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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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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 15
미리엄은 곧바로 자신의 헤드셋의 마이크를 끈 다음 관제 요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요원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킬 스위치를 재빨리 눌렀다. 유진의 헤드캠을 통해 전달되는 영상을 보여주던 대형 모니터와 소리를 들려주던 스피커가 곧바로 꺼졌다.
이제 유진의 영상은 감시 기록 장치와 미리엄의 앞에 있는 그녀 전용의 작은 모니터에서만 나오고 있었다. 다른 팀원들에게는 공유되지 않았다.
미리엄은 사실 본인 헤드셋과 영상도 끄고 싶었지만, 작전 책임자라서 그것까지 끌 수는 없었다.
이것은 원래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미리 정해두었던 정식 프로토콜이었다.
현재까지 초인에 관한 능력 중 가장 두드러진 관심을 받는 분야는 생체 재생 능력을 포함한 육체 능력들이었지만, 진짜 전문가들은 투시, 염동, 텔레파시 같은 정신계 초능력이 실제 활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에 더 주목하고 있었다.
냉전 초기의 초능력 전쟁의 일화로도 알 수 있듯이, 진짜 초능력은 어떤 면에서는 거의 핵에 버금가는 파괴력을 가진 비대칭 전력이었다.
돌연변이 인간을 다룬 어떤 창작물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진짜 두려운 존재는 불로불사와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개인으로 강한 누군가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고 기억을 조작하고 의지를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자야말로 진짜 세상이 두려워해야 할 존재인 것이다.
유진 본인은 크게 활용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유진의 정신계 초능력이 그의 육체 능력 수준으로 강해지면, 특히 경외심이나 두려움 친밀감 같은 감정의 영역을 건드리는 분야에서 그렇게 된다면, 그건 정말 재앙이 되리라는 것에 전문가 모두가 동의했다.
그리고 지금 유진에게서 약하게나마 그에 관련된 조짐이 드러난 것이다.
미리엄이 애써 조성한, 그나마 멋진 일을 하고 있다는 분위기는 한순간에 날아갔다.
“신인류? 신인류라고! 씨발, 이래서 잽들이란!”
“어이!”
누군가 해서는 안 될 수준의 욕설을 내뱉고 누군가 제지했지만, 사실 거기에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미리엄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의 병신 같은 짓에 유진의 위험성이 더 커진 것은 커진 것이고 지금 당장은 더 우선 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미리엄은 약간 패닉에 빠진 부하들을 추스르기 위해 빠르게 여러 가지 명령을 내렸다.
유진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정보 조사를 위해 건물로 근접시키던 병력에게 거리를 유지할 것을 명령하고, 별도 추구를 조사 중인 팀에게도 유진의 상태가 위험하니 조우 상황에 관해 주의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가지에 집중했다.
“배후 세력 조사에 여유 있는 자원 다 쏟아 부어. 본국에도 지원 요청하고, 군의 정보부서들에도 정식으로 협조 요청서 보내. 배후 확실하게 찾아낸다.”
CIA의 전신은 OSS이고, OSS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에서 구 일본제국군을 상대하던 자들을 뿌리로 만들어졌다. CIA 말고도 미국 특수전 부대의 시작점인 그린베레도 마찬가지로 OSS를 전신으로 하고 있고, 여타의 많은 군과 민간의 첩보 조직들도 비슷하다.
그런 이유로 미국 정보 계통에는 아직도 구 일본제국의 사상과 행적에 대한 반감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근원에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동원한 무기 수준부터 한국에서 벌인 일들 그리고 사상까지.
이 조직은 여러모로 그들을 떠올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들이 주의를 더 기울이고 싶어질 정도로는.
** ** **
유진은 서울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목표를 향해 걷는 일에 열중했다.
통로를 따라 걷는 동안 좌우로 여러 개의 문을 볼 수 있었다. 안에 인적은 없었지만, 살짝 투시력을 동원해서 확인한 내부에는 어려서부터 본 적 있는 꽤 익숙한 장비나 시설들과 비슷한 것들이 보였다.
아직 설치가 끝나지 않은 듯한 방도 있었고, 이미 사용한 흔적이 있는 곳도 있었다.
끊어지고 부서진 머릿속의 것들이 이어지거나 복구되려다가도 그걸 보는 순간 다시 끊어지고 부서졌다.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다 인기척이 있었다.
왼쪽은 느껴지는 숫자와 기척 등으로 그들이 유진의 구출 목적인 여자들과 문제의 근원인 민영후 그리고 관련된 자들임을 알 수 있었다. 여자들 외에 남자들도 전부 민간인이라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유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처음으로 폭약이나 직접 공격 외의 부비트랩이 유진을 덮쳤다.
유진이 지나온 통로 뒤쪽 천장과 눈앞의 천장에서 무거운 소리와 함께 금속 벽이 떨어지면서 통로를 앞뒤로 막았다. 그리고 이미 한번 겪은 적이 있는 강산성의 황산액이 천장과 벽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유진은 당황하거나 망설이지 않은 채로 곧바로 정면을 가로막은 벽을 향해 다가갔다.
처음 이것과 똑같은 벽으로 막힌 함정에 빠졌을 때는 부수기 어렵다는 생각에 다른 방법을 고민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쾅. 쾅. 쾅. 쾅.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방패에 찍힌 벽은 찍힐 때마다 잘려 나가서 네 번 만에 커다란 구멍이 났다.
유진은 뿜어져 나오는 황산액을 등 뒤로 하고 구멍을 통과했다. 유진이 빠져나가자마자 황산액의 분출은 멈추었다.
유진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감시 카메라도, 자기 눈앞에 설치된 함정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먼저 제거하지 않았다.
벽 속에 숨어 거치되어 있던 기관총도,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클레이모어도, 정말 고전적인 발목 절단 지뢰 같은 것도 그냥 다 발동되는 것을 기다렸다가 막아낸 다음 파괴하고 지나갔다.
본인들도 유진 자신이나 죽은 친구들이랑 같은 처지라고 주장하는 놈들에게, 자신과 죽은 친구들이 당한 것 같은 끔찍한 실험이나 잔혹한 도축 같은 것은 경험하게 해주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실패한 탈출 겸 반란의 마지막 순간 느꼈던 그때의 기분 정도는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끝없이 몰려오는 적의 병력에 몰리고 몰려 발악하고 발악하며 발악적으로 싸우다가 마지막에는 죽음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될 때까지 몰린 그때의 처절하다 못해 비참하고 허무했던 마음 말이다.
그래봐야 얼마 하지도 못했다.
갈림길 이후 통로는 고작 몇십 미터에 불과했다.
사실 국가 몰래 건설한 비밀 지하 시설의 규모로는 엄청난 대형에 가까운 크기였기 때문에 정보를 취합 중이던 미국은 기겁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UE 내에서도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탈출 당시의 스위스 연구소를 떠올리는 유진은 그 몇십 미터가 너무 짧아서 안타까울 정도였다.
유진이 복도 끝에 도착했을 때, 남은 것은 이제 단단한 문 하나뿐이었다. 가장 중요한 심처라는 것을 상징이라도 하듯 지금까지 보아온 방어나 차단문 중에서 가장 두꺼웠던 문의 2배가 넘는 두께였다.
그리고 투시력으로 들여다본 문 안쪽에는 4명의 남자가 방안의 곳곳에 매복한 채로 문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싸우려는 모습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두려움에 젖어 떨리는 몸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 점은 아주 약간 유진을 만족스럽게 했다.
그리고 한쪽으로 보이는 모니터에 숫자가 카운터 중인 것이 보였다. 대략 3분 정도 남아 있었다.
유진은 그것이 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헛웃음이 터졌다.
“하아? 자폭 카운트?”
오는 길에 샅샅이 확인했다. 출입구나 통로 주변으로 가끔 부비트랩 용도로 설치된 클레이모어 정도는 있어도 이 시설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을 정도로 설치된 폭약은 없었다.
내부에서 벌컨포를 쏴대고, 무반동포를 쏴대도 멀쩡할 정도로 튼튼하게 지어진 곳이었다.
이런 시설을 붕괴시키려면 어지간한 폭약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고, 그런 걸 유진의 눈에 안 띄는 곳에 설치해두는 일은 더 어림없다. 폭발물과 격발 장치도 한번 설치한 다음 천년만년 관리 없이 내버려 둬도 유지되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작동 중인 자폭 시스템이 이 관리실 자체를 파괴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과 이 관리실에는 저들이 지금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비밀을 지키고 싶은 자료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겨봐야 자기에게 필요한 정보는 아니고 여길 차지할 미국 애들이나 좋아할 정보이지만, 미국 애들이 이득을 보더라도, 이들을 더 좌절시키고 싶었다.
강화된 투시력과 염동력으로도 사람 자체를 해치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지만, 전자 장비나 기계 장치를 조작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염동력도 투시력도 그냥 물리력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에 대한 작동에 뭔가 의미가 있는 것인지, 사람을 상대로 할 때랑 물건을 상대로 할 때 사용되는 에너지의 양과 발동되는 힘의 수준이 매우 달랐다.
이번에도 여전히 [바벨의 기억]이 제공해주는 것으로 확신 되는 직감적 지식에 따라 몇 가지 회로를 부수고, 몇 가지 전선을 끊거나 연결했다. 겨우 몇십 분 전에 처음 사용하게 된 능력을 겨우 몇 번 사용했을 뿐인데 벌써 표가 나게 복잡한 작업이 가능해졌다.
심지어 자폭 장치를 정지시키는 것만 아니라 훨씬 더 재미있는 것도 가능했다.
자폭 카운트가 멈추자 내부의 인원들이 당황해서 이것저것 확인하는 사이 육중하게 잠겨 있던 관제실 보안 문의 잠금이 소리 해제되었다.
유진은 거칠게 문을 밀쳐 열은 다음 문가에 서서 그대로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 타다탕! 타다탕! 타다탕! 타다당!
방안의 5번 대 대원들도 모두 근거리에서 소총탄의 직사도 막을 수 있는 수준의 방탄복을 갖추고 있었지만, 얼굴에 탄환이 날아와 박혀서 뇌를 박살 내는 상황에서는 어떤 방탄복도, 어떤 능력을 갖춘 초인인지도 상관없다.
유진조차도 뇌가 다 박살 나고도 살아날 수 있는지는 확인 못했고, 유진 외에는 그 누구도 손상된 뇌를 약간 이나마 재생해낸 자는 없었다.
5번 대 대원 4명은 그들보다 앞서 죽은 선배들과도 비교도 할 수 없이 무력하게 사살당했다.
이 방안에 살아남은 자도 없고, 뭔가 더 위험하게 가동 중인 장비도 없음을 확인한 유진은 굳이 안쪽까지 들어가지 않은 채로 몸을 돌렸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오는 내내 부비트랩이 즐비하던 복도를 거꾸로 지나 다시 갈림길에 도착했고, 이번에는 왼쪽으로 걸었다.
오른쪽 길과는 달리 함정 따위는 없었다.
지나가는 복도 좌우로 식당이나 부엌, 세면장이나 침실 같은 것이 보였다. 갈림길을 기준으로 왼쪽은 생활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목표는 복도의 끝에 몰려 있었다.
유진은 중간에 보이는 것들에 관심 두지 않고 끝까지 걸어갔다.
우습게도 생활공간의 끝에 있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의 관제실만큼이나 두꺼운 보안 문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투시력으로 들여다본 내부는 웃기지도 않았다.
유진은 소총 대신 권총을 뽑아 손에 쥔 다음, 역시 투시력과 염동력으로 장치를 조작해 문을 열었다.
투시가 아닌 맨눈으로 확인한 바닥의 붉은색 두꺼운 카펫부터가 유진에게 참 구역질 나는 기분을 선사했다.
“자, 잠깐 협상하자!”
그리고 들려온 누군가의 외침에는 그런 구역질 나는 기분으로조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혐오스러움을 느꼈다.
탕!
유진은 대답 대신 그냥 권총 방아쇠부터 잡아당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