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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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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 06
부비트랩임이 너무도 노골적으로 드러난 지하실 문 앞에서, 유진은 아주 잠깐만 마지막으로 죽인 그와의 대화를 고민했다.
- 우리가 들은 너는 괴물이자 짐승이었다.
- 함정에 돌격해서 그 함정을 부수는 자.
- 지옥에서 보지. 금방일 것 같군.
그는 자기가 이들 중에 속해있지만, 소수자 혹은 이질적인 존재라고 처음부터 표현했다. 그리고 지금 보니 그는 자기들 말고도 추가로 함정이 있다고 계속 암시하고 있었다. 조직에 속해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조직과 갈등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니 이제 두 가지 의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기다렸던 것은 정말 외부 매복 인원이었을까? 그리고.’
- 지하에 있지. 잘 찾아보라고.
가장 의미심장한 말은 아마 이 말이었던 것 같았다.
유진은 이리저리 문을 조사하는 척하며, 마이크를 켜서 미리엄과 대화했다.
“C. 질문이 하나 있다.”
- 말씀하십시오.
“당신은 최근 몇 년간 여기로 대량의 건축 자재가 반입되었다고 했지.”
- 그렇습니다.
“양이 얼마나 되는 거지? 이 집의 규모에 어울리는 양이었나? 그리고 혹시 이상한 자재는 없었나? 텅스텐 몰리브덴 납 같은 거.”
** ** **
생각도 못 한 질문을 받은 미리엄이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팀원들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건축 자재가 꾸준히 투입되었다는 것으로 폐가였던 곳이 실제 거주를 목적으로 복구되었다는 것까지만 확인했을 뿐, 그 이상까지 관심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따로 법적인 허락 같은 것을 받은 기록도 없었고, 따라서 딱히 자료를 구할 방법도 없었다.
기간이 아주 넉넉했다면 관련 건축 자재 업체들을 확인해서 예전 자료를 찾아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 작전은 준비 기간도 짧았고, 그런 자료까지 요구하는 작전도 아니었다.
연락관 하나가 급하게 현장 근처의 마을에서 주민을 상대로 위장 작업 중이던 요원들에게 질문을 넘겼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생각도 못 한 대답을 받았다.
“마을 주민 여러 명에게 확인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이 근처에 있는 별장 단지에 들어간 자재와 이곳에 들어간 자재에 대해 착오를 일으킨 것을 확인했습니다.”
“건축 자재 대량 유입이 없었다는 건가?”
“아니요. 반대입니다. 주민들이 10채 가까운 건축물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자재가 반입된 것을 대부분 근처의 별장 단지로 간 자재로 기억하고 있는데, 확인 결과 그곳은 전혀 다른 경로로 별도 업체가 자재를 납품했습니다. 주민들이 사는 지역을 지나간 적이 없습니다.”
“그럼 그 자재는 다 어디로 간 거지?”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모두의 표정이 살벌하게 굳었다. 그리고.
“한국 국세청과 관세청 자료에서 목표의 위장 기업으로 의심되는 건설회사가 텅스텐 몰리브덴 납 등을 대량 구매한 자료를 발견했습니다.”
텅스텐 몰리브덴 납 등은 여러 가지 용도가 있는 금속이지만, 공통적으로는 두 가지 분야에서 가장 유명했다. 방사선 차폐와 전자기 차폐였다. 그리고 최근에 투시나 투청 혹은 예지 같은 초능력을 이용한 초월 감각도 차단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제 이곳은 그냥 오지의 적당한 은신처일 수가 없었다.
미리엄은 여전히 유진의 헤드 캠 영상 쪽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다른 팀원들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그냥 자신들이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고 넘겨 버린 저 장소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찾기 위해 그들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유진은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지하실로 진입한 상태였다.
** ** **
문을 열고 들어선 지하실은 생각보다 넓었다.
1층 거실의 바로 밑에 자리 잡은 곳으로 1층 거실과 크기가 거의 일치했다.
생김새는 지하실답다고 해야 할지, 지하실답지 않다고 해야 할지 애매했다.
천장은 높고, 공간은 막힘없이 트여 있었다. 벽과 천장, 바닥까지 모두 같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정신 병동 같은 느낌도 있었지만, 깔끔하고 깨끗한 공간이라는 느낌도 있었다. 실내에 자질구레한 어떤 물건도 없어서 더욱 그랬다.
있는 것은 룸의 중앙에 있는 손목 두께의 은색 쇠기둥 하나와 목에 채워진 개 목걸이가 쇠기둥과 사슬로 연결되어 묶여 있는 여자 하나뿐이었다.
손도 등 뒤로 묶여 있고 입에는 입마개도 채워져 있던 그녀는 기둥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위에서 수류탄까지 터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여기가 바로 위에서 터진 수류탄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방음 그리고 밀폐 처리가 된 공간이 아니라면 말이지.’
슬쩍 다시 한번 투시 능력을 써봤다.
벽도 천장도 그리고 놀랍게도 바닥까지도 페인트와 시멘트 벽돌 안쪽으로 은색 혹은 은청색 금속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의외라면 입구 계단 쪽에 미친 놈들인가 싶어질 정도로 촘촘하게 도배되어 있던 클레이모어들과 달리 이 지하실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최소한 금속판 앞쪽으로는 없었고, 금속판 뒤에 뭐가 있든 금속판에 막혀서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운 구조였다.
함정인 것이 분명한데, 뭐로 자신을 어떻게 상대하려는 것인지 궁금했다.
뒤쪽의 문을 잠가서 자신을 가두려고 시도하는 방법이 가장 유력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 문에는 원격으로 잠그는 장치 같은 것은 없었다. 두껍고 무거운 아주 특별한 문이었지만, 구조 자체는 경첩과 손잡이 달린 평범하게 당겨서 여는 문일 뿐이었다.
거기에 그거 잠가서 유진을 여기 가둔다고 해도 유진이 그냥 계속 갇혀 있을 이유가 없었다.
20cm의 텅스텐 몰리브덴 합금강은 아무리 유진이라도 맨몸으로 부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고, 수류탄이나 개인 화기 정도로 뚫을 수 있는 물건도 아니지만, 유진에게는 ‘바벨의 기억’과 ‘이름 없는 사슬’이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 단순한 형태에 한해서는 유진이 원하는 형태로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게 된 이 두 아티펙트의 강도와 유진의 힘이 합쳐지면, 아무리 튼튼한 텅스텐 합금이라고 해도 별 의미가 없었다.
결국 남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역시 계단의 클레이모어인가? 내가 파리에서 그거에 정말 확실하게 당하기는 했으니까.’
카메라 위치까지 고려하면, 아마 유진이 이 여자를 구한 다음에 데리고 나가는 과정에서 폭발시키려는 생각으로 보였다.
몰랐다면 유진에게도 꽤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는 함정이기는 했다.
프랑스에서는 바닥 말고 완전히 공개된 장소에서 당한 상황에서도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누가 봐도 시체로 보일 정도로 당했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이번처럼 반쯤 밀폐된 좁은 공간에서 그것도 손이 닿을 정도의 근거리에서 연달아 터진다면 그 타격은 유진의 몸이라도 반쯤 부숴버릴 만한 위력이 될 터였다.
‘당해 줄 때의 이야기지만.’
알고 있는 함정에 당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함정은 일단 젖혀두고, 이 지하실 자체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지하실은 유진을 잡기 위해 만든 것일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큰 노력과 시간이 들어갔다. 애초에 유진이 한국에 오기도 전에 만들어진 시설이었다.
유진 생각에는 지금 비어 있기는 하지만 원래는 장기간에 걸쳐서 핵이나 위험물질 혹은 초인을 연구하기 위해 준비한 공간으로 보였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누가 한국에 왜 이런 시설을 이렇게 애매한 크기로 만들었냐는 것이었다. 제법 크지만 그렇다고 이 크기의 방에서 뭐라도 제대로 해볼만한 일은 없었다.
또한 죽은 자의 이야기로 추측해낸 이 지하실과 연결된 또 다른 공간으로의 통로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도 의문이었다.
쭉 훑어봐도 비밀리에 숨겨진 문 같은 보이지 않았다. 투시는 특별한 금속으로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문이 열리고 닫히는 공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유진은 이 방에 비밀 통로 따위는 없다고 단정할 수 있었다.
“흠.”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확인해본 결과를 스스로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이 정도면 자기가 마지막으로 죽은 자의 대화에서 느낀 것이 착각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본능적인 예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도 없어서 더 그랬다.
유진이 노리던 민영후를 포함해 다른 여자들과 나머지 인원은 아무래도 이 집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았다. 다행이라면 멀지 않은 곳에 있으리라는 증거가 있다는 것이었다. 무선이 아닌 유선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으니까.
유진은 일단 한 명이라도 우선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드디어 인질을 제대로 확인했다.
김은주.
윤미향이 거래를 통해 요청한 여성은 아니고, 차민영이 말한 그녀의 친구였다.
차민영보다 한 살 어리고, 애엄마가 아니더라도 외모는 부드럽고 강아지 같은 귀엽고 여성스러운 느낌을 주는 차민영과 다르게 짧은 머리에 중성적인 느낌과 사나워 보이는 첫인상을 주는 외모의 미녀였다.
성격은 외모랑 달라서 차민영이 전형적인 공대인 사고방식에 사업적으로는 냉정한 관리자 스타일인 IT개발자인 것과 달리, 김은주는 전형적인 여성스럽고 자상한 스타일이며 감정적인 성향이 강한 디자인 계열 업무 종사자였다.
유진은 굳이 그런 것까지 알고 싶지 않았지만, 구하러 가는 그녀들을 좀 더 친밀하고 인간적으로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차민영이 열심히 설명했다.
그녀는 유진이 귀찮고 거스르면 인질이고 뭐고 그냥 무시할 수 있다고 제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김은주씨?”
유진은 일단 잠들어 있는 그녀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려 했다. 잠든 사람보다 깨어 있는 사람이 데리고 나가기도 편하고, 혹시 그녀가 뭔가 아는 것이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섬광폭음탄과 연막탄, 수류탄이 터지고 총격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정신 못 차리고 잠들어 있었던 것이 그냥 이 지하실이 방음이 잘되는 곳이어서 그런 것은 아닌 듯싶었다.
생각해보니 방음이 그렇게 철저한 것도 아니었다. 문이 닫혀 있는 상태에서도 유진이 그녀의 기척과 숨소리 그리고 심장박동까지 듣고 느낄 수 있었으니까.
아마 약물 같은 것으로 강제로 잠재워진 듯했다.
그래도 당장 심장은 멀쩡하게 뛰고, 뇌가 박살 난 것 같지도 않으니 밖으로 데리고 나가 미국 애들에게 넘기면, 그다음은 그쪽에서 알아서 확인하고 처리해줄 일이었다.
‘역시 백업이 좋아.’
유진은 그녀를 데려가기 위해서 그녀를 쇠기둥에 연결해 두고 있는 쇠사슬의 중간을 잡고 끊어 버렸다. 개 목걸이의 자물쇠를 부수는 것보다 그것이 더 간단해서 한 선택이었는데, 텅 소리와 함께 쇠사슬이 끊어지는 순간 갑자기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 끼리리릭!
분명 자동 잠금장치 따위는 없던 지하실 문이 빠르게 닫히고 있었다.
아무리 유진이라도 사람 하나 끌어안고 빠르게 달려 빠져나가기에는 곤란한 속도였다. 거기에 그렇게 빠져나가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클레이모어로 장식된 좁은 계단 통로였다.
유진 자신은 몰라도 인질은 100% 사망, 그것도 시체 조각을 모아서 맞추기도 어려울 터였다.
유진은 ‘어?’하는 사이에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유진이 실수한 점은 계단을 내려오는 과정에서 지하실 문과 좌우 벽은 확인했지만, 계단 그 자체는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과 지하실 문이 열린 벽 쪽의 전등 스위치로 위장해서 숨어 있던 기계 장치를 놓친 것이었다.
잠금장치는 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린 지하실 문이 닿게 되는 벽 쪽에서 문을 밀어내는 봉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C! 들리나?”
혹시 하는 마음에 미리엄을 호출해 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전파는 확실하게 차단된 듯했다. 미국 어떤 첨단 기술로 개발한 물건이라고 해도, 전기 전자 신호 자체를 차폐해 버리는 이런 공간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유진이 귀찮게 되었다는 생각에 혀를 차는 사이 두 번째 변화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김은주를 묶어둔 쇠사슬이 연결되어 있던 방 중앙의 은색 기둥이 아래로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기둥 아래쪽에서 작은 모터음과 기계음이 들려왔다.
기둥 주변 바닥도 텅스텐 금속으로 가려져 있었기 유진이 볼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 다음으로 유진의 눈에 몹시 거슬리는 것이 나타났다. 기둥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생긴 천정의 공간에서 스프링클러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는 아주 익숙한 냄새가 희미하게 나고 있었다.
“황산이냐? 우와.”
유진은 감탄했다.
황산은 유진의 재생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는 물건이라고 이미 오래전부터 연구소에서 확인된 물질이었다. 정확하게는 고농도 황산이나 그 이상의 초강산이 그렇다는 말이지만.
단지 이걸 이용해서 파괴된 유진의 세포는 사용할 수 없어지므로, 누구도 사용하지 않을 뿐이었다.
짐승을 사냥할 때 가죽과 고기를 원하는 것은 대부분 비슷하니까.
하지만 이들은 괴물을 처치하는 것 그 자체에 관심이 있을 뿐, 부산물은 포기한듯했다.
잠시 후 스프링클러에서 고농도 황산이 짙은 물안개를 만들어내며 마구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