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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154화 (154/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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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여자들의 상관관계 – 29

사업가 그것도 IT계열의 벤처 사업가로 기업을 운영하면서, 차민영은 안정적인 운영만으로는 절대로 사업을 키울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경험해왔다.

좋은 아이디어로 성공한 벤처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사업을 유지하려고 하다가, 그 아이디어와 기술을 흉내 낸 대 기업에게 규모에서 눌려 순식간에 스러지는 것은 정말 숱하게 보았다.

모험을 걸어도 대부분 망하는 것은 비슷하지만, 그래도 거기는 성공한 가뭄에 콩 나는 수준이라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대기업과의 싸움에서 안정을 추구한 벤처는 최소한 이 대한민국에서는 살아남은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자신과 소진이의 경우도 비슷했다.

소진이의 안전을 위해서 성화의 눈치를 보며 최대한 조용히 살려고 했다. 그것이 소진이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진과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성화를 더 이상 겁내지 않고 이웃과 더 교류하기 시작한 지금의 소진이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런 소진이를 보는 자기도 마찬가지였다.

차민영은 이미 행복을 알아버린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설사 앞으로의 길이 위험해 보일지라도.

“진. 내가 파리에서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난 이미 거기서 죽었을 거야. 소진이도 고아가 되었겠지. 나도 소진이도 이런 행복이 있다는 것은 몰랐을 거야. 그리고 나도 소진이도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위험하다고 지금의 생활을 버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생각 없어. 그러니 진. 당신과 우리에게 위험한 적이 있다면 우리를 지키며 우리가 두려움에 떨고 있게 하지 말아줘. 그건 당신과 어울리지 않아. 나도 원하지 않고.”

이걸로 결정되었다.

유진은 민영후의 현재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기를 들고 고주희의 번호를 눌렀다.

문제는 고주희는 자기 차 뒷자리에서 혼절하듯 잠들어 있었고, 너무 피곤한 나머지 전화벨 소리에도 깨어나지 못했으며, 하필 임시로 고주희 차량의 운전을 맡은 직원은 그런 고주희를 깨울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유진이 아침부터 온갖 들끓는 분노를 겪고 고민 끝에 차민영의 조언까지 받아서 내린 결정에 따라 행동하기 위한 전화를 고주희는 그렇게 완벽하게 씹어버렸다.

오히려 전화를 받지 않는 고주희에게 당혹감을 느낀 유진의 전화기로 처음 보는 번호의 전화가 걸려 왔다.

그리고 수신을 허락한 그 통화에서 유진은 또 하나의 그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던 존재를 만나게 되었다.

“헬로, 미스터 유진. 일단은 날 C라고 불러줘요.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인 많은 직책을 가지고 있지만, 당신에게는 이렇게 소개하죠. 난 당신의 어머니에게 당신이 이 나라에 머무는 동안을 부탁받은 사람입니다. 나와 이야기를 나눌 의사가 있나요?”

C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약자이지만, 유진이 지금 상황에서 그 단어에서 떠올릴 수 있는 단어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Central Intelligence Agency. 통칭 CIA.

이 조직의 구성원들은 조직의 첫 대문자 C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따와 자기들 조직을 사적으로는 Company라고도 부를 정도로, C는 이 조직을 상징하는 문자이기도 했다.

유진은 UE가 튀어나오자마자 CIA가 뒤따라 튀어나오는 이 상황이 오히려 약간 반갑다는 느낌을 받았다.

CIA는 UE를 확고하게 적으로 대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조직이기는 했지만, 서로서로 자기 이득을 노릴지언정 힘을 합쳐 유진을 상대할 조직은 아니었다. 최소한의 상호 견제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할 수 있으니, 유진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이 전화로?”

“택배함을 확인해 주십시오. 우리가 퀵 서비스로 보낸 물건이 도착해 있을 겁니다.”

전화를 끊고, 택배함으로 향하며 유진이 투덜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집에 직접 방문하는 배달원은 좀 신경 써야겠군.’

유진은 무엇인가를 직접 하는 중이라고 해도 주의력과 사고력을 따로 분산하여 주변 상황을 별로도 살피는 것이 가능하기는 했다. 하지만 유진에게도 상당히 귀찮고 피곤한 일이라서 소진이를 살피는 것 외에는 그렇게 자주 사용하는 편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집 주변을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과 외부인들도 신경을 썼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포기했다.

마을 사람들은 상관없는데, 택배, 우편, 음식 등의 배달원이 너무 많이 오갔다. 현관 앞 택배함에 들어오는 배달 택배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너무 일상적으로 여겨졌고, 음식 배달원은 하루에도 숱하게 다른 사람들이 마을 이집 저집을 드나드는지라 일일이 신경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너무 마음 놓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택배함에는 송장이 붙어 있지 않은 작은 상자가 하나 들어 있었다. 어제 온 택배들은 어제저녁에 산책 갔다 오면서 다 회수했고, 오늘 자 택배들은 아직 올 시간이 아니었으니, 이게 C가 말한 물건이 분명했다.

대문 옆의 택배함 앞에서 곧바로 상자를 뜯은 유진은 내용물을 보고 조금 황당한 느낌이 되었다.

“행운폰?”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정식 명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는 이걸 팔아서 돈을 벌려면 엄청난 행운이 필요할 것이라다는 어느 유명 아마추어 IT 평론가의 평으로 더 유명해진 스마트폰이었다. 그리고 무려 이 스마트폰의 생산자는 성화 전자였다.

가전 분야에서는 세계 3대 기업의 하나로 꼽히지만, 스마트 폰 분야에서는 글로벌 10위에 불과하고, 미국과 한국에서는 별 영향력 없는 4위라는 초라한 성적을 가진 기업의 매니악한 취향의 물건을 미국 CIA가 보안용이랍시고 보낸 이 상황이 유진에게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명색이 CIA인데 본인과 성화 사이에 흐르는 피는 몰라도 차민영과 소진이와 관련해 성화와 좋은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설마 모를 리가 없어서 더욱 그랬다.

그래도 일단 전원을 올리자 미리 USIM까지 처리되어 있었는지 5G가 잡히며 관련 통신사 로고도 떴다. 성화 통신 마크는 이제 새삼 놀랍지도 않았다.

“뭐지 이 미친 새끼들은?”

부팅이 완료된 전화기는 스마트폰임에도 불구하고 통화 버튼 외에는 아무런 아이콘도 없었다. 버튼을 누르자 전화번호부에는 오직 단 하나의 전화번호만이 C라는 약자로 기록되어 있었고, 그것을 누르자 짧은 신호음이 가고 조금 전 통화했던 C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 받았습니다.”

그녀와 뭔가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유진은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너희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성화 전자 전화기를 성화 통신을 써서 개통해서 보낸 거지? 너희가 지금 내 상황 다 들여다보고 있다고 자랑이라고 하고 싶었나? 아니면 나를 약 올리고 싶은 거야?”

C는 유진이 뭐라고 하던 차분하게 자기소개부터 했다.

“미리엄 코너입니다. 본명이고, 국무부 소속입니다. 서류상 당신 모친으로 등록된 마담 앤의 직속이고, 당신과 관련된 사항의 한국 지역 책임자입니다. 앤이나 당신이 둘이 직접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상황을 빼면, 미국과 관련된 사항에서는 저와 이야기하게 될 겁니다.”

“CIA가 아니라고?”

“전에는 거기서 일하기는 했죠. 앤이 배신당하기는 전에는.”

뭔가 자기들 사이에 복잡한 사정이 있는 모양이지만, 유진은 그냥 CIA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전화기에 대해서는 대답이 없군.”

“우리는 물론 당신이 성화 그룹과 연관된 상황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파리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와 그런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고, 그 여자가 한국에서는 우리도 절대로 만만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성화 그룹과 그렇게 복잡한 사이일지도 생각하지 못했으며, 당신이 거기에 끼어들 것은 더 상상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전화기는?”

유진의 말이 점점 더 짧아졌고, 미리엄은 전화기에 대해서 유진이 정말 농담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설명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요. 성화폰은 편의성이나 디자인, 유명세는 부족할지 몰라도 기술적으로는 굉장히 잘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자국에서 생산하는 핸드폰이 없거나, 자국 핸드폰 생산자에게 특별한 개조를 요청할 수 없는 많은 국가의 정보부나 군에서 애용하고 있는 물건입니다. 성화 통신의 경우, 대한민국 3대 통신사 중에서 우리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N사의 장비를 사용하는 유일한 회사입니다. 다른 두 곳은 독자 생산품을 쓰거나 중국 H사의 물건을 쓰죠. 보안 부분에서 제일 믿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그들에게 가진 개인적 호불호와 상관없이 신뢰성만을 기준으로 선택된 물건입니다. 이런 걸 굳이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 좀 웃기군요.”

사무적이고 건조한 그녀의 목소리와 말투가 꽤 유진의 마음에 들었다. 서로의 감정을 소모할 필요가 없는 분위기를 만든다는 점에서 최근에 별로 접해보지 못한 편한 스타일이었다.

유진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전화한 이유는?”

“용건을 말하기 전에 현재 상황부터 조금 설명하겠습니다. 우리는, 아!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당신과 관련된 우리나라의 최고 결정권자를 포함하는 호칭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현재의 당신 생활을 꽤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굳이 당신과 접촉하려고 하지 않은 겁니다.”

“응? 왜?”

“분석가 중 일부와 결정권자들 상당수는 당신이 첩보 스릴러 영화나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 최악의 경우 코믹스의 다크 히어로나 빌런물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습니다. 실제로 파리에서 보여준 모습이 있으니까요. 당신을 선제적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의견도 아주 소수의견이지만 살짝 나오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정작 당신이 한국에 도착해서 생각도 못 한 한국식 텔레노벨라를 찍고 있자, 관계자 모두 부담을 덜고 상황을 지켜볼 여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텔레노벨라는 또 뭐야?”

“한국 표현으로는 막장 드라마라고 하는 겁니다. 출생의 비밀, 고부갈등, 삼각관계, 물질만능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불륜, 패륜, 배신, 섹스 등을 주제로 하는 장편 영상물입니다. 처절하긴 해도 개인 간의 이야기라서 앞서 거론한 것들에 비해 국가나 사회적 관점에서는 별 영향이 없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유진이 차민영과 관련하여 성화 그룹과 벌이는 일에 대한 미국의 시선을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 아마 미국 만의 관점도 아니리라.

출생의 비밀 부분에서는 유진도 잠깐 움찔했지만, 그건 전화기 너머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국익을 이유로 당신에게 상당한 욕심이 있다는 것을 숨길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장기적으로 당신에게 호의를 얻는 방향에서 진행하도록 계획이 수립 중입니다. 섣불리 당신을 자극해서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 세계정세를 더 엉망으로 만드는 것은 절대 사절이라는 것이 결정권자들의 판단입니다. 제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는 상황도 그런 정책 사항에 따른 실무적 방법의 일환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유진은 그 결정권자들이 누군지 좀 궁금했다. 어쩐지 미국 대통령과 정부 고위 관료들만 이야기하는 것은 절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지금 물을 사항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지금 전화한 이유는?”

“성화의 직원들이 민영후를 쫓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당신이 룸살롱 홍월에서 벌인 학살극과 관련되어 쫓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우리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이미 성화 직원이 2명이나 죽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쫓고 있는 민영후는 만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미리엄은 은근슬쩍 자기들이 유진이 홍월에서 벌인 일도 알고 있다고 표를 냈지만, 유진은 그건 관심 없었다. 거기에 자기가 관련한 증거 따위는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확신에 가까운 의심을 하더라도 의미는 없었다.

대신 CIA가 민영후를 언급했다는 것으로 자기 예감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UE가 배후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미리엄이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지만, 그녀가 꽤 놀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솔직하게 그걸 인정했다.

“놀랍군요. 성화를 만만히 본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녀의 말로 유진은 두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성화는 아니 최소한 고주희는 자기들이 지금 쫓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알았다면 둘이나 죽을 일을 만들 리가 없었다. 그리고 CIA는 최명선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유진이 정보를 가진 상황에서 성화만을 떠올렸다.

“그래서 정확하게 용건은 뭔가?”

“성화가 상황을 얼마나 파악한 것인지는 몰라도 우리 정도는 아닐 겁니다. 그쪽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들 수준에서는 절대로 파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민영후와 그 배후에 있는 UE가 한국에 파견한 세력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혹시 거래할 생각이 있습니까? 앞서 설명했다시피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을 겁니다.”

유진은 한숨을 팍 내쉬었다.

“당신도인가.”

“네?”

자기가 시작한 것이지만 최명선을 시작으로, 유미향, 고주희에 이어 어제와 오늘 사이에만 벌써 4번째 거래 신청자이다. 그것도 전부 여자들이고, 그들이 유진에게 원하는 것은 조금씩 다 달라도 유진이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다 정보였다.

최초로 만난 차민영과도 사실 거래였고, 최근에 만난 주다혜도 비슷하고, 그 이전으로 가면 성무연, 장화진 모녀도 있다.

아예 별로 관계없는 마을 여자들과 고용주 겸 동업자 고영은, 차민영이 끌어들이고 유진이 우연히 꼬셔버린 차수연을 빼면 다들 비슷했다.

어쩐지 이것이 우연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 클. 클. 클.

강준화와 연관되어 피에 관해 웃던 누군가와는 다른 또 다른 심연의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분명 환청이 아니었다.

#009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여자들의 상관관계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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