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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162화 (162/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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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 08

[바벨의 기억]과 [이름 없는 사슬]을 어느 정도 자신의 의지로 제어할 수 있게 된 이후, 유진은 [바벨의 기억]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바벨의 기억]을 이용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였다.

일단 그 절대적인 방어력을 이용해서 갑옷 혹은 방패 대용으로 유용하게 썼다. 원래의 형태인 투구 형태를 이용해서 머리를 보호한 것은, 유진이 경험한 최악의 전투인 생드니 대성당에서 클레이모어를 이용한 함정에 빠져 죽은 유진이 되살아날 기회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라면 [이름 없는 사슬]과 별다른 것 없지 않은가?

같은 아티펙트라고 해도 이름조차 별도로 붙지 않아서 [이름 없는 사슬]이라고 불리며 기껏해야 무지하게 튼튼한 쇠사슬 취급만 받던 물건과 무려 UE는 물론 전 세계에서 가장 귀중한 아티펙트 중의 하나로 불리며 거창하기 그지없는 [바벨의 기억]이라는 이름이 붙은 물건과의 차이를 생각하면 이상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일단 [훼손 불가]라는 특징은 두 가지가 똑같지만, 쇠사슬 형태로 고정되어 다른 식으로 사용할 방법도 없고, 그저 [훼손 불가]라는 점 외에 별다른 특별함도 없는 [이름 없는 사슬]에 비해 [바벨의 기억]이 가지는 특별함 중에 [훼손 불가]는 매우 비중이 약한 편일 정도였다.

애초에 만들어진 시기부터가 [이름 없는 사슬]은 중세 유럽의 십자군 원정 시기의 언젠가로 추정되지만 [바벨의 기억]은 기원전 4500년에서 기원전 1900년 사이, 어쩌면 지구 역사보다 오래되었을지도 모름이다.

가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다.

[바벨의 기억]이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에 비해 실제로는 별로라기보다는 [이름 없는 사슬]이 그간 너무 저평가받았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그런 면에서 [이름 없는 사슬]이 이 정도로 쓸 만해진 것은 사실 운의 역할이 크기도 했다.

[바벨의 기억]이 원래부터 사용자의 의지로 변형할 수 있는 물건이었던 것과 달리 [이름 없는 사슬]은 말 그대로 사슬의 형태로 완전히 고정된 물건이었다.

유진은 이 물건이 자기 의지로 제어되어 형태를 변화할 수 있게 된 이유가 2가지일 것으로 추측했다.

하나는 유진 본인의 특별함.

유진은 원래부터 뭔가 좀 매우 달랐다.

특별한 물건이라는 것은 알아서 UE가 보관은 하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정확한 능력도 용도도 사용법도 몰랐던 많은 아티펙트들이 유진에 반응하여 정체를 드러냈다.

UE 수뇌부 대다수가 유진을 단순히 골수까지 우려먹을 실험용 원숭이로 생각하는 동안, 소수 일부는 유진이 자기들을 이끌 위대한 지도자로 예비 된 자라고 생각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더 키]의 영향.

연구소에서의 마지막 순간, 당시 연구소장 옥사나 유센코 박사가 유진의 능력을 봉인하고 있는 [바벨의 기억]의 봉인을 해제할 수 있는 [더 키]를 건네주었을 때, 유진은 [더 키]를 자기 손목 안쪽에 찔러 넣어야 했다.

알몸인 그가 그 상황에서 손가락 두 개 크기인 물건을 보관할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그냥 넣어두기만 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그 후에 그게 미묘한 반응을 일으켰다. [더 키]가 어느새 유진의 몸속에서 녹아서 흡수되어 버렸다.

유진에게 이식된 후 그의 신체 일부분이 된 아티펙트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더 키]는 좀 뜬금없었다. 장기를 대체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조처를해서 기존의 장기나 특별한 부분에 연결한 것도 아니고, 유진이 의지를 갖추고 동화를 시도한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그냥 그렇게 되어 있었다.

다행히 [더 키]가 가진 [사물의 상태를 고정하거나 해제한다.]라는 능력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발현 방식이 애매하게 변했다. 사물의 상태를 고정 혹은 해제하는 양쪽 중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이 아니라, 제어권을 획득하는 식이 된 것이다.

그 이후 원래는 일반적인 자물쇠 따위에는 아무 제한 없이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던 능력은 사라졌다. [더 키]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특별한 사용법이 많이 있는데, 알려진 그 어떤 방법도 실행되지 않았다. 식료품의 현재 상태를 고정해서 부패를 방지할 수 있다는 능력이 구현되지 않는 것은 유진으로서도 살짝 아쉬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런 단점 따위는 장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원래 고정된 물건이었던 그래서 상태를 고정하거나 해제한다는 개념조차 없던 ‘이름 없는 사슬’이 고정된 형태를 벗어나 유진의 의지에 따라 형태를 변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그건 유진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이라는 되는 것처럼 저항하고 반항하고 내줬다가 다시 빼앗아 가는 식으로 반응하는 [바벨의 기억]과 주도권 싸움을 벌이는 동안에도 계속할 수 있었다.

한 번에 오직 단 하나의 대상만으로 쓸 수 있는 [더 키]의 능력을 자기가 제어권을 확보한 아티펙트에 한해서라고는 해도 여러 개의 물건에 중복으로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유진은 만족할 수 없었다.

그렇게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이름 없는 사슬’과 비교해 엄청 까탈스럽고 오래 걸렸으며 아직도 완전히 손에 들어온 것은 아닌 것 같은 [바벨의 기억]이 가진 특별함이 고작 그것에 불과하다면 억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실험하고 변형하고 테스트 해봤지만, 딱히 별다른 점이 없었다. 서로 색상이 다르다는 점을 빼면 변형할 수 있는 정도도 비슷했고, 강도도 유진이 테스트해 볼 수 있는 한계 내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절대 부피 자체는 [바벨의 기억]이 [이름 없는 사슬]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너무 반짝거리는 은색이라서 눈에 띄는 것이 좀 부담스러운 단점밖에 없는 [이름 없는 사슬]이 훨씬 유용한 것 아닌가 싶은 정도였다.

오늘 실전에서 사용해보다가 뭔가를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느긋하게 기다리던 유진이 투시력을 발휘해서 자기가 만들어낸 박스 바깥의 광경을 구경한 것은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일단 유진은 완전한 어둠을 싫어했다. [바벨의 기억]에 봉인 당해 시력을 완전히 빼앗겼던 3년간의 경험 때문에 생긴 취향이었다.

한국 생활 초반에는 잘 때도 굳이 조명 다 켜고 잤고, 차민영에게 소진이 교육에 안 좋다는 걱정을 들은 다음에도 바꾸지 않다가, 차민영에게 밤하늘 무드등을 선물 받은 다음에야 그걸 키고 자는 걸로 바꿨을 정도였다.

그다음은 당연히 더 중요한 이유인 상황판단을 위해서였다.

황산 스프링클러가 언제까지 작동하고 얼마나 농도를 높일지를 봐둬야 앞으로의 대처 방법을 고민할 수 있고, 자기가 기다리고 있는 적의 진입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다가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투시력을 방해받아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스프링클러 안쪽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이게 이렇게 된다고?’

[바벨의 기억]의 제어권을 대부분 확보한 이후 원래 가지고 있던 [초월 능력 사용 제한]이 자기에게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반대의 기능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바벨의 기억]을 통해서 본 외부의 상황에 대해서 시각이나 청각 능력이 원래보다 더 강화되어 있었다.

착각일 수가 없었다.

같은 내부라고 해도 [바벨의 기억]을 통해서 보는 부분과 [이름 없는 사슬]을 통해서 보는 부분이 미묘하지만 명백하게 달랐다.

워낙에 미묘한 차이에 불과했고, 그동안은 둘을 한꺼번에 사용한 다음 이런 걸 비교해 볼 생각을 하지 못해서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유진이 인지하는 순간 [바벨의 기억]은 마치 ‘들켰으니 어쩔 수 없지.’라는 식으로 아주 미묘하던 그 차이를 확연하게 드러나도록 증폭시켰다.

그 덕분에 그동안 유진의 투시력을 막아내고 있던 이 지하실의 텅스텐-몰리브덴 합금강과 납의 2중 차폐벽은 더 이상 유진의 능력을 막아내지 못하게 되었다.

유진은 차폐벽을 투시해서 황산 스프링클러가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가도 볼 수 있었고, 방의 중심에 서 있던 기둥의 밑부분에 있는 구동 모터 부분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기둥과 연동되어있는 배기 시스템도 찾을 수 있었다.

미묘하게 그의 능력을 방해해서 명확하게 볼 수 없었던 문의 잠금쇠도 제대로 보이는 것은 덤이었다.

이제 유진은 스프링클러의 중간 밸브를 부숴서 더 이상 황산이 유입되지 못하게 막는다거나, 배기 시스템을 강제 작동시켜서 안개 형태로 방을 채우고 있는 황산을 배출시킨다거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유진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유진이 놓친 이 집의 또 다른 통로였다.

내려오는 동안 좌우의 벽면에 설치된 클레이모어에 주의를 빼앗겼던 그 계단 안쪽으로 숨겨진 또 다른 지하실 문과 그 뒤에 대기하고 있는 생화학보호복을 입은 4명의 병력은 유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게 할 정도였다.

상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수동적으로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유진은 김은주를 보호하기 위해서 일단 적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상황을 판단해 가면서 싸우려던 기존 계획을 간단하게 버렸다.

그리고 문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다.

그들의 대장인 히로유키 조장의 명령으로 미리 준비했던 작전을 진행 중이던 카마이타치 구미의 3번 대 대원 하나가 혹시나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집음장치를 이용해서 내부 상황을 살폈지만, 그런 것은 효과가 없었다.

아직 실내에는 황산 가스가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유진은 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가 만든 아티펙트 박스의 위치를 문 앞으로 옮겼다는 거지 문 앞에 자기 몸을 노출한 것이 아니었다.

뛰어난 초인적 청각 능력을 갖춘 슈퍼 솔져가 집음장치까지 사용했다고 해도 김은주의 숨소리를 그들이 들을 일은 없는 것이다.

문이 열렸을 때도 유진은 박스를 해제하지 않았다.

유진은 황산을 잊지 않았고, 자기가 가슴 앞으로 안고 있는 여자가 민간인인 정도를 넘어 지금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도 기억했다.

차민영이 조금이라도 유진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친구들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열심히 했던 것은 조금이지만 효과가 있었다.

유진은 과격하게 자기 취향대로 싸우는 대신 안전을 위주로 행동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유진은 박스에 아주 작은 구멍을 만들고, 거기로 소총의 총구만 내밀었을 뿐이었다. 소총의 탄피가 튀는 방향에 있던 김은주의 머리를 반대쪽으로 옮길 정도로 여유까지 부렸다.

그리고 문이 열려 틈이 생긴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문이 다 열리는 것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문은 그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았고 그래서 유진은 적의 위치를 모두 훤하게 보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그들이 모두 화학탄 계열로 보이는 폭탄의 안전핀을 이미 뽑은 것을 보고 있었으니까.

“으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총에 맞은 것은 두 명뿐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그들도 나름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인간들이었지만, 긴장감이 부족한 상황에서 너무도 뜻밖의 기습을 당하자 침착함을 잊었다.

총에 맞은 둘이 쓰러지면서 손에 들고 있던 백린소이탄을 놓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총에 맞지 않은 둘조차 깜짝 놀라 자기 무기를 드는 과정에서 손에 들고 있던 백린소이탄을 놓쳤다.

그리고 4발이나 터진 백린 화염 속에서도 그들이 입고 있는 최고 수준의 방호복이 그들의 몸을 화학 성분과 열기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해 주었지만, 그들이 손에 들고 있던 총기들은 그런 보호를 받지 못했다.

백린에 달아오른 총기 내부 탄환의 화약들이 방아쇠의 충격 없이 열기 그 자체에 발화되어 폭발하면서 탄환들이 발사되는 쿡오프 현상이 일어났다.

- 타타타타탕!

바닥에 떨어진 총기들이 또 급하게 주인의 손에 들린 총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탄환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용령 탄창만 4개.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양의 탄환이 그 좁은 공간에서 사방으로 튀고 또 튀었다.

방호복은 비교적 낮은 온도인 백린의 화염으로부터는 그들을 보호해 주었지만, 탄환을 막아낼 방탄 성능은 없었다.

“으아악!”

유진의 공격을 피해서 살아남은 둘도 자기들의 총에 맞아 그렇게 죽었다. 수십발의 탄환에 관통당해 끔찍한 모습으로 변한 다음이었다.

“이런 식의 효과도 있네? 좋군.”

그 사이 유진은 아티펙트로 만들어 놓은 박스의 새로운 효과를 하나 더 발견하고 감탄하고 있었다.

터져버린 백린이 박스에도 달라붙어서 불타오르고 있는데, 박스 내부에서는 전혀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훼손불가]가 이런 식으로까지 작동하는 것은 소소하지만 꽤 재미있는 점이었다.

각자의 총에 장전된 탄환이 모두 발사되어 더 이상 총기 발사음은 들리지 않게 되고, 총으로 뚫린 방화복의 구멍을 따라 흘러 들어간 백린의 화염이 방화복 내부에서 이미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진 시체까지 태우는 것을 바라보며 유진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습으로 사람을 죽이고, 인질을 구하고, 함정에 빠지고, 그 함정에서 빠져나와 통쾌하게 반격하는 과정을 거치면서도 유진은 지금 총기 사용의 편리함과 아티펙트들의 새로운 기능 같은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유쾌하고 재미있는 놀이를 즐기는 감정이었다는 뜻이었다.

카메라로 이 끔찍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UE의 일본 측 협력 조직 회(會)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아직 통신이 복구되지 않아서 그 광경을 못 본 미국 측이 다행스러울 정도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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