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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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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 18
유진이 지하 시설을 나가는 동안에는 별일 없었다.
중간에 주로 독일 HK사의 제품들이 주류인 총기들과 그 외의 전투 장비들이 좀 관심을 끌었지만, 그냥 지나쳤다. [바벨의 기억]에 대한 자각 이후 총기류에 대한 애착이 약간 시들해진 상태였다.
연구 장비나 기타 시설들은 아예 관심도 가지 않았다. 그건 그냥 이 건축물의 시멘트벽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어떻게 쓰였을지는 알고 혐오감도 들지만, 부수기 위한 노력조차 아깝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입구에 뉘어 놓았던 김은주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몸도 멀쩡했다. 유진은 그녀를 그냥 지나치려다가 그래도 시멘트 바닥은 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안아 들고 1층으로 올라왔다.
1층도 총격전과 그에 이은 수류탄 사용 등으로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비교적 덜 탄 소파가 하나 있어서 거기에 그녀를 눕혀 두었다. 뒷일은 미국 인원들이 알아서 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뛰어내렸던 건물 절벽을 다시 뛰어 올라가 자기가 처음 출발을 위해 대기했던 장소로 돌아갔다.
원래 입고 왔던 갈아입을 옷을 미리 대비시켜두었던, 그리고 장비를 두고 가기로 한 그곳에 뜻밖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진이 미리엄의 호의로 이런저런 장비를 챙길 때 그걸 감독하고 도와주었던, 그리고 유진에게 섬광폭음탄과 수류탄 그리고 연막탄의 사용 노하우나 유진이 고른 장비 등에 대해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줬던 미군 장교가 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진과 미리엄은 여러 번의 밀당을 통해서 서로 얼굴을 보는 일은 없기로 했다. 그래서 이 자리에 누구도 기다리지 않을 것이며, 이 강원도 깊은 산속에서 서울을 거쳐 인천 근방에 있는 집까지 돌아가는 일까지 유진이 스스로 알아서 하기로 했다.
이 흑인 장교가 여기 있는 것은 명백하게 미리엄과 유진의 협상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미스터 헤이즈. 잠시 대화할 수 있을까요?”
그의 태도는 조심스러웠지만, 그건 유진에 대한 존중에 가까웠다. 지금의 접촉이 비밀이라는 느낌은 아니었다.
유진은 미리엄이 약속을 어긴 것인가 잠깐 생각했지만 부정적이었다. 그녀가 그런 바보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흑인 장교는 장비 임대를 위해서라지만 처음부터 유진과 얼굴을 마주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것도 따로 마스크도 끼지 않고 맨얼굴로.
거기에 유진은 이 인물에 대해서 미리엄에 대해서 어떤 언급도 들은 적이 없다는 것도 기억했다. 미리엄은 미리 준비해둔 무장 컨테이너에서 원하는 물건을 맘대로 골라가라고 했지, 거기서 담당자가 무장을 도와줄 거라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더 있었다. CIA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예산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 기관이지만, 그건 국방부는 아예 예외로 취급하기 때문에 그렇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당신은 그녀의 통제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군. 말로만 듣던 펜타곤의 힘인가?”
“그건 아닙니다. 전 이번 작전과 별개로 당신과 관련된 개인적인 사람들을 대표해서 당신과 접촉을 허가받았습니다. 당신이 동의해주지 않으면 이 자리를 곧바로 벗어난다는 조건으로요.”
그걸 허가한 사람이 미리엄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이런 걸 알았다면 미리 말해주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그가 말하는 개인적인 사람들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시점에서 미국인들 중 자신과 개인적인 문제로 관련이 있고, 이 흑인 특수부대 장교를 대표로 내세울 사람들은 한 부류밖에 없었다.
꽤 많이 불쾌했다. 하지만 이 흑인 장교가 준비과정에서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호의와 지금의 태도를 보아 참았다. 무엇보다 그가 흑인이라는 것과 초인 에센스 전혀 없는 존재라는 점을 감안했다.
유진은 들고 있던 총기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장교는 그게 동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1특전단 델타 작전 분견대의 조나스 뷰포트입니다.”
원래는 절대 기밀이지만 그는 소속 부대와 본명을 숨김없이 밝혔다. 지금부터 자신이 유진과 나눌 이야기를 생각해서 최대한 솔직한 모습을 보이려고 한 것이었고, 유진은 그걸 꽤 좋게 받아들였다.
유진이 건네주는 장비들을 장기 보관을 위해 미리 준비한 펠리컨 케이스에 담으며 뷰포트 중령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오해가 없도록 밝히면, 제가 당신과의 대화 대표로 뽑힌 이유는 제가 흑인이라서도 아니고 제가 특수 시술을 받지 않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유진은 확실히 오해하고 있었다.
유진은 미군 특수전 부대에서 유색인종은 15%밖에 되지 않는다는 통계를 알고 있었고, 델타 소속의 흑인 장교는 굉장히 소수에 속하는 정도를 넘어 이레귤러에 가까운 존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가 일종의 버려도 되는 카드로 자기에게 보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왜 당신인 거지?”
“제가 가장 많은 부하 대원들을 그 부대로 보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당신에게 보낼 대표를 뽑을 때 가장 많은 인원이 저를 추천했죠.”
바꿔말하자면 그 정도로 부하들에게 신뢰받는 장교라는 뜻도 되었다.
유진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특수전 작전에 직접 발로 뛰는 현역은 아니겠지만, 특수부대 들의 특수부대라는 델타의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화하고 신뢰가 가는 느낌의 사람이었다. 특수부대하면 생각나는 과격하고 옹고집인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본능적으로 사람의 품성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는 유진에게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서 첫인상이 제일 좋은 느낌이었을 정도였다.
유진이 군복까지 벗고 원래의 자기 청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는 사이 뷰포트 중령은 유진이 건네준 모든 장비를 미리 준비한 펠리컨 케이스에 잘 정리해서 넣은 다음 위치 추적 장치를 작동시키고 자물쇠를 걸었다.
유진은 어쩌면 뷰포트 중령에 대해서 미리엄이 알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유진이 정리했다면 장비들과 의복들을 저렇게 깔끔하게 정리하지도, 위치 추적 장치나 자물쇠 같은 것도 없이 그냥 방치했을 테니까. 거기에 지금쯤이면 당연히 슬슬 모습이 느껴져야 할 회수 담당 인원도 전혀 기척이 없었다.
정리를 끝낸 뷰포트 중령이 유진도 마무리를 끝낸 것을 보고 본격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가려 했다.
“일단 상황을 좀 설명해 드리자면.”
유진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당연히 차 가지고 왔겠죠? 눈에 띄는 종류인가요?”
“한국산 SUV를 빌려서 가지고 왔습니다. 흰색에 이 나라에서 가장 흔한 차 중의 하나라고 하더군요.”
“그럼 저 좀 서울로 태워다 주시죠. 이야기는 가면서 합시다.”
“기꺼이.”
뷰포트는 웃었다.
그를 대하는 유진의 말투부터 호의적으로 변한 것을 그도 충분히 느꼈다. 무엇보다 몇 마디 대답만 들어도 성공이라고 생각하던 그에게 서울까지 주어진 1시간의 시간은 거의 복권이 당첨된 느낌이었다.
서울로 향하는 길에서 둘을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일단 유진은 미군 소속의 슈퍼 솔져 들은 자신에게 죄책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국의 위대한 과학 발전의 성과라고만 생각했던 슈퍼 솔져 시술이 사실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의 신체 조직을 이용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 그 희생자들의 대표 격인 존재가 원한에 가득 찬 채로 세상에 풀려 나온 상태였다.
그들은 유진이 세상을 향해 꿈꾸고 있을 복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겁한 마음이기는 하지만 가능하면 유진과 싸우지 않고 싶었고, 싸우더라도 가족까지 이 일에 관련되지는 않도록 최소한의 타협이라도 하고 싶었다.
국방부를 포함해 미국 정부도 이런 슈퍼 솔져 들의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정부도 이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했을 무렵에는 이런 부도덕함이 숨어 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런 변명이 통할 상황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반란까지 걱정해야 할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슈퍼 솔져의 일원이 유진과 직접 접촉하도록 허락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신뢰성에 대한 서로 간의 타협의 결과로 뷰포트 중령이 대표로 선정된 것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유진은 이미 입장을 정해둔 적이 있었다.
“만약 싸우게 된다면 목적을 위해 가족들이라고 예외가 되지는 않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들에게 아무 생각 없습니다.”
“그런가요?”
“뜻밖인가 보군요.”
“솔직히 말해서 감히 당신들이 겪은 일을 이해한다고 말할 엄두도 나지 않지만, 그래도 상상은 가능하지 않습니까? 나라면 그런 일을 겪고 참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반대입니다.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에 굳이 이따위 세상에서 정의 따위 실현하기 위해서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겁니다.”
“복수는요?”
“누구에게요? 이 세상 전체에게요? 세계 멸망이라도 노릴까요?”
“죄 없는 사람들까지 끌어들일 일은 아니지 않나요?”
“누가 죄가 없을까요? 당신을 보낸 군인들은 그들의 몸에 내 신체 일부나 죽은 내 친구들의 신체 일부가 이식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서 그것이 가진 의미를 깨달은 거겠죠. 그럼 모르는 상태로 그런 걸 이식받은 것이 그들만일까요?”
“지금 한참 이곳저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슈퍼 솔져는 전부 포함되는군요.”
“그들만이 아닙니다.”
“더 있습니까?”
“몇 년 전 전 세계에 어마어마한 신종 전염병이 돌았더군요. 전염율과 치사율이 엄청나게 높아서 펜데믹이 선언되고 세계 멸망까지 고민할 정도로요.”
“스위스의 다국적 제약사 [에델]이 비교적 빠르게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성공해서 펜데믹을 막았지요. 으으음. 그게 뭔가 관련이 있나 보군요. 개발 기간이 너무 짧아서 병 자체를 [에델]이나 관련된 곳에서 퍼트린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도 제기되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물론 그 음모론은 [에델]이 백신과 치료제 제조법을 조건 없이 전 세계에서 공개해서 사라졌습니다.”
“그때 내 친구들 포함해서 한 수백 명 정도는 실험실에서 죽은 것 같군요. 내가 아는 한도만 그렇고, 아마 몇 배는 더 될 겁니다. 당시에 나도 거의 죽을 뻔할 정도로 피와 장기들을 채취당했죠. 그 이유는 최근에 알았지만.”
뷰포트가 숨 막히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하는 그의 표정에 유진도 입을 다물었다.