 지식 무엇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시아에서도 동쪽 끝에 있는 일본이,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부분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기독교의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영향을 받은 지역을 말하는 유럽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최명선이 내쉬는 한숨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선명하게 흘러나왔다.

– 이걸 이해하려면 대항해시대부터 시작해서 영국의 중국 약탈 정책, 근대에 영국과 러시아가 벌인 그레이트 게임에서의 일본의 역할, 미국 견제를 위한 영일동맹,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일본의 산업화, 2차 대전 이후 일본의 고도성장 등등 정말 많은 것을 알아야 하니까 그냥 일본에는 주류 계층에도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하는 놈들이 많다고만 이해해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니까.

최명선의 말에 유진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중요한 건 일본의 생각이 아니군. 중요한 건 일본인들이 본국과 본토를 구별해서 말하면, 그 본토는 유럽이라는 말이군.”

- 네. 그리고 우리나라 내에서라면 몰라도 일본이나 유럽까지 관계되면 제가 화류계에서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그리고 솔직히 더 파고들면 위험할 것 같아요. 민영후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거물이라는 징후가 여럿 보여요.

“그 정도면 훌륭해. 기대 이상이군.”

유진은 최명선의 이야기에 만족했다. 명확한 것은 없었다. 나름 상황판단에 도움되는 정보도 있었고, 선을 잘 파악해서 위험한 곳까지 파고들어 가지 않은 점도 맘에 들었다. 이 정도면 기대보다 많이 유용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최명선의 이야기는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들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 그리고 이건 좀 신뢰성이 낮고 맞는다고 해도 별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술 시중들던 애 중에 민영후가 미국에서도 명문으로 불리는 코넬대 졸업생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영국에서의 1년 유학과 그 과정에서 받은 장학금에 굉장한 자부심이 나타내는 것을 본 애가 있어요. 이게 아마 본토 본토 하고 이야기하던 것과 관련 있는 것 같아요.

“왜 신뢰성이 낮은 이야기지?”

- 민영후가 받았다는 장학금이 노블 에브게니 기금이라고 하는데, 이게 알아보니 영국 귀족들이 조성해서 주로 명예로운 전통을 남긴 귀족 가문의 후예들에게 주는 장학금이더군요. 하지만 유럽 상류층이 아무리 개념이 없어도, 20세기도 아니고 21세기에 자기들 식민지로 아닌 일본 식민지의 유명한 친일파 후예한테 이런 장학금을? 이건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들었다는 애가 뭔가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어요.

유럽, 영국, 귀족, 장학금. 이 정도면 유진에게는 충분했다. 거기에 노블 에브게니 장학금은 들어본 기억도 있었다. 자기 몸 해부하던 인간들 중에서도 그거 받았다고 자랑하는 놈이 몇 명 있었다. 년도 없이 놈만.

유진은 그녀의 말에서 UE가 자신의 옆으로 기어들어 왔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 이 일은 그냥 기분이 좀 나쁘고 귀찮은 남의 일이 아니라 유진 본인의 일이 되었다.

유진은 웃었다. 웃으면서 자신의 분노에 차갑게 날을 세웠다.

왜 유진이 주다혜를 팔아먹은 여자를 죽이지 않고 통화까지 하는 것인지를 궁금해서 바라보고 있던 차민영은 주변의 온도가 갑자기 3~4도 정도는 떨어진 것 같은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구경만 하고 있지 않을 거로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

- 네?

유진의 혼잣말을 이해하지 못한 최명선이 반문했다.

“아니 당신에게 한 말이 아니야. 수고했어. 기대 이상이었군. 당신의 말대로 더 이상 뭔가 하는 것은 위험할 것 같으니까, 내가 따로 연락하기 전까지는 숨어 있도록.”

유진은 용건을 마치고 최명선이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진, 무슨 일이야?”

최명선의 존재와 통화 중에 급격하게 변하는 유진의 감정 변화에 뭔가 느낀 차민영이 조심스럽게 유진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유진은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상태로 현재 상황에 집중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UE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민영후나 그 관련 사항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은 아니고, 지금 당장 이 인간을 잡아 죽이러 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차민영의 선입견과 달리 유진은 전혀 냉정하고 침착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성격일 수가 없었다.

유진은 그냥 살아온 삶이 그렇다 보니 참을 줄 알 뿐이고, 남들이 흥분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에도 대부분 무감각할 뿐이었다. 참아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리고 자기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냉정 침착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면에서 차민영과 소진이 그중에서 특히 소진이의 존재는 그가 폭주하지 않고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게 해주는 제어판 역할이자 한편으로는 그의 행동을 제한하는 족쇄였다.

유진 스스로는 나쁘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일반인과 비슷하게 살아가는 지금의 생활이 매우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이 사랑스러운 족쇄가 없었다면 아마 결국 싸우고 죽이고 파괴하는 것만 생각하다가 세상에 이런 즐거움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지금 유진이 고민하는 핵심이었다.

다른 그 어떤 놈들도 아닌 UE의 흔적이 자기 옆에서 발견된 이상 지금 당장 그놈들을 다 갈아 버리러 가지 않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마음인 것과 동시에 마당에서 놀고 있는 소진이와 자기 옆의 차민영의 안전을 생각하는 마음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진? 진. 여보? 유진 씨.”

차민영이 계속 입 다물고 있는 유진을 부르다가 지쳐서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차민영이라고 지금의 유진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까 고주희에게 화를 낼 때처럼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차갑게 가라앉은 유진의 모습이 아까보다 오히려 훨씬 더 겁나고 무섭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도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표정이 휙휙 변하면서 소진이가 있는 마당과 자신 그리고 전화기와 허공을 번갈아 보고 있는데 그걸 보고만 있기가 더 힘들었다.

유진이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 차민영이 생각보다 굉장히 허술하고 미덥지 않은 사람이라고 느끼기 시작한 것과 비슷하게, 차민영은 첫 만남에서 유진이 냉정하고 차갑고 잔인한 성격의 전형적인 킬러나 스파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굉장히 다혈질적 어린애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사고 치는 것을 막을 힘은 없지만, 그래도 사고 치기 전에 무슨 생각인지는 알고 싶었다.

유진이 잠시 고민하다가 그런 차민영에게 물었다.

“누군가 우리를 노리고 있다면, 내가 당신과 소진이를 남겨 두고 그들을 상대하러 나가도 되는 걸까? 당신과 소진이를 노리고 여기에 쳐들어온다면, 내가 집에 없어도 그걸 막을 수 있을까?”

한국에 와서 함께 살기 시작한 이래, 일이 터질 때마다 매번 겪게 되는 딜레마에 다시 한번 고민을 시작한 유진과 달리 차민영의 대답은 생각보다 대범했다.

“밤이라면 몰라도 대낮에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도 있는데 쳐들어올 정도면 당신이 있다고 해도 별로 다를 것 없지 않을까? 내 경험을 조금 이야기해보면, 거래 상대와의 계약을 내게 유리하게 성사시키기 위해 중요한 것은 내 약점을 줄이는 일이 아니라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파악하는 일이었어. 더 간절하게 원하는 부분을 찔리는 사람이 지는 거지. 당신이 말하는 상황에 비교하자면, 상대방이 내 약점을 파악하고 공격해 오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최대한 빨리 상대방의 약점을 노리고 공격해서 제거해 버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라는 말도 있지만,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도 있다.

차민영은 놀랍게도 둘 중 뒤에 있는 말, 선공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