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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164화 (164/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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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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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 10

“M, M! 내 목소리 들립니까, M!”

통신을 막던 밀폐된 지하실의 문이 열리고, 다시 한번 전파를 차단하던 유진의 아티펙트들도 해제되자 서울의 미국 측 상황실과의 통신이 곧바로 다시 연결되었다.

영상이 끊긴 동안 부산하게 소란을 피우던 팀원들을 지켜만 보고 있어야 했던 미리엄은 갑자기 다시 영상이 출력되기 시작하자 유진부터 호출했다.

하지만 유진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재미있네? 이쪽을 좀 더 단련해볼까?’

투시력을 이용해 내부를 확인하고 염동력을 이용해서 그것을 조작하는 일의 편리함을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자물쇠 따기나 잠긴 문 열기 그리고 기타 소소한 일상의 편의를 위해 많이 사용해왔다. 하지만 사실 딱히 신경을 써서 능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하거나, 사용 요령을 갈고 닦은 것은 아니었다.

쓸데가 별로 없다는 이유였다.

투시력도 염동력도 꽤 재미있는 능력이기는 해도 막상 쓰려고 들면 용도가 애매했다.

일상생활 중에서 보지 못하게 막힌 곳을 뚫어 봐야 할 일도,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물건을 움직여야 할 일도 별로 없었다. 전투 중에도 투시력으로 상대방의 위치 따위를 확인하느니 소리나 기척 혹은 초월 인지 감각으로 확인하는 것이 훨씬 유용했고, 염동력은 잠긴 문 조용히 열 때나 유용하게 쓸만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별로 쓸데가 없는 가장 큰 이유는 효율의 문제였다.

이 별거 아닌 투시나 염동력을 쓰기 위해서 소모되는 에너지와 필요한 집중력, 합쳐서 노력의 정도가 정말 아득하게 비효율적인 수준이었다.

단적으로 직접 몸을 움직이면 철판 하나를 구겨서 반으로 두 번쯤 접어버릴 정도의 노력을 염동력으로 쓰면 물컵 하나 잠깐 들어 올리는 정도의 효과 밖에 안 나오는 것이다.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는 근육통에 비해 실제로 힘을 쓴 시간만큼 따라오는 나름 신경 쓰이는 두통은 덤이었다.

이러니 그동안은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었는데, 슬그머니 사용 가능 영역을 추가 개방한 [바벨의 기억]의 증폭 능력이 붙으니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원래는 투시를 차단할 목적으로 설치된 금속 차폐벽도 여유 있게 투시할 수 있었고, 그 안의 나름 질기고 튼튼한 전선들도 간단하게 절단되었다. 염동력을 분할 적용 해서 동시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힘을 가할 수 있는, 그래서 전선을 잡아당겨 끊을 수 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전까지는 그냥 단일 방향으로만 힘을 가할 수 있을 뿐이었고, 그래서 자물쇠 같은 것은 돌릴 수 있어도 전선 같은 처리하기 어려웠었다.

덕분에 원래는 폭발을 일으키고, 그 충격을 아티펙트들로 방어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클레이모어를 격발을 위해 연결된 전선들을 끊어서 무력화시키는 것도 재미있었고, 벽 속에 잘 숨어 있어서 뭐로 부숴야 할까 고민하던 감시카메라들에 연결된 전선들을 하나하나 끊어버리는 것도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는 계단형 장애물을 굳이 힘으로 부술 필요 없이 원격 조작으로 열 수 있다는 부분이 제일 재미있었다. 복잡한 기계 장치였음에도 불구하고 뭘 어떻게 건드리면 원래의 조작 기능을 차단하고, 자신이 그걸 제어할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복잡한 기계 공학과 전자 공학의 지식은 심연의 그것들을 포함해서 몸에 이식된 어떠한 것들도 유진에게 제공하지 않는 것들이니, 이것도 [바벨의 기억]이 제공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 이름에부터 [기억]이 붙어 있지. 정보와 관련된 유물이라는 뜻. 그저 원래 표면에 가득했던 문자만을 생각했다면 문자에 관련된 이름이 붙어 있겠지. [기록] 같은 거.’

이 아티펙트를 발굴하고 최초로 이름 붙인 자들, UE의 근원이 되었다는 그 조직의 초기 지도자들에 대해서 작은 의구심이 생겼다.

생각해보면 절대로 그냥 흔해 빠진 귀족 나부랭이들일 수가 없었다.

어쨌든 유진은 이 계단들을 다시 작동시켜서 통로를 열 수 있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미국팀과 연결된 카메라가 다시 작동 중이었고, 그들이 이걸 보면서 녹화까지 하고 있었다.

“M! M! 들리냐고요! 영상 잘 나오고, 무전기 상태도 정상으로 표시되는데, 왜 대답이 없어요!”

다시 연결된 미리엄이 무전기에 대고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줄 필요는 없겠지.’

새로 생긴 이 능력은 아직 아무도 보지 못했다. 이건 유진에게 생긴 완전히 새로운 숨겨진 한 수였다. 가능한 비밀로 하고 싶었다.

미국 애들에게는 훨씬 더 효과적인 프로모션이 준비되어 있으니 더욱 그랬다.

“야! 너 정말 들리는 거야? 안 들리는 거야? 씨발!”

미리엄이 그동안의 점잖은 모습 때려치우고 욕설까지 내뱉고 있으니 슬슬 대답을 해줘야 할 타이밍이기도 했다.

“잘 들린다.”

유진이 대답하자 정작 미리엄의 대답이 끊겼다.

유진은 그녀가 통신을 끊고 소리라도 지르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잠시 기다렸다. 반쯤은 고의로 그녀를 방치하면서 도발한 셈이니 그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었다.

생각과 달리 미리엄은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화가 난다고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스타일이 거의 없다. 그 정도로 다혈질은 오래 살아남지 못하는 세계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저 잠시 눈을 감고 조용히 화를 삭였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그 시끄럽던 작전통제실이 무덤이라도 된 듯 조용해졌던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통신이 재개되었다. 미리엄의 목소리는 어느새 다시 처음처럼 침착하게 돌아왔고, 핵심 정보와 용건만 정확하게 전달했다.

- 당신이 방 안으로 들어가 인질을 확인한 순간 통신이 끊겼습니다. 그리고 다시 통신이 재개되는 데까지 약 20분이 걸렸습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황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20분이라.’

유진은 생각보다 긴 시간에 놀랐다.

유진이 느낀 시간은 약 10분 정도에 불과했다. 시계가 없어도 상관없는 정도로 자기의 시간 지각 능력이 정확하다고 생각하던 유진에게는 꽤 의외였다. 자신도 상황과 컨디션에 따라 시간 지각에 영향을 받을 줄은 몰랐다.

‘아니면 이놈의 영향이려나.’

유진의 시선이 다음 프로모션을 위해서 쇠사슬 장갑의 형태로 변형시켜 양손과 팔에 두른 [바벨의 기억]을 잠시 향했다. 헤드 캠 카메라에는 잡히지 않을 동작이었다.

“문 안쪽은 생물학 오염 처리 설비가 되어있는 차폐실이더군. 지금은 안에 아무것도 없지만, 강산성 황산 혼합물을 스프링클러로 뿜어대는 설비나 그걸 다시 제독하기 위한 자동화 설비까지 완벽하게 작동하는 꼴이, 모르긴 몰라도 여기서 인체 실험으로 죽어 나간 사람 숫자가 한둘은 아닐 거다.”

- 그런 일이 있었다면 우리가 모를 수가 없습니다.

“놓친 거겠지. 내 평생을 이런 비슷한 시설에서 보냈어. 여기서 얼마나 죽었을지 수도 셀 수 있을 것 같군. 내기해 보겠나?”

미리엄의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충격받은 표를 내었지만, 유진은 그냥 비웃었다.

UE의 연구소에서 20여 년간 유진이 직접 눈으로 본 실험체의 숫자만 해도 천이 넘는다. 보지 못하고 듣기만 한 전체 규모도 가뿐히 만은 넘는다. 그 이전에는 얼마나 더 있었을지 그리고 자기가 모르는 곳에서 얼마나 더 죽었을지는 세어볼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걸 미국이 정말 몰랐다는 말을 지금의 유진은 믿지 않는다.

그리고 전 세계에 하루에 굶어 죽는 사람만 수천 명이 넘으며, 세계 그중에서도 미국은 사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온갖 현실적인 이유로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안 이후로는 아예 이 세계에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자기 친구들은 이미 다 죽었고, 살아 있더라도 이제 잊어야 할 존재였다.

앞으로 누군가 유진이나 친구들과 같은 불행을 겪게 되더라도 유진이 알 바 아니었다. 그들의 불행은 유진의 잘못이 아니라 UE를 묵인한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국가와 그 국가들을 구성하는 국민 전부의 공통 책임일 뿐이었다.

각자에게 더 책임이 있고, 덜 책임은 있겠지만, 가장 책임 없는 것은 자기였다.

여기서 희생되었을 많은 수의 누군가도 마찬가지였다.

“관심 있으면 그런 것은 당신들이 직접 조사해보고, 그보다 당신들이 놓친 자들이 어디 있는지 찾았다.”

미리엄이 잠시 당혹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금방 침착함을 되찾았다.

유진과 그의 친구들이 당한 끔찍한 꼴에 대해서 충분할 정도로 잘 알고 있고, 일본의 비밀결사들의 수준을 알며, 그들의 기원에 존재하는 자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아는 지식인으로서 이 정도는 사실 새삼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인체 실험 따위 그들에게는 별로 그렇게 특별한 실험도 아니고, 그걸 남의 나라에 만들어 남의 나라 국민을 사용한 것도 굉장히 자연스러운 그들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CIA 요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들여다본 이 세계의 심연에는 그에 못지않은 것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남미의 어느 마약 농장에서 본 인신 공양 제단과 그 제단의 제물로 쓰이기 위해 키워지고 교배되던 아이들을 떠올리면 사실 UE의 일조차 그렇게 최악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미리엄은 현황부터 확인했다.

- 방안에 다른 곳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습니까?

“아니 통로는 내 눈앞에 있지.”

- 그 계단 말입니까?

“계단이 바닥으로 사라지면서 통로가 만들어지는 구조더군. 지금 보이는 이 시체들이 거기서 나온 인간들이지.”

카메라로 보내는 영상에는 탄환에 찢기고, 백린에 녹아버린 끔찍한 모습의 시체들이 잘 비치고 있었다.

- 별도의 비상 출입구가 있겠군요. 주변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겠습니다. 찾는 대로 위치를 전달해 드리죠. 그리고 지금 지원팀이 근처까지 접근했습니다. 합류하시겠습니까?

미리엄이 합리적인 상황판단에 따른 제안을 던졌다.

통로는 막혀 있고, 유진은 막 구출한 인질을 데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는 합류하여 인질의 안전부터 확보한 후, 막힌 통로를 개척할 방법을 찾거나 별로의 출입구를 찾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유진은 거부했다.

“괜찮다, 알아서 하지. 단지 당신 부하들을 조심시키는 것이 좋을 거야. 그들이 휘말려 드는 것까지 신경 써줄 생각은 없으니까.”

미리엄이 눈살을 찌푸렸다.

- 뭘 어떻게 하려는 거죠?

유진은 대답하기 전에 우선 몸을 움직였다.

유진은 우선 안고 있던 김은주를 지하실 문 앞에 뉘었다. 그리고 폭약 등이 잔뜩 들은 백팩을 포함해서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그녀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리 [이름 없는 사슬]을 이용해서 만들어 두었던 타워 쉴드 형식의 전신 사이즈 방패를 세워서 그 앞을 가렸다.

미리엄은 갑자기 나타난 은색 방패의 존재에 의문을 느꼈지만, 그냥 안보이는 사이에 어딘가에서 노획한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다음 유진은 불에 타서 목재 따위는 다 사라진 계단 위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잡아서 1층으로 휙휙 던져버렸다.

미리엄은 물론이고 지켜보고 있던 그녀의 팀원들도 아무리 적이라지만 죽은 사람의 시신을 함부로 대하는 유진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적과 아군의 개념에 상관없이 인간이 같은 인간을 상대로 느낄 수밖에 없는 본능적인 터부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유진의 모습에 그런 거부감도 순식간에 잊혀져 버렸다.

“뭘 어떻게 할 거냐면, 이렇게 할거지.”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쥐어 눈앞에 들어 올렸다.

검은색 사슬 장갑을 끼고 있는 유진의 손이 헤드 캠을 통해서 미리엄과 그녀의 팀이 보는 영상으로 잘 전달되었다. 이어서 유진이 그 손으로 콘크리트 계단이 스펀지라도 되는 것처럼 부수고 뜯어내는 모습도 마찬가지로 잘 보였다.

“미친.”

미리엄의 팀원 중 누군가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를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비슷한 심정이었다. 미리엄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유진이 1층에서 마지막으로 죽인 자가 했던 말 중에서 맞는 말이 하나 있었다. 히로유키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 중에서도 맞는 것이 있었다.

유진은 괴물이자 짐승이었다.

사실 정밀한 계획으로 적을 노리고 은밀하게 행동하며 비밀스럽게 싸우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유진은 날아드는 총알을 몸으로 감당하면서 달려가 적의 대가리를 주먹으로 부수고 발로 차서 상대를 으스러뜨리는 것을 좋아한다.

오늘 지금까지 선보인 전투 방법은 자기가 은밀하고 치밀하게 싸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미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프로모션이었다. 사실 치밀하게 싸우기는 했어도 그렇게 은밀하게 싸운 것은 아니기는 했다. 하지만 충분히 정교한 싸움을 보여주었다.

유진의 생각에 그 분야의 프로모션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니 이제는 그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자기 취향대로 싸울 시간이었다.

유진은 그 시작으로 콘크리트 벽을 맨손으로 두들겨 부수는 것을 선택했다.

콘크리트 계단이 조각조각으로 부서진 폐기물 덩어리가 되어 쌓여가고, 숨겨져 있던 비밀 문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리엄과 미국인들은 그 모습을 입을 벌리고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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